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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몽인,선생의 유두류산록-1611년
    지리 탐구방,탐방기고 2020. 8. 8. 15:11

    1611년 <유몽인>선생의 [유두류산록]


    ▲일시 : 1611년(광해 3) 3월 29~ 4월 8일
    ▲동행 : 유영순∙김화∙신상연∙신제 및 종 등
    ▲일정 :
    •3/29: 남원부 관아→재간당→반암→운봉 황산 비전→인월→백장사(1박)
    •4/1: 백장사→황계→영대촌→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1박)
    •4/2: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갈월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박)
    •4/3: 군자사→의탄촌→원정동→용유담→마적암→두류암(1박)
    •4/4: 두류암→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1박)
    •4/5: 향적암→영신암→의신사(1박)
    •4/6: 의신사→홍류동→신흥사→만월암→여공대→쌍계사(1박)
    •4/7: 쌍계사→불일암→화개동→섬진강→와룡정→남원 남창(1박)
    •4/8: 남창→숙성령→남원부 관아

     

    나는 벼슬살이에 종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겨를 없이 지낸 것이 벌써 23년이나 된다.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에 있으면서 임금 계신 곳에 출입한 것이 또한 오래되었으니, 불초한 나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늙은 데다 잔병이 잦아지니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평소 산과 바다를 즐겨 유람하였으며 귤∙유자∙매화∙대 등이 어우러진 시골에서 살기를 꿈꾸었다.

    만력(萬曆) 신해년(1611) 봄에 벼슬을 사양하고 식구들을 거느리고서 고흥(高興)의 옛날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의 대부들이 내가 아직 상늙은이가 아닌데도 미리 물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용성(龍城)의 빈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은혜롭게도 그곳의 수령으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용성은 고흥과 1백 리도 채 안 되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행장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2월 초에 임지로 부임했다. 용성은 큰 고을인지라 공문을 처리하는 데 정신없이 바빴다. 게으르고 느긋한 나로서는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식(寒食)이 가까울 무렵, 승주(昇州) 수령 유순지(柳詢之)가 용성의 목동(木洞) 선영에 성묘하러 왔다. 유순지는 나보다 선배이다. 나는 ‘불초한 내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왔으니 예모를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목동 수용암(水舂巖) 근처의 수석이 빼어난 경관에 꽤나 마음을 기울였다. 진사 김화가 그곳에 살고 있는데, 집의 이름을 ‘재간당(在澗堂)’이라 하였다. 재간당은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서너 겹으로 둘러 쳐진 구름 서린 봉우리를 누대 난간에서 마주 대할 수 있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가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상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시황과 한 무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우리들은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다.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나는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올 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랜 숙원을 풀고 싶소. 누가 나와 함께 유람하시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지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 영남 지방의 감사로 나왔을 적에 이 산을 대략 유람했소. 그러나 종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병폐로 여겨 한쪽 방면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소. 내가 승주로 부임해오게 되어 우연히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소.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어찌 혼자 쓸쓸히 유람을 할 수 있겠소? 이제는 외롭지 않게 되었으니 그대와 함께 유람하겠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굳게 약속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며 재간당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3월 27일(정묘).

    유순지가 약속한 날에 도착하였다.


    28일(무진).

    처음 약속했던 장소에서 다시 모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기생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여 모두들 실컷 취했다. 한밤중이 되도록 술자리가 이어져 그대로 시냇가 재간당에서 잤다.

    29일(기사).

    수레를 채비하게 하여 서둘러 떠났다. 유순지는 술이 덜 깨 부축해 수레에 태웠다. 재간당 주인 김화와 순창에 사는 내 집안 생질 신상연과 천한 몸에서 난 인척 생길 신제도 나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요천(蓼川)을 거슬러올라 반암(磻巖)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雲峯)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만력 6년(1578)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朴光玉)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ㅗ 비석을 세우기로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이 전액(篆額)을 썼다. 지난 고려 말 왜장 아기발도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녀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山陰) 땅에 ‘황산(黃山)’이란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가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키며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대적하여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일 뿐이겠는가. 그 당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지난 정유년(1597) 왜란 때, 양원(楊元) 등은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려다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당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랴.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다.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가 피를 흘렸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준 것인가보다.

    운봉 수령 이복생(李復生) 백소(伯蘇)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역참(驛站)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몇 순배 돌리고 나서, 곧바로 일어나 함께 길을 떠났다. 시내를 따라 10여 리쯤 가니 모두 앉아 구경할 만한 곳이 있어 수레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쉬었다. 북쪽으로부터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길은 점점 험난해져, 말이 끄는 수레에서 남여로 바꾸어 타고 백장사(百丈寺)로 들어갔다. 유순지는 숙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먼저 불전(佛殿)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다.

