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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제 길(천왕봉,향적사,촛대봉,세석)지리의 품속으로지리 산행기 2020. 11. 2. 14:50
# 언제: 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 산행지: 점필재 길 (순두류,법계사,천왕봉,향적사터,서천당,초대봉,세석,거리) 지리 품속으로
# 산행거리: 16.63Km 07시간 20분
# 산행코스: 순두류버스정류장 - 법계사 - 천왕봉 - 통천문 - 제석봉 - 향적사터 - 서천당 - 장터목대피소
연하봉 - 촛대봉 - 세석 - 북해도 - 거림
한번 뿐인 소중한 내 인생인데
잠도 안오고 괜히 초조해지고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가 싶고
나만 이런가 싶고,
징글징글하게 사람이 싫다가도
한순간에 눈물나게 사람이 그립고,
너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라는 말에
괜시리 더 서러워 지는 날..
알아요,
많이 힘들죠,
정말 지쳐 죽겠죠?
현실은 내가 꿈꿨던 것과 달리
더 비참해져만 가고 점점 미치겠고,
일도, 사랑도, 인생도
되는거 하나 없고
가슴은 답답하고
몸은 지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답답한 현실,
갑갑한 인생,
그냥 될 대로 되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만사 귀찮다고 포기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많았을 거에요.
그런데 정말 포기할수 있겠어요?
못하잖아,
한번뿐인 소중한 내 인생인데
어때요?
다시 한번 힘을 내보는 게..!!
-흔들리는 나에게 필요한 말 한마디-중-
# 산행지도
# 산행사진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木棉始培遺址)는 고려 후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 1363년(고려 공민왕12) 문익점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였다. 1965년 당시 목화씨를 뿌렸던 300여 평의 밭을 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 마을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삼우당 선생 면화시배 사적지”라고 쓰인 사적비가 있고, 전시관도 건립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0호 목면시배유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백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지’라는 제목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오늘 산행은 점필재 길 천왕봉에서 통천문, 제석봉, 향적사터, 서천당, 장터목대피소, 연하봉, 촛대봉, 세석,으로 부산 토요산속 카페회원 산우님 들하고 걸으며, 지리 품속으로 들어 가 본다, 산행시작은 순듀류 - 산행은 끝은 거림이다.
중산리 주차장 도착해 - 순두류 버스 정류장까지 셔틀버스로 이동
남명조식 선생 유명한 두류산가頭流山歌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둘레꾼 혹은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생태탐방로 순두류 법계사길 걷는다...전날 대학 토쟁이들 모임에 늦게까지 마신 술로 산행하며, 힘듬의 연속이였다.
로타리 대피소
법계사
저멀리 문창대 조망이된다.
문창대,文窓臺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는 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이곳을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하였다가,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한다.
개선문
장터목, 일출봉, 조망, 멋지다
웅석봉, 달뜨기능선, 덕천지맥, 덕천강, 덕천마을, 남강, 진양호까지, 눈 호강하는 조망이다.
천왕샘,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라 가뭄이다.
이제 천왕봉(상봉) 거리 얼마 남지 않았다...술로 지쳐 있는 몸 힘것 걸어보자.
힘들다...산행 전날에는 술 마시지 말자.
천왕봉(天王峰, 1,915m)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天柱)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정상에는 청석표주(靑石標柱)와 지리산 산신령을 봉안하는 성모사(聖母詞)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성모 숭상의 유적인 천왕성모의 석상과 마야부인상이 그 옛날 모셔 있었다 하며 토속적 산신 신앙의 거룩한 대상이 되었다 한다. 동서 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거칠 것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조의 기관(奇觀)도 좋거니와, 새벽 동녘 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 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관으로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그러나 높은 천왕봉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쾌청한 날을 만나보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삼대적선을 한 사람이라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학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천왕봉 정상석에서 인증 기록 남기기 위해 줄 서있는 등산객 들...천왕봉 정상석도 많은 변천을 겪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예전 사진을 보면 1960년대 나무 기둥 같은 것에 천왕봉이라고 한글로 표기하여 세운 것이 있었다. 그 후 진주산악회에서 세웠다고 하는 오석烏石에 앞면에는 ‘天王峰‘, 뒷면에는,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 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는 남명의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정상석이 1982년 경남도지사 이규호와 당시 민정당 실세였던 권익현이 지금의 정상석을 세우면서 뒷면에 '慶南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썼다가 후에 여차여차한 이유로 '嶺南人'으로 바뀌었다가 언젠가 지금의 '韓國人'으로 다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봉, 하봉, 소년대, 영랑대, 동부능선 길 조망...멋지다.
