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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폐암지,미타봉(좌선대,소림산방),점필재(김종직)길 지리품속으로지리 산행기 2020. 9. 30. 13:17
# 언제: 2020년 09월 27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智異의 미타봉,좌선대,소림선방 과 점필재(김종직)길 품속으로
# 산행거리: 13.00Km 00시간00분
# 산행코스: 운서리 - 적조암 - 산죽비트(갈림길) - 박쥐굴 - 지장사터 - 헬기장 - 상대날등 - 금낭굴 - 선열암
유슬이굴 - 선녀굴 - 의논대 - 신열암 - 독녀암(노장대) - 통락문(안락문) - 고열암 - 점필재길 -
전망대 - 일강바위 -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 미타봉삼거리 - 향로봉(오뚜기바위) - 갈림길
통락문(안락문) - 독녀암(노장대) - 금낭굴(Back) - 문수사골 - 문수사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하다[엄천-고열암]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이곳에서 지장사 갈림길까지는 유두류록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구시락재와 거머리재를 넘어 적조암을 지나 지장사 갈림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다. 지장사 갈림길은 현재 노장대 마을 돌배나무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지장사 터는 돌배나무에서 북동 쪽으로 직선거리로 180m 지점에 있다. 김종직 선생은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갈아 신고 환희대를 거쳐 선열암과 신열암에 들렀다가 독녀암으로 가는데, 선열암과 신열암에서 승려를 만나지 못했고 해걸음에야 고열암에 도착한다. 김종직 선생 홀로 의논대를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의 산행을 마친다. 김종직 선생은 고열암에서 머물면서 선열암과 의논대, 고열암 등 주옥과 같은 4수의 기행시를 남긴다. 유두류록에서 '향로봉이 발 아래에 있다.'라는 내용은 유람록의 오류로 생각한다.
☞ 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 갈림길→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의논대→고열암(宿)[함양독바위는 산청독바위처럼 근거가 없음]
* 조위(曺偉, 1454~1503)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 유호인(兪好仁, 1445~1494) : 본관 고령.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㵢溪) * 한인효(韓仁孝, ?~?) 자는 百源, * 임대동(林大仝, 1432~1503) 字는 정숙(貞叔)羅州人。號는 매헌(晦軒), 임정숙은 유람록 서두에 이름이 나오나 산행을 했는지 의문(?) -퍼온글- -도솔산인-
동부5암자 폐사지 - 점필재(김종직)길
1472년, 조선의 지성 김종직은 4박5일 일정으로 지리산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의 지리산 문화를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인 지리산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김종직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대가로 함양태수 시절, 지리산을 늘 가슴에 담고 동경하다가 마침내 산행을 감행했다. 그의 산행기록을 보면, 함양관아를 출발해 엄천을 건너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자락의 지장사, 묘정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5개의 암자의 기록이 되어 있다. 5개암자를 들렀다가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을 돌아보고 인근의 고열암에서 첫날 밤을 보낸다. 이후 그는 새봉, 청이당, 영랑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윗 글에 동부칠암자 폐사지 및 함양독바위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동부칠암자 폐사지는 동부5암자 폐사지로,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로 바로 잡았으면한다.
그의 기록을 보면 지장사, 묘정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청이당(당집), 성모사(사당), 향적사, 영신사 등의 여러 암자가 등장하는데 이 중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거나 폐허가 되어 기와 파편만 흩어져 나뒹굴 뿐이다.
산행하며 지리 동부 폐사지 및 점필재(김종직)길에 대한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고, 공부하는데 흐뭇한 시간 이였으며, 또 내가 알고 있던 곳에 전혀 다른 뜻 빢 이란점에 대한 머리속의 혼동, 어렵다 지리는 하나, 하나, 정확히 이해 하는 공부를 하자.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꺼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경남 함양군 휴천면(천왕봉로) 용류교에서 바라본 미타봉
당산나무(점필재가 쉬어간 곳) - 위치: 엄천교 지나 동강길 동강마을(경남 함양군 휴천면 동강길)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화암(花巖) 아래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퍼온글- -도솔산님-
당산나무(점필재가 쉬어간 곳)
당산나무(점필재가 쉬어간 곳)
花巖(巖:산봉우리암)은 꽃봉산을 가리킴(연꽃의 형상임)꽃봉산은 花巖이다. 花巖은 꽃봉산 아래 특정한 바위가 아니고 꽃봉산 이름이 花巖이다. 巖은 바위라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의 뜻도 있다. 花巖에서 巖은 바위가 아니고 峯을 뜻한다. -퍼온글- -도솔산님-구시락재
임천(臨川)에서 피어오른 운해
거머리재 - 빌려온 사진(담 산행에 공부)
적조암 주차장
적조암
꺼비 - 두꺼비
적조암 위의 독가(獨家)의 옆으로
산죽비트(황새날등) - 박쥐 굴 - 갈림길노장동 돌배나무 - 빌려온 사진 담 산행에 공부
지장사 터 - 빌려온 사진 담 산행에 공부
샘터 석축 - 빌려온 사진 담 산행에 공부
샘터 흔적 - 지장사 터 주춧돌 - 빌려온 사진 담 산행에 공부
지장사터로 추정함(주춧돌과 샘터) - 빌려온 사진 담 산행에 공부
☞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지에 대하여
한 번 짚었던 내용으로 유두류록의 구두점에 오류가 보이는 부분이다. 다시 읽어보니 점필재 일행이 지장사에 들른 것이 아니고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으로 갈아 신은 것이다. 또한 선답자들이 지장암지라고 발표한 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암자의 입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리 99에서 지장사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야묘(野廟) 터로 본다. 야묘(野廟)는 마을 사람들이 토지 신에게 祭를 지내는 사당이다. 1년에 한두 번 제를 지내는 사당에 굳이 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 지장사 부분 발췌(1472년 08월 14일)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버리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이미 경치가 매우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1里를 나아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다.(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