    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만큼 크고 모란꽃처럼 붉었다. 그 나무는 두어 길 됨직하게 높았다. 다른 하나는 ‘춘백화(春栢花)’였는데 붉은 꽃받침은 산에서 나는 찻잎처럼 생겼고 크기는 손바닥만하였다. 병풍과 족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절의 위쪽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천왕봉을 곧장 마주하고 있어 두류산의 참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4월 1일(경오).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리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내리며 벽력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대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숱한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는 젓대를 불게 하고, 종수와 청구는 태평소로 『산유화(山有花)』를 불게하였다. 음악이 산에 울려 퍼지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며,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동자로 하여금 통을 열어 묵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

    황계폭포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회(檜)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렀다. 두 줄기 시냇물이 합치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壇)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가 승복을 갖추어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庵)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임해 있는 바위가 절로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불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다랑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이백소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이 바로 노판서의 서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진)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거처하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시킬 수 있겠구나.


    2일(신미).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밑으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꺾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 스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는다. 함께 유람 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 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잇는데,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렀다.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다. 높은 터에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이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보았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졸졸졸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내렸다. 물이 청량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은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이름난 승려 선수가 이 암자에 사는데,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연역하여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는 유순지와 퍽 친한 사이였다. 우리에게 송편∙인삼떡과 팔미다탕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밤 등이 많이 난다.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가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

    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다. 처음으로 무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저물녘에 군자사로 들어가 묵었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인지라 흑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다.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청량한 유람을 하여 신선의 세계에 오른 듯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저녁에 속세로 떨어지니 사람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에 마귀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공자께서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늘 가슴속에 새기기 어려운 듯하다.


    3일(임신).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呑村)을 지나는데 옛일에 대한 감개가 무량하였다.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으로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 곧장 3~4리를 가서 원정동(圓正洞)에 닿았다. 동천(洞天)이 넓게 열려 있으며, 갈수록 경관이 아름다웠다.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 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기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시로써 증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서서 연못에 던져 희롱해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 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층층의 푸른 봉우리 사이로 우레 가은 소리와 번쩍번쩍 번갯불 같은 빛이 잠시 일어나더니 곧 그쳤다.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거의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참 뒤 하늘에 구름이 뒤엉키더니 구름장 사이로 햇빛이 비추었다.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젖은 풀섶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질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넝쿨을 잡아당기며ㅕ 오르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힘들게 오르내리다 보니 얼굴이 땀에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가령 강제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은 아무리 꾸짖어 금하더라도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길을 가거나 모여 앉아 쉴 때는 떠들고 웃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어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4일(계유).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뚫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굽어보니 어두컴컴하였다. 정신이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 이름난 강산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사나운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다. 갈증 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 “이 풀은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청옥∙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에 올랐다.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나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10분의 2~3은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으니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이름 붙인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제일봉에 올라 바라봄에랴.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사)로 삼았다. 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곡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모사∙백모당∙용유담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이 날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 뿌연 대기가 사방에서 걷히니, 광활하고 까마득한 세계가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마치 하늘이 명주 장막을 만들어 이 봉우리를 위해 병풍처럼 둘러친 듯하였다. 감히 시야를 가로막는 한 무더기 언덕도 전혀 없었다. 단지 이리저리 얽혀 잇는 푸른 것은 산이고 굽이굽이 감아도는 흰 것은 물임을 알 수 있을 뿐, 어느 곳인지 무슨 강인지 어떤 봉우리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시험삼아 산에 사는 승려가 가리키며 이름을 대는 대로 따라 보았다. 동쪽을 바라보니 대구의 팔공산(八公山)과 현풍(玄風)의 비파산(琵琶山)과 의령의 자굴산(자堀山)과 밀양의 운문산(雲門山)과 산음(山陰)의 황산(黃山)과 덕산(德山)의 양당수(兩塘水)와 안동의 낙동강이 보였다. 서쪽을 바라보니 무등산은 광주에 있고, 월출산은 영암에 있고, 내장산은 정읍에 있고, 운주산(雲住山)은 담양(潭陽)에 있고,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에 있고, 금성산(錦城山)과 용구산(龍龜山)은 나주에 있었다.