천왕봉 천주,天柱
천주는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같다하여 새겨졌으며 부근에 예전에 일월대와 천주각자 부근에 성모신당이 위치하고 있었다하며, 천왕성모상은 현재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일월대,日月臺 -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1643년-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로 나와 앉아 피리 연주를 들으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삼신봉, 광양 백운산 조망...
헬기장에서 점심식사 후 오늘의 코스를 걷기 시작한다.
통천문
천왕봉으로 오르는 문은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 있으니 서문이라고도 불리는 통천문通天門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에 있으니 동문이라고도 불리는 개천문開天門이다.
하늘에 오르려면 반드시 통천문을 통과해야
통천문이라는 각자刻字 안으로 들어설라치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 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음산한 기운 속에 성모사에서 잠을 자던 점필재는 밤에 달이 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고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로다.”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멋진 바위다 - 바위 이름은 모르지만 담 산행에 바위 위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싶다.
제석봉 도착한다...몸 아직도 힘들다.
제석봉 이야기제석봉이라는 이 봉우리의 이름은 이곳에 있던 제석당(帝釋堂)에서 유래 하였다. 옛 지명은 중봉 이라고도 했다.함양이라 산청에서 올라오는이들이 볼때에는 천왕봉이 상봉이 되어 지금의 천왕봉-증봉-하봉 이겠지만 하동이나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이들에게는 제석봉이 중봉이고 천왕봉은 상봉 이였다 한다.
여기도 [당,堂]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니 신당 혹은 제당과 관련이 있다. 박여랑의 두류산일록(1610년)에 의하면 이 제석당을 23-24자(6-7m) 크기의 세 칸인 판잣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보면 제석봉을 제석을 산봉우리와 동일시하여 일컫는 지명 일것인데, 제석,帝釋은 삼신제석, 천주제석, 제석천이라고도 하는 하늘 신이며, 도리천에서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이 제석봉 역시 제석당이 있으니 토속신앙인 천신 혹은 산신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것임을 이름만으로도 알수 있다.
법계사 법당에서 본 바와 이동한의 방장유록(1790년)에 실린 그들의 무속행위를 정리해 보면...
삼남 지역의 무당들이 봄, 가을이 되면 반드시 이 산에 들어와 먼저 용담의 사당에 빌고, 다음으로 백무당에 빌고 또 제석당에서 빌고 그러고는 상당까지 올라가 정성을 바쳐 영엄해지기를 빌었다.
여기서 용담은 지난 편 살펴본 지금의 휴천면 남호리에 있던 용유당이고, 백무당은 백무동이며 제석당은 이곳 그리고 상당은 바로 천왕봉의 성모廟(祠)일 것이니 상-중-하당으로 위계를 이룬 민간신앙소의 면모도 파악 할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이 제석당이 김종직이 지날 때인 1470년 경이나 김일손이 지날 때인 1489년에는 없었는데, 박여량이 지날 때인 1611년에는 있는 것을 보면 그 사이인 16C 정도에 지어진 것 같다. 그리고 1752년 박래도 등이 지날 때에는 들보가 무너지고 서까래도 부서졌다. 는 대목에서 쇠락해져 가고 있는 제석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도 나오는 것과 같이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색장色掌의 전갈이 있어 몹시 근심 스럽고, 괴롭다는 제석당 주인인 노파의 하소연에 비추어 보면 정부에서는 이 푸닥거리를 하는 이 민간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던 것 같다.
