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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길(백무동,한신계곡,촛대봉,세석,창불대,영신봉,영신사터,좌고대,한신능선지리 산행기 2020. 11. 9. 13:30
# 언제: 2020년 11월 07일 토요일
# 산행지: 점필재 길(백무동,한신계곡,세석,창불대,영신봉,영신사,좌고대,한신능선) 지리 품속으로
# 산행거리: 17.34Km 09시간 27분
# 산행코스: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대피소 - 창불대 - 영신봉 - 영신사 - 좌고대 - 한신능선(바른재능선)
백무동
인생은 한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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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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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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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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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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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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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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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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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 산행지도
# 산행사진
백무동은 무속인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반야봉이 문수보살이 자리한 불교의 성지라고 한다면 천왕봉은 그보다 먼저 자리잡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의 보고라 할까요, 지리의 산신령은 용유당부터 시작하였을 겁니다. 거기서 기돗발이 안 받을 경우 그들은 이 하당下堂인 이 백무동까지 올라옵니다. 조금 더 영험함을 받으려면 다시 중당中堂인 제석봉 까지 올라가고...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 (조구명 1724)
거기서도 여의치 않을 경우 상당上堂인 천왕봉까지 올랐다고 하죠, 그러니 이 백무동은 그들의 베이스 켐프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유교에 쩌들은 선비들에게는 음사淫祠였고 질시疾視의 대상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낯설기만 한 곳이 청계도인 양대박(1541~1592)에게는 삼가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백무동 지명의유래
천황할머니는 지리산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어느 날, 지리산에 법우스님이 들어와 동굴에서 좌선 수도에 들어갔다. 열심히 수도에 정진하던 스님이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뺏긴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다 길을 잃고 말았다. 천황할머니가 아가씨의 모습으로 나타나 길을 안내해줬다. 그날부터 법우스님은 아가씨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천황할머니에게 결혼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결국 둘은 결혼했고, 여덟 딸을 두었다. 그들은 전국으로 보내져 유명한 무당이 되었다. 이후 이 마을을 무당 100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서 ‘백무((白武)마을’이라 불렸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馬川面) 강청리(江淸里)는 창암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산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섬말, 백무 등이 있다. ‘섬말’은 마을 양쪽으로 냇물이 흘러 마치 마을이 섬처럼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무(白武)’는 고지대에 위치한 산마을이다. 본디 ‘백무(白巫)’ 즉, 백 사람의 무당이라는 뜻이었으나 나중 사람들이 ‘백무(白武)’로 고쳤다고 한다. ‘백무(白巫)’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황할머니는 지리산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마음이 너그럽고 넉넉하여 모든 사람들이 잘 살기를 기원해 주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천황할머니에게 빌었는데 그들의 어려움을 딱하게 여긴 천황할머니는 사람들의 바람을 들어주기를 자주했다. 까닭에 사람들은 천황할머니를 더욱 공경하고 모시기를 극진히 했다. 어느 날 ‘법우’라는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지리산에 들어왔다. 그는 깊은 동굴 하나를 찾아들어가 밤낮없이 좌선(坐禪) 수도(修道)에 정진하였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계절이 바뀌어도 법우스님은 도 닦기를 멈추지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법우스님이 좌선을 마무리하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나뭇잎은 푸르렀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한 법우스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이 어디인지 구분할 길이 없는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와 있었다. 들리는 것은 물소리에 새소리며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을 빽빽이 가로막은 나무들뿐이었다. 이 노릇을 어찌할까 고민하던 스님은 천황할머니에게 빌어보기로 했다. ‘천황할머니, 이 어리석은 중생이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부디 저에게 길을 안내해주소서.’간절한 기도가 들렸던 까닭일까?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앞에 웬 아름다운 아가씨가 서있었다.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천황할머니였던 것이다. 얼떨떨하게 서있는 법우 스님을 안내해 할머니는 수도를 하던 동굴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 이후 법우 스님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름다운 천황할머니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좌선은커녕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결국 법우 스님은 천황할머니에게 소원을 빌기로 했다. ‘천황할머니,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그는 온마음을 다해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천황할머니는 법우 스님의 기도를 들었지만 스님인 그와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법우 스님의 기도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날로 수척해지는 법우 스님을 바라보며 천황할머니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고, 급기야는 법우 스님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둘은 혼인하여 여덟 명의 딸을 낳았다. 딸들은 모두 이름 높은 무당이 되어 전국 팔도로 흩어졌다. 그 중 셋째딸은 하동 지방에 정착하여 그 지방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결국 천황할머니와 법우스님으로부터 백 여명의 무당이 나왔다고 해서 그들이 살던 마을을 ‘백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는 셋째딸이 백 명 무당의 시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실제 하동은 함양군 마천면과 접해 있는 까닭에, 이야기가 두 지역에 걸쳐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얼마남지 않은 가을 - 아니다 오늘은 '입동,立冬' - '겨울(冬)이 들어서다(立)'는 이젠 겨울이다. 세석으로 가는 백무동 길 오색 단풍로 물들어 아름답다...