    남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바라보니 곤양임을 알겠고, 백운산(白雲山)을 바라보니 광양임을 알겠고, 조계산(曺溪山)∙돌산도(突山島)를 바라보니 순천임을 알겠고, 사천 와룡산(臥龍山)을 바라보니 동장군(董將軍)이 패한 것이 생각나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을 바라보니 이순신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 북쪽으로는 안음(安陰)의 덕유산과 전주의 모악산(母岳山)이 하나의 작은 개미집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사이에 큰 아이처럼 조금 솟구친 것이 성주의 가야산이었다. 삼면에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큰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의 여러 섬은 까마득히 하나의 탄환처럼 작게 보일 뿐이었다.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삶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는 다 긁어 보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거늘 조잘조잘 자기만 내세우며 옳으니 그리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떠벌이니, 어찌 크게 웃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치면 천지도 하나하나 다 가리키며 알 수 있으리라.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하난의 작은 물건이니, 이곳에 올라 높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 안기생(安期生)∙악전(偓佺)의 무리가 난새의 날개와 학의 등을 타고서 구만리 상공에 떠 아래를 바라볼 때, 이 산이 미세한 새털만도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 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고 하였다. 매년 8,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 놓고 매가 걸려들길 기다린다고 한다. 대체로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원근의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이다.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 또한 대부분 이익을 꾀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아,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 한입도 안 되지만 백성의 온갖 고통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해가 기울어 향적암(香績庵)으로 내려갔다. 향적암은 천왕봉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쪽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바위들이 우뚝우뚝하였다. 향적암은 작은 암자이지만 단청칠을 해놓았다. 북쪽으로는 천왕봉을 우러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산세가 호걸차고 빼어나서 주변의 산과는 다른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5일(갑술).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먼저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데 위치하고 종들은 높은 데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하니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가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하러 갔는데 어디 잇는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다.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험하였는데,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니 컴컴하여 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이 절에 의신사 주지 옥정(玉井)과 태승암(太乘庵)에서 온 각성(覺性)이 있었는데, 모두 시로 이름이 있는 승려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모두 율격이 있어 읊조릴 만하였다. 각성은 필법이 왕희지의 체를 본받아 매우 맑고 가늘며 법도가 많았다.

    내가 두 승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속세를 떠난 사람들인데 어찌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소? 내가 지나온 것과 비교해볼 때 그대들은 일찍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외진 곳에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푸른 솔을 벗하고 흰 사슴과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생각건대 나의 발자취는 푸른 솔과 흰 사슴이 사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온 것이니 내가 그대들에 비해 낫소”라고 하자 두 승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놀다 밤이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6일(을해).

    드디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갔다. 시냇가에 불숙 솟은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파란 시냇가에 가서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의 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들어 돋움 발로 구경하며 음악을 듣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았다.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문고∙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홍류(紅流)’란 사영운의 시 “돌층계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홍천(紅泉’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의 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지금 내가 기담 가로 옮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경(眞경)이 허물을 뒤집어씀이 심하구나.

    이에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다. 나와 유순지는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으나, 두 승려가 말하기를 “합하를 모시고 내려가 시냇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속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집니다”라고 하고서, 시를 소매 속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지팡이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 내려가다가 한 줄기 시냇물과 한 맑은 연못과 한 무더기 봉우리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동행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도착하여 누워 쉬고 있었다. 함께 시냇가 바위 위에 올랐다. 시냇물이 대일봉(大日峯)∙방장봉(方丈峯)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데,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맑은 물이 돌을 굴렸다. 평평한 바위는 6~7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 위에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동네 이름이 ‘삼신동(三神洞)’인데,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靈神寺)∙의신사(義神寺)∙신흥사(神興寺)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알 수 있다.

    비결서에 “근년에 최고운(崔孤雲)이 푸른 당나귀를 타고 독목교(獨木橋)를 지나는데 나는 듯하였다. 강씨 집의 젊은이가 고삐를 잡고 만류 하였지만, 채찍을 휘둘러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또 “고운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다.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가령 이 세상에 참다운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느 곳에서 노닐겠는가?

    이 날 유순지는 먼저 칠불암(七佛庵)으로 갔다. 나는 이 절의 승려에게 자세히 묻기를 “칠불암에 기이한 봉우리가 있소?”라고 하니,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폭포가 있소?”라고 하니,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맑은 못이 있소?”라고 하니, 역시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그러면 그곳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으니, “칠암정사(七菴精舍)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단청칠한 절은 실컷 구경했고, 녹음이 우거진 계절인지라 볼만한 기이한 경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데 이미 흥이 다하여, 시냇가 길을 따라 내려가며 수석을 구경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길을 떠나 홍류교(紅流橋)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 여공대(呂公臺)에 이르러 앉았다. 깊은 못 가에 나가 구경을 하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가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을 행구기도 하였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최고운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다. 김탁영(金濯纓: 김일손)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끼 낀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맑은 물과 흰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린 종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

    쌍계사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螭首)와 귀부(龜趺)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아들어 지음’이라고 씌여 있었다. 곧 당 희종 광계 연간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는,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나는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들은 바가 있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최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내가 금오(金吾)의 문사랑(問事郞)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일찍이 최고운의 서법을 배웠소?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하시오”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아울러 옛 일을 통해 슬픈 마음이 들었다.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 하여 탁본하였다.