아마 혹세무민한다는 유생들의 질타가 있고, 또 신성한 지리산에 불법 건축물을 임의로 건축하였으니 건축법 위반도 되었을 것 같다.향적사,香積寺소고제석봉 안내판 있는 이곳, 맞으편 뒤 남쪽으로 희미한 길이 남아 있다. 이 길이 향적사 가는 길이다. 진양지,晉陽誌-1632년 성여신에 의해 편찬된 진주목 읍지-에 따르면 이 향적사는 성모묘 향화香火를위해 건립되었다고 적고 있다.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16일, 경진일.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몇 리쯤 가니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석혈(石穴)을 뚫고 나와 힘껏 걸어 향적사에 이르렀다. 향적사에는 승려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이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자물쇠와 향반(香槃)의 기름이 이전처럼 남아 있었으므로,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자욱한 구름이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어,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너른 바위로 나아가 바라보니, 육천(䔖川)이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해도(海島)는 완전히 혹은 반쯤만 드러나고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과 같았고, 꼭대기를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옆에 있는 흰 깃발은 남쪽으로 펄럭였는데,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내키는 대로 구경하면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않았다. 다시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니,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원문]
庚辰. 風雨猶怒. 先遣從者於香積寺. 具食. 令披徑路來迎. 過午. 雨少止. 石矼滑甚. 使人扶携推轉而下. 數里許有鐵鎖路. 甚危. 便穿石穴而出. 極力步投香積. 無僧已二載. 澗水猶依剖木. 潺湲而落于槽. 窓牖關鎖及香槃佛油. 宛然俱在. 命淨掃焚香. 入處之. 薄暮. 雲靄自天王峯倒吹. 其疾不容一瞥. 遙空或有返照. 余擧手喜甚. 出門前盤石. 望䔖川蜿蜒. 而諸山及海島. 或全露. 或半露. 或頂露. 如人在帳中而見其䯻也. 仰視絶頂. 重巒疊嶂. 不知昨日路何自也. 祠旁白旆. 南指而颺. 蓋繪畫僧報我知其處也. 縱觀南北兩巖. 又待月出. 于時. 東方未盡澄澈. 復寒凜不可支. 令燒榾柮. 以熏屋戶. 然後就寢. 夜半. 星月皎然.
香積庵無僧已二載
携手扣雲關(휴수구운관) : 손을 잡고 운무로 뒤덮인 문을 두드리니
塵蹤汚蕙蘭(진종오혜란) : 속인의 발자국이 혜란초를 더럽히네.
澗泉猶在筧(간천유재견) : 아직 실개천 샘터에는 홈통이 남아있고
香燼尙堆盤(향신상퇴반) : 타다 남은 향불도 (아직) 쟁반에 쌓여있어라.
倚杖秋光冷(의장추광랭) : 지팡이를 기대니 가을빛은 차가운데
捫巖海宇寬(문암해우관) : 바위를 붙잡고 (금강대에)오르니 온 세상이 넓구나.
殷勤報猿鶴(은근보원학) : 은근히 원숭이(산사람)와 학(은둔 선비)에게 알리노니
容我再登攀(용아재등반) : 내가 다시 오르는 것을 용납해다오.
已 : 이미. 載 : 年(해년), 秋(해추). 塵蹤 : 속인의 발자취. 澗 : 산골물간, 猶(아직유) = 尙(상). 燼 : 깜부기불신 타다가 남은 것, 탄 나머지 捫: 어루만질문, 붙잡을문, 海宇 : 해내의 땅, 국내. 寬 : 넓을관 '猿鶴원숭이와 학' : 猿鶴沙蟲(원학사충)의 준말로 은거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 주목왕周穆王의 군대가 몰살되어 군자는 죽어서 원숭이나 학이되고 소인은 죽어 모래나 벌레가 된다는 고사[한한대사전(단국대동양학연구소)10권257頁]
宿香積夜半開霽
飄然笙鶴瞥雲聲 : 선학이 표연히(가볍게) 나니 별안간 구름 소리가 나고
千仞岡頭秋月明 : 천길 산꼭대기(천왕봉)엔 가을 달(보름달)이 밝구나.