백무동 탐방 지원센터 - 백무교
장터목 세석 갈림길 이다, 세석까지 6.5Km 자 걸어보자.
울긋,불긋, 단풍 아름답다.
첫 나들이 폭포 - 함양군수였던 점필재 선생이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이 첫나들이 폭포 부근에서 하산하여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장소 하인들을 만납니다. 오늘 진행하는 산행 길 중 몇 곳이 선인들의 체취를 느끼는 산행 길.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 현 실덕부락)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산록 중에서-
저멀리 오공능선 보인다.
바람폭포
한신 지계곡 방향
가내소 폭포
우량측정시설 - 이 시설물 뒷편 지류를 곧은재골이라 부르고 - 조금 더 위 지류가 안곧은재골, 조금 더 걷다보면 화랑교 초입다리 나온다, 아래 우량측정시설로부터 약 500미터 위 진행방향 좌측 화랑골 들머리 꽁초바위(화장봉)와 연하봉 중간지점으로 오른다는 자그만 지류로 언젠간 한번은 가봐야할 미답의 화랑골 백무교 - 화랑골 들머리 다리, 약 4km 이곳에서 300여미 위 우측 운장바위골 들머리
한신계곡 마지막 폭포
이자리 지켜온 나무 자연으로 돌아 가는구나.
능선으로 올라 섭니다 - 백운산1228m, 좌측 억불봉1007.5m, 조망 됩니다.
촛대봉으로 올라 오늘 가즈야 한곳 - 청학연못(적석동지磧石洞池 혹은 세석지細石池, 세석연못) 또 가지 못 했네요...국공
촛대봉에서 멋진 조망 눈 요기하고 세석으로 내려 옵니다.
세석에서 점심식사 후 - 오늘 산행 함께 할 부산 토요산속 산 친구님 기다림.
창불대 - 병풍바위
점필재 선생은 창불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창불대(唱佛臺) 4기도처
영신봉과 촛대봉, 시루봉 자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초록의 바다 세석평전, 병풍바위와 자살바위, 그리고 큰세개골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창불대를 내려서서 바로 옆의 우천 선생 4기도처가 있는 조망대에 도착한다. 이곳은 아늑하고 풍광 좋은 다른 기도처와 달리 벼랑 위에 있다. 좌우에 창불대와 자살바위가 있고 맞은편으로 병풍바위가 코앞이다. 발아래 큰세개골로 이어지는 협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처럼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다.
자살바위 - 자살바위에 얽힌 엉투당투 않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면, 빨치산 마지막 토벌작전으로 잔여 빨치산들이 창불대 아래 대성골과 건너 빗점골로 모이게 되고, 그곳에서 대다수가 몰살을 당하게 되는데, 패퇴한 일부 여자 빨치산들은 이곳 자살바위까지 밀려나, 피지 못한 푸른 꽃들이 천길 바위 아래 깊은 곳으로 죽음의 선택을 한 눈물의 결정을 한 곳'이라고 하는데...
영신봉,靈神峰 - 지리산 영신봉은 높이 1,651.9m로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출발점이다. 서쪽으로 칠선봉[1,576m]·삼각고지[1,470m], 동쪽으로 촛대봉[1,703.7m]·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과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며, 남쪽 비탈면에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대성계곡, 북쪽 비탈면에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계곡이 있다.