    절에는 대장전(大藏殿)∙영주각(瀛洲閣)∙방장전(方丈殿)이 있었다. 예전에는 학사당(學士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버렸다. 날이 저물어 유순지가 칠불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7일(병자).

    유순지가 작별을 고하며 “나는 몇 년 전에 청학동을 유람하여 이제 다시 가볼 필요가 없으니, 어찌 곧장 돌아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김화도 “저도 전에 청학동을 실컷 구경하였습니다. 농사철이 되어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갈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전송한 뒤 돌아와 혼자 신상연의 무리와 함께 동쪽 고개를 넘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 골짜기는 황혼동(黃昏洞)∙월락동(月落洞)처럼 어두컴컴하였다. 긴 대나무가 길 양쪽에 서 있는데, 새로 나온 송아지 뿔 같은 죽순이 낙엽을 뚫고 삐쭉 나와 있었다. 종종 승려들의 신발에 채여 부러진 것이 있었는데, 나는 북쪽에서 내려온 나그네인지라 이를 보니 애석하였다. 절벽 밑에 이르자 승려들이 나무를 베어 가로질러놓은 사다리가 여러 군데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컴컴하여 밑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臺)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의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쯤 되었다. 여산(廬山)의 폭포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내 모르지만,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 듯하다. 다만 걸림이 없이 곧장 떨어지는 것은 이 폭포가 박연폭포만 못한 듯하다.

    하늘의 띠가 아래로 드리운 듯 한 폭포가 쏟아져 온 골짜기에 우레 치는 듯 요란하고, 붉은 빛깔을 띤 안개와 흰 눈같이 하얀 물방울이 골짜기 안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여, 정신이 상쾌해졌다. 이 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남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동쪽에는 혜일봉(慧日峯)이 있고, 서쪽에는 청학봉(靑鶴峯)이 있었다. 승려가 절벽의 구멍을 가리키며 “저것이 학의 둥지입니다”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붉은 머리 푸른 날개의 학이 그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몇 년 동안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비결서에 “지리산의 푸른 학이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겨갔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이설과 서로 들어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노새만한 산양이 향로봉 꼭대기에 한가히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비파와 피리소리를 듣고서 귀를 기울이며 서성이고, 사람을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다. 아, 금화산(金華山)의 신선이 기르던 짐승으로 흰 구름 속에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이나 한가로이 잠을 자다가, 감히 이곳에서 당돌하게 나로 하여금 양 타는 법을 배우게 하려 한단 말인가? 채찍을 들어 꾸짖자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가버렸다.

    유람이 끝날 때쯤 관아의 말이 골짜기에서 울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님을 이별할 때처럼 느릿느릿 말을 몰며 빠져나왔다. 며칠 동안 내 발길이 지난 길을 되돌아보니, 천 길이나 높고 한 아름이나 되던 큰 나무들이 바늘처럼 가늘게 보였다. 동네 이름을 물어보니 ‘화개동(花開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기 때문에 꽃이 먼저 핀다.

    옛날 정일두(鄭一蠹: 정여창)가 이곳에 집을 짓고 학업을 강마하였다. 일두가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하였는데, 일두는 힘이 다하자 허리에 새끼 한 가닥을 묶고 항 승려로 하여금 끌고 가게 하였다. 감탁영이 이를 보고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 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렇듯 좋은 나무들이 훌륭한 목공을 만나지 못해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빈 산에서 말라죽는 것을 생각하니,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애석히 여길 만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 나무들은 천수(天壽)를 다 누렸구나”라고 하였다.

    아,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마음은 본래 텅 비고 밝으니 말이 발하여 징험이 있게 된다. 그 뒤에 일두는 옥에 갇혔다 죽었고 탁영도 요절하였다. 그들이 천수는 모두 조물주의 입장으로서는 애석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으니 어찌 말의 예언에 징험이 있는 것이 아니랴.