應有道人轟鐵笛 : 응당 어떤 도인이 날라리(轟鐵철적)를 시끄럽게 불어대니
更邀回老訪蓬瀛 : 다시 회도인을 만나 (신선이 사는) 봉래와 영주를 찾으리라.
笙鶴 : 선학(仙鶴)과 같은 뜻으로 생황을 즐겨불던 王子喬(왕자교)가 흰 학을 타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함. 飄然 :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모양, 훌쩍 떠나는 모양,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양. 세상일에 구애되지 않은 모양. 瞥 : 瞥眼間(별안간) 岡頭 뫼 꼭대기. 鐵笛 : 쇠로 만든 피리. 날라리. 應 : 응당 ~하겠다. 有 : 어느, 어떤(불특정대명사) 轟 : 시끄러울굉. 更 : 다시갱. 邀 : 만날요. 回老 : 회도인 당나라 여동빈의 별칭. 여동빈은 당나라 8仙중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 蓬瀛 : 봉래와 영주로 신선이 사는 곳. -퍼온글-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29일 을축일. 보암을 떠나 동상원사(東上元寺)를 멀리 바라보고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거쳐 나무 아래의 시냇가를 지나니 어지럽게 돌이 널려 있어 길이 없었다.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서 산길을 표시한 곳도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으며 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산에서 비를 만나 석굴 아래에서 유숙하려 했는데, 얼마 뒤 비가 개어서 다시 길을 떠나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는 한 승려가 있었는데, 일경(一囧)이라 하였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지만 글자를 배우지 않아 겨우 불법의 대의(大義)만 깨친 정도였다. 그가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 을 보여주었는데 매우 청정(淸靜)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이 날 40리를 걸었다.
[원문]
乙丑. 發普庵. 望見東上院. 過文殊,麻田. 行樹底川邊. 亂石無路. 往往聚石爲塔. 以表山路. 余尋石塔行. 忽失法界庵路. 又逢山雨. 將宿石窟下. 雨霽復行. 得抵香積庵. 庵有一僧. 名曰一囧. 頗聰明. 解禪指. 曾於無字. 纔破大義. 一示余六祖檀經. 頗淸靜可愛. 是日行四十里. -퍼온글-
1489년 김일손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한 나절 동안 운기(雲氣)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것이 허공에 있는 물건인 줄 몰랐는데 여기 올라와보니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구름이 평평히 깔린 곳은 대낮인데도 반드시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다. 해질녘에 남기(嵐氣) 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석문(石門)을 통해 내려가 향적사에서 묵었다. 이 절의 승려가 치하하기를, “이 늙은이가 이 절에 머문 지 오래되었는데, 올해에 상봉을 보고자 하는 승려와 속인들이 많았으나, 비바람과 구름에 가려 두류산 전체를 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날씨가 흐려 비가 올 듯 하였는데(학식있는 선비가) 상봉에 오르자 날씨가 맑게 개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문]
半日. 但仰見雲氣之麗于天. 不知其爲半空物也. 到此則眼底平鋪而已. 平鋪處. 必晝陰也. 日晡時. 嵐氣四合. 遂下由石門. 投香積寺. 寺僧相賀云. 老物住此久. 今年多少僧俗. 欲觀上峯者. 輒爲風雨雲陰所蔽. 無一得見頭流之全體. 昨晩陰雨有徵. 措大一登. 便光霽. 是亦異也. 余頷之..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아서 갔다. 비탈진 바위에는 모두 석심(石蕈)이 나 있었다. 산은 모두 첩첩의 돌뿐이었고 낙엽이 돌 틈에 끼여 썩었으며 초목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짧았는데 모두 동남쪽으로 쏠려 있고, 구부러지고 덥수룩하여 가지와 잎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는데 상봉 쪽이 더욱 심하였다. 두견화(杜鵑花) 한두 송이가 막 피기 시작하여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바로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산 위에는 꽃과 잎이 5월이 되어서 성대해지고,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백욱에게 묻기를, “봉우리가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먼저 양기를 얻을 듯한데 도리어 뒤늦게 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땅과 하늘의 거리는 8만 리이고 우리가 며칠 동안 걸어서 상봉에 이르렀지만 상봉의 높이는 지상에서 백 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양기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고 홀로 우뚝 솟아 먼저 바람만 맞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생물은 높은 곳을 꺼릴 듯 하지만 높은 곳에 있으면 비바람을 면치 못하고 낮은 곳에 있어도 도끼에 찍히는 액운을 만나게 되니,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하였다.