암자나 사찰의 폐사지에 반드시 기와 편이 있어야한다는 설은 모든 암자의 지붕이 기와였다는 논리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선인들의 유산록을 보더라도 '영신사만이 기와 지붕이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암자와 기와를 무조건 연결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불일암 산신각은 너와집 불일암 법당은 띠집(茅屋)이었으니, 퇴락한 불일평전의 봉명산방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지장사가 샘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하며, 지장암에서 하룻밤 묵으며 시를 남긴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라는 내용을 근거하여 점필재의 지장사 경유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함양 고을의 수령이 암자의 앞을 지나가는데, 지장사 갈림길만 언급하고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암자의 사세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장암의 위치는 노진의 시에서 '바위틈의 샘물소리가 새벽 단꿈을 깨우네.'의 구절로 미루어 계곡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증광문과 급제 이전(1546년)이니, 1472년에서 1546年間에 지장사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뱀사골 도탄에 띠집으로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한 변사정(1529~1596)은 盧禛(1518~1578)의 제자이다. -퍼온글- -도솔산님-
박쥐 굴
우린 지장사 터로 알고 있었다 - 이곳도 지장사터 추정 - 지장사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야묘(野廟) 터로 본다. 야묘(野廟)는 마을 사람들이 토지 신에게 祭를 지내는 사당이다. -도솔산님글-
담 산행에는 지장터 꼭 공부 해야겠다.
산 머루 - 함께 한 산우님 흐뭇 할 만큼 따 먹음...
상대날등 - 헬기장
금낭굴 가기전 큰 암석독녀암(노장대)도 조망에 들어온다
금낭굴 갈림길
금낭굴 가는 중 암석
금낭굴 - 금낭굴은 거대한 바위자락에 형성된 암굴이다.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점필재(김종직)유두류록(遊頭流錄)에 없는 금낭굴은? 숙제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
금낭굴 큰 암석으로 되어 있다?
선열암으로 가는 길 잘못들었다 - 금낭굴 에서 윗 사면길 가면 길 아님 - 금낭굴 고도 에서 약간 윗 지점?
선열암 가는 길은 나오지만 고생 하는 길 - 큰 암석이 도 지나간다?
선열암 가기전 바로 옆 암석 여긴 어딜까 - 공부하자?
선열암 옆 암석 터 자리에서 점심?
선열암터 낙석
先涅庵[선열암]
선열암 촉촉수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운근(雲根)은 공기가 차가운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고 물방울이 맺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높은 곳에서 톡톡(촉촉 : 의성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데 절묘한 시어입니다.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금낭굴에서 오면 선열암 오르막 있는 로프?
유술이굴 - 860m
점필재(김종직)유두류록(遊頭流錄)에 없는? 유슬이굴에도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선녀굴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 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선녀 샘 - 가뭄에도 물 마르지않음
선녀굴 암지선녀굴,솔봉,유슬이굴,의논대 - 갈림길
의논대 오르기전 생명 다한 소나무?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상내봉(와불산)아님 - 앞으로 미타봉
일강(一岡)과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영랑대, 두류봉, 말봉, 영롱봉, 조망
길게 내려뻣은 벽송사능선 두류능선과 창암능선 중북부능선과 서북능선을 연달아 조망?
의논대 - 의논대는 주변의 암자 들, 신열암,선열암,고열암 등에 기거하던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불법을 논하던 곳이라고하여 의논대,의론대가 되었다고 한다.금대산과 백운산 삼봉산과 서룡산 조망
법화산 - 함양읍 - 저멀리 - 덕유산까지 조망견불동 마을 조망
의논대 상징 하는 바위 - 바위 이름은 뭘까?
의논대에서 독녀암(노장대)조망
독녀암(노장대) 이 큰바위 바로 옆이 독녀암(노장대)?
독녀암(노장대) - 독녀암(노장대)바위군(群), 또 다른 별세계 바위 숲, 거대한 암봉군의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는 [옹암(甕巖),진주독바위], [하동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로 불린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으로 등장하는데, 한 여인이 이곳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득도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돌기둥이 숲을 이룬 듯 솟아있다.
지리산 동북부지역의 잠시 조망하고 암봉을 내려온다.
신열암(新涅菴)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퍼온글- -빌려온사진-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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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金宗直, 佔畢齋)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점필재 길 조망터
점필재 길 걷다 약간 모양 있는 바위 - 일강 바위
일강바위 지나 구룡길 들머리,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상내봉삼거리(이제는 미타봉 삼거리), 갈림길 나온다.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가기전, 옛 와불산 정상석
소림산방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퍼온글-
소림선방 석굴 내부
좌선대
옛 상내봉(와불산) 정상석 있던자리
상내봉 삼거리(이제는 미타봉 삼거리)
오뚜기 바위 였는데 - 향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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