    무릇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는 암암리에 합치되고, 통하고 막히는 것은 시대의 운수와 서로 부합한다.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히자 한퇴지(韓退之)는 스스로 자신의 정직함을 과시하였고, 동해에 신기루가 나타나자 소동파 또한 스스로 한퇴지에 비유하였다. 이들은 천운이 막히지 않은 줄 전혀 몰랐지만 오래지 않아 소환되었으니, 길조(吉兆)가 그들을 위해 먼저 나타난 것이다.

    삼가 김점필재와 김탁영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어보니, 그들이 천왕봉에 올라 유람하던 날 모두 비∙바람∙구름∙안개를 만나 낭패를 당한 것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이 정직한 줄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지만 불길한 징조는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나타났으니, 산신령이 그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유순지와 산에 들어온 뒤로 날씨가 맑고 온화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고 떠돌던 운기(雲氣)도 높이 날아올라 만 리나 뻗은 산과 호수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비록 신령스런 용을 건드려 한때 노여움이 있었지만 마침 다음날 낡게 개이도록 도와주었으니, 어찌 상심하랴.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한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이 날 남원부의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8일(정축).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관아로 돌아왔다. 서찰이 목전에 가득하고, 공문이 책상에 쌓여 있었다. 푸른 행전을 풀고 죽장을 던지고서 도로 석세의 일을 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로부터 사방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오르내렸으며, 청계산(淸溪山)∙보개산(寶盖山)∙천마산(天摩山)∙성거산(聖居山)에서 독서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청평산(淸平山)을 둘러보고 사탄동(史呑洞)으로 들어갔으며, 한계산(寒溪山)∙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 봄∙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 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

    그리고 적유령(狄踰嶺)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파저강(波豬江)∙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

    또 삼수(三水)∙갑산(甲山)을 다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앉아 저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으며, 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에 올랐다가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중국에 세 번 다녀왔는데, 요동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 남쪽 지방산의 정상이 북쪽 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볼 때 풍악산이 집대성이 되니, 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대단찮게 보이듯 이 두류산도 단지 한주먹 돌덩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두류산은 살이 많고 뼈대가 적으니,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이다. 문장에 비유하면 굴원(屈原)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의 글은 웅장하고, 가의의 글은 분명하고, 사마상여의 글은 풍부하고, 자운의 글은 현묘한데, 사마천의 글이 이를 모두 겸비한 것과 가다. 또한 맹호연의 시는 고상하고 위응물의 시는 전아하고, 왕마힐의 시는 공교롭고, 가도의 시는 청아하고, 피일휴의 시는 까다롭고, 이상은의 시는 기이한데, 두자미의 시가 이를 모두 종합한 것과 같다. 지금 살이 많고 뼈대가 적다는 것으로 두류산을 하찮게 평한다면 이는 유사복이 한퇴지의 문장을 똥덩이라고 기롱한 것과 같다. 이렇게 보는 것이, 산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면면이 4천 리나 뻗어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난ㅁ해에 이르러 엉켜 모이고 우뚝 일어나 산으로,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 사방의 둘레가 2천 리나 된다. 안음(安陰)과 장수(長水)는 그 어깨를 메고, 산음(山陰)과 함양(咸陽)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은 그 배를 맡고, 운봉(雲峯)과 곡성(谷城)은 그 허리에 달려 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과 곤양은 그 발을 물에 담근 형상이다. 그 뿌리에 서려 잇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나 된다. 저 풍악산은 북쪽에 가깝지만 4월이 되면 눈이 녹는데, 두류산은 남쪽 끝에 잇는데도 5월까지 얼음이 있다. 이를 통해 지형의 높낮이를 추측할 수 있다.

    옛날 사람이 일찍이 천하의 큰 강 셋을 논하면서 황하∙양자강∙압록강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살펴보건대, 압록강의 크기는 한양의 한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직접 보지 않고 범범하게 논한 것이니, 전기에 실려 있는 것도 주밀하지 못한 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 바다와 산을 모두 두 발로 밟아보았으니, 천하를 두루 유람한 자장에게 비할지라도 나는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 짓는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첫 번째 산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돈∙곡식∙갑옷∙무기 등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머리 허연 서생이 요리할 바가 아니다. 조만간 허리에 찬 긴 끈을 풀고 내가 생각한 애초의 일을 이루리라. 물소리 조용하고 바람소리 한적한 곳에 작은 방 한 칸을 빌린다면, 어찌 유독 고흥(高興)의 옛집에서만 나의 지리지(地理志)를 쓸 수 있으랴.

    만력 39년(1611) 신해년 4월 모일에 묵호옹(黙好翁)이 쓴다.

     

    **<최석기>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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