[원문]
寺前有巖斗絶. 名金剛臺. 登眺則眼前奇峯無數. 白雲常繞之. 自法界至上峯至香積. 皆轉繞層崖而行. 崖面皆石蕈. 山皆疊石. 落葉眯於石眼. 而草木之根. 因着而生. 枝條短折. 皆東南靡拳曲蒙茸. 不能舒展枝葉. 上峯尤甚. 杜鵑花始開一花兩花. 而未拆之蕊滿枝. 正是二月初也. 僧云. 山上花葉. 五月始盛. 六月始彫. 余問伯勖. 峯高近天. 宜先得陽氣而反後. 何也. 伯勖曰. 大地距天八萬里. 而吾行數日而到上峯. 峯之高距地不滿百里. 則其距天不知其幾也. 不可言先陽. 特孤高先受風耳. 余曰. 凡物之生. 其忌高哉. 然高不免風雨之萃. 卑且遭斧斤之厄. 將何擇而可乎.
향적사 곁에 큰 목재 수백 개가 쌓여 있어서 승려에게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호남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구걸하여 섬진강까지 배로 실어온 뒤 하나하나 옮겨다놓은 것입니다.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지 6년이나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들의 학궁(學宮)에 대한 정성은 아직 미치지 못하는구나.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에서 기인하였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문선왕(文宣王) 을 능가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사교(邪敎)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들이 정도(正道)를 독실히 믿는 것과 다르구나.”라고 하였다. 이 절에서는 바다를 볼 수 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다는 넓고 육지는 적은데, 우리 청구(靑邱)는 산이 평지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날로 번성하여 수용할 곳이 없으니, 그대는 자비심이 많으니 어찌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두류산이 뻗어 내린 뿌리를 거슬러 올라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평평하게 깎아내려 남해를 메워서 만 리의 평원을 만들어 백성들이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복전(福田)을 삼으면 정위(精衛)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도록 구름이 덮인 산 속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 을 수련하여 그네들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저 장생(長生)의 도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짜기가 되고 남해가 뽕나무 밭이 되기를 기다리시오. 그런 뒤에 함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소?” 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인연이 맺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원문]
香積傍. 有大木數百章積焉. 問僧何爲. 僧曰. 老子行乞於湖南諸州. 漕致蟾津. 寸寸而輸. 欲新此寺. 已六年矣. 余曰. 吾儒之於學宮. 其未矣. 釋氏之敎. 覃自西域. 愚夫愚婦. 奉之軼於文宣王. 民之耽邪. 不如信正之篤矣. 寺可以望海. 余謂僧曰. 天壤之間. 水多而土小. 吾靑邱. 山多於地. 而國家生齒日繁. 無所容. 汝善慈悲. 盍爲衆生. 根尋頭流之所從來. 自長白山. 平鋤以塡南海. 作原隰萬里. 以奠民居爲福田. 不猶愈於精衛乎. 僧曰. 不敢當. 余又曰. 高岸爲谷. 滄海爲桑田. 雲山石室. 修鍊金丹. 舍爾涅槃之道. 學彼長生之術. 待頭流爲谷. 南海爲桑田. 然後共保耆壽. 何如. 僧曰. 願結因緣. 遂拍手大噱. -퍼온글-
1545년 황준량 선생의 香積寺
香積寺 - 황준량
古寺空山靜 : 적막한 산 속 옛 절은 고요한데
無僧雲半扃 : 승려는 없고 구름이 반쯤 가렸네
斜光䟽雨照 : 성근 비에 석양빛이 언뜻 비추고
秋氣晩凉生 : 해질녘에 가을 기온 싸늘해졌네
荒殿留殘裓 : 황폐한 절간에 쇠잔한 중만 남아
寒泉到破甁 : 찬 샘물을 깨진 단지에 길어오네
幽尋如慰我 : 외진 곳을 찾는 나를 위로하는듯
孤塔語風鈴 : 외로운 탑 풍경소리로 말을 거네
裓 : 옷자락극(중들이 쓰는 천 조각) -퍼온글-
1610년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원문]
○五日丙午晴。早起趣食將發。堂主老媼告曰有本官留鄕所。推捉文字馬川里色掌所傳也。誠可悶迫云。余等共致書于鄕所。使緩其令。堂後有泉。出自巖穴。築石而貯之。極淸洌。迤南而行一理許。出南岡之上。其下有西天堂香積寺。極可觀也。堂則新設。而寺則舊制也。汝昇諸君卽下。遊于西天香積。余與德顒辭以曾所遊歷。直至中峰。同其高峻。無有差別 -퍼온글-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과 기행시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곳은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고 하였다. 매년 8,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놓고 매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체로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원근의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로,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대부분 이익을 꾀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아!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이 한입도 안 되지만 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해가 기울어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갔다. 향적암은 천왕봉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쪽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바위들이 우뚝우뚝하였다. 향적암은 작은 암자이지만 단청칠을 해놓았다. 북쪽으로는 천왕봉을 우러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산세가 거하고 빼어나서 주변의 산과는 다른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원문]
祠下有小幕. 編柏葉而障風雨. 僧曰此鷹幕也. 每年於八九月. 捕鷹者設罾罻於峯頂伺焉. 蓋鷹之善飛者. 能度天王峯. 故得之此峯者. 其才絶群. 遠邇官鷹. 多出諸此峯. 冒風雪耐凍餓. 了死生於此者. 豈徒官威是惕. 抑多射利而輕生者. 吁. 孰知盤中之珍不滿一嚼. 而生民之萬苦千艱. 有如是哉. 日晡. 下香積菴. 菴在峯下數里所. 煮瑤草酌香醪. 臨眺于南臺. 亂石岞崿. 擁小菴而丹碧之. 北仰天王蜂. 東南望大海. 山勢豪首. 頗與外山異態
香積菴 - 유몽인
魁傑王峰土 : 우뚝하게 드높은 두류산 상봉 꼭대기에
靈祠蠔甲黏 : 신령스런 사당이 굴 껍질처럼 붙어있네
毛人欹羽蓋 : 털 난 신선이 깃털 일산을 씌워놓은 듯
瑤草擷筠籃 : 요초를 캐서 대바구니에 담아 놓은 듯
柏老心俱空 : 오래된 잣나무는 속이 모두 텅텅 비었고
巖奇髮盡참 : 기이한 바위는 대머리처럼 반잘반질하네
有時龍出洞 : 언젠가 용이 그 골짜기를 벗어 나오면
雲雨滿江南 : 운우의은택이 강남에 가득 미치게 되리
毝 = 參+毛, 欹 기울기(한 쪽으로 높게 세움) -퍼온글-
河鳳運(1790∼1830년) 선생의 香積臺
香積臺 - 河鳳運
聯枕香臺亦一奇 : 향적대에서 함께자는 것도 기이한 일인데
邃如房舍甚便宜 : 내 집처럼 깊숙하여 매우 편하고 따뜻했네
三杯濁酒生豪氣 : 탁주 세 잔에 호걸스러운 기상이 생기나니
須趁山頭日出時 : 산꼭대기에 나아가 해 뜨기를 기다리리라
☞ 산에 향적대가 있어 나무를 엮어 사방을 막았으며 온돌방이 있어 매우 따듯하여 이날밤 기숙하였다.(山有香積臺. 結架四遮. 有突甚溫. 是夜寄宿.)
☞ 河鳳運(1790∼1830년)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예암(預庵) 하우현(河友賢)이며 어머니는 분성이씨(盆城李氏) 이익의 딸이다. 부인은 은율임씨 임박(林璞)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에 출생하여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종조부인 함청헌(涵淸軒) 하이태(河以泰)에게 공부를 배웠다. 15세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자 상례를 정성으로 치러 마을의 칭찬이 자자했다. 이후 혼자서 집안을 이끌어가며 바른 행실로 지역의 선비들로부터 명망을 얻었으며, 진주 연계재(蓮桂齋) 중창, 진주향안(晋州鄕案) 교감, 겸재 하홍도(河弘度) 문집 간행, 각재 하항(河沆) 비석 건립, 낙수암(落水庵) 중수 등의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 원장의 직책도 맡았다. 1830년(순조 30) 안동을 방문하여 학봉 김성일과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의 학덕을 기리기도 했다. 1843년(헌종 9) 별세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퍼온글-
향적사 기도터
형적사 조망터
향적사 조망터에서 조망되는 문창대
금강대에서 바라본 향적사
금강대 -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아서 갔다. -김일손 두류산기행록에서-
향적사 조망터에서 조망되는 금강대
천왕봉도 조망된다.
서천당(西天堂) -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
1610년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원문]
○五日丙午晴。早起趣食將發。堂主老媼告曰有本官留鄕所。推捉文字馬川里色掌所傳也。誠可悶迫云。余等共致書于鄕所。使緩其令。堂後有泉。出自巖穴。築石而貯之。極淸洌。迤南而行一理許。出南岡之上。其下有西天堂香積寺。極可觀也。堂則新設。而寺則舊制也。汝昇諸君卽下。遊于西天香積。余與德顒辭以曾所遊歷。直至中峰。同其高峻。無有差別。 -퍼온글-
장터목대피소예전에는 매년 봄, 가을에 마천 사람들과 시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장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터목이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백무동, 좌측으로는 지난 구간 산행을 시작했던 중산리로 내려갈 수 있다.
연하봉 주변의 기암, 괴석...
연하봉-지리산 삼신봉과 장터목산장 사이에 위치한 연하봉 주변은 온통 야생화, 기암괴석, 고사목 등이 어우러진 곳이다. 물론 겨울철에는 그렇지 않지만 촛대봉을 거쳐 삼신봉에서 장터목 쪽으로 조금 가면 이름 없는 바위가 있는데 조망권이 넓어 흔히 전망대바위라 일컫기도 한다. 잠시 여장을 풀고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연하봉까지의 등산로에는 온갖 야생화가 뒤덮고 있다. 특히 봄철에는 철쭉이 만발한다. 전망대바위에서 보는 일몰 역시 장관이다.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로 지는 해를 보기 위하여 일부러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연하봉에서 삼신봉 방향으로는 일출봉이 기다리고 있다. 일출봉 능선에서 보는 해 뜨는 광경은 천왕봉 못지않다. 정작 연하봉은 여러 봉우리로 이어지는데, 봉우리마다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주변에는 고사목이 즐비하다.
연하선경(烟霞仙境)은 지리10경 중의 하나이지만 어느 것 하나 서열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절경(絶景)이다. 연하봉을 지나는 구름이 그러하고 새싹과 꽃이 그러하고 살아있는 나무는 물론 죽어있는 나무도 그러하고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그러하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초월한 신선의 경지에 비유하여 연하선경(煙霞仙境)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연하봉에서 서쪽의 세석평전 방향으로는 삼신봉과 촛대봉으로 이어진다. 촛대봉에서 남쪽으로는 도장골로 이어지는데. 도장골에는 와룡폭포, 윗용소, 아랫용소, 밀금폭포가 소재하며 세석평전에서 내려오는 거림골과 합쳐진다.연하봉올 지납니다...
지리8경 - 연하선경 세석평전과 장터목 사이의 연하봉은 기암과석과 층암절벽 사이로 고사목과 어우러진 운무가 홀연히 흘러가곤 하여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천왕봉을 향해 힘차게 뻗은 지리산의 크고 작은 산줄기 사이사이에는 온갖 이름 모를 기화요초가 철따라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이끼 낀 기암괴석 사이에 피어 있는 갖가지 꽃과 이름모를 풀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지리산과 어우러져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고산준령 연하봉의 선경은 산중인을 무아의 경지로 몰고 간다.
연하선경도 지납니다.
촛대봉에 도착 합니다.
촛대봉 - 이 촛대봉을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하였음은 이미 얘기했습니다.
수리봉 소고(小考)“형.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ㅅ'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와 같이 이 산은 떡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봉 혹은 시루봉이 아니라, 이 '수리'가 '시루'로 변한 것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효온이 이곳을 계족봉이라고 부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족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입니다. 그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도솔산인님의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같은 뚯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촉대봉(燭臺峰/1,703m)
촛대봉은 한 여인이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린 모습이라고 전한다. 경상남도 산청군의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주능선의 한 봉우리이다. 천왕봉에서 서쪽 노고단 방향으로 제석봉·연하봉을 거쳐 촛대봉에 이르며 다시 칠선봉과 덕평봉으로 향해 이어진다. 촛대봉의 남사면 계류는 거림계곡으로 모아지고, 북사면의 계류는 한신계곡으로 모인다. 봉우리의 모양이 촛대와 같이 뾰족하게 솟아있어 이름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촛대봉의 옛 이름은 촉봉(燭峰) 혹은 촉대봉(燭臺峰)이었다. 촉봉 혹은 촉대봉이 오늘날의 한글 명칭으로 촛대봉이 되었다. 1879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촉봉(燭峰)이 우뚝 솟아 있었다 1."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기(鄭琦,1879~1950)의 『유방장산기 (遊方丈山記 )』에는 촉대봉(燭臺峰)으로 나오는데, "운무를 헤치고 천왕봉을 향하는데 겨우 촉대봉(燭臺峰)에 이르렀다. 북풍에 비바람이 불고 운무가 날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 저여원沮洳原이라 불렸었죠?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洳原)에 다다랐다.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서 있었는데 줄기는 문설주처럼 서 있고 가지는 문지방처럼 휘어져 있어 그곳을 통해 나오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아도 되었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새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촛대봉에서 조망 되는 천왕봉
촛대봉 산신을 모시던 제사터 - 산영님 설명 하고 있다.
제사터의 흔적들...
아마 천왕봉(상봉)을 바라보며 제사를 자냈을 것이다 - 멋진 조망이다.
청학연못 - 가는 중 국공 상봉 - 늦은 시간까지 - ㅎㅎㅎ앞으로 청학연못 명칭은 적석동지磧石洞池 혹은 세석지細石池, 세석연못으로...
적석동지磧石洞池 혹은 세석지細石池, 세석연못 가지 못하고 세석평전으로 갑니다.
세석대피소(세석평전)6경 - 세석철쭉(細石)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해발 1,600m의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꽃망울을 터뜨리며 한바탕 흐드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피빛처럼 선연하거나, 처녀의 속살처럼 투명한 분홍빛의 철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세석평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시인 김석은 세석 계곡 훈풍이 꽃 사이로 지날 때마다 꽃들의 환상적이고 화사한 흔들림, 그것은 남녘나라 눈매 고운 처녀들의 완숙한 꿈의 잔치라고 이곳의 철쭉을 노래하기도 했다. 지리산 철쭉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처절하도록 서럽게,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진달래와 더불어 봄의 지리산을 단장하는 명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거림으로 하산 하며 이제 20년 지리의 마지막 가을 단풍 아닐까 한다...아름답고...멋지다.
멋진 풍광이다 - 거림 마을
도장골 방향의 멋진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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