영신봉에서 조망 되는 촛대봉
비로봉
창불대를 돌아 본 점필재 선생은 영신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는데... 좌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퍼온글-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봉우리에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 하였다. 이 좌고대는 상∙중∙하 3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 우뚝 솟은 바위는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내려다보았는데,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승려 의문은 두려워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좌고대 밑에 앉아 있었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빈발암으로 되돌아와 저녁밥을 먹었다. 때마침 이 암자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해기 지자 온 세상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남효온 지리산일과-
비로봉 정상
점필재 선생이 영신사 터에 머물며 언급한 가섭대를 둘러본다.
선생은 영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頭陀第一 是爲抖擻 (두타제일 시위두수) 마하가섭존자(頭陀第一)께서는 두수를 행하시어
外已遠塵 內已離垢 (외이원진 내이리구) 밖으로는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마음의 때를 벗으셨네.
得道居先 入滅於後 (득도거선 입멸어후) 앞서서 도(불도/불성)를 깨우치시고 뒤에는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鷄山 千秋不朽 (설의계산 천추불후) 눈 덮인 鷄足의 雪山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전하리라,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당시 지리산 자락의 절과 암자에 기거하며...혹세무민( 惑世誣民 )하는 중과 무당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자들의 행태를 꾸짖는 대목이다.만약 가섭전 법당 안에 걸려있던 몽상화상(중국 원나라의 고승) 족자에 쓴 글(贊)이...정말 비해당(안평대군)의 글이라면 이 그림은 국보급이라 하겠다.그래서 김일손은 '속유두류록'에서 이 그림을 기보(奇寶)라고 하며 탐을 냈나보다. ㅋㅋ안평대군은 몽산화상에서 가섭의 모습을 보았나보다. (김일손은 이 그림을 '가섭의 화상'이라 하였음)
[참고 1] 가섭(迦葉) : 마하가섭(摩訶迦葉). 석가모니의 수제자로 두타행을 행하는데 으뜸이였으며 바로 '염화미소 이심전심'의 주인공이다.
[참고 2] 두타(頭陀) : 산스크리트 두타(dhuta)에서 나온 말로 번뇌를 털어내고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로 경전에서는 그 투타행을 12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즉 1)조용한 곳에 거주한다. 2)항상 걸식한다. 3)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4)하루에 한 번만 먹는다. 5)과식하지 않는다. 6)정오 이후에는 과즙이나 설탕물을 마시지 않는다. 7)헤지고 헐은 옷을 입는다. 8)삼의(三衣)만 소유한다. 9)무상관을 체득하기 위해 무덤 결에 머무른다. 10) 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버리기 위해 나무 밑에서 지낸다. 11) 아무것도 없은 한데 땅(露地)에 앉아 좌정에 든다. 12)항상 앉아 있으며 눕지 않는다.
[참고 3] 두수(抖擻)는 벗어나다, 빠져 나오다, 이탈하다, 번뇌의 때를 떨어버린다는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가리킨다.[참고 4] 雪衣鷄山은 눈 덮인 계족산으로 국역되나, 중국에서 한자로 계족산인 屈屈咤播陀山(kukkutapada-giri)은 인도 중부지방에 있는 산으로 실제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6년간 계족산에서 수행하신 것이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근거없이 와전, 곡해되어 설산 계족산이 된 것이다. 설산은 중국불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퍼온글-영신사터의 가섭대(석가섭)
영신사 터에서 조망 되는 비로봉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유몽인 유두류산록-
영계(靈溪) - 영신사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영험한 곳이라는 영신대는 기(氣)가 세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곳이라고도 한다. 영신대를 돌아보고 우천 선생의 영신대 기도터로 향한다. 이곳 기도터는 여타와 달리 꽁꽁 숨겨진 비밀 기도터다. 계곡을 조금 내려서서 좌측 석벽의 석문을 통과하면 숨어 있던 기도터가 나타난다. 마치 절진을 펼쳐놓아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영신대 5기도처
석문으로 기어올라 그곳을 통과하면 진법이 스스로 풀린다. 아무도 찾지 못할 천하절진이 펼쳐져 있었지만 사람도 가고 세월도 흘러 이제는 효력이 다했는지, 누구나 쉽게 파훼할 수 있는 평범한 진으로 변했다. 잡풀 우거지고 볼품없는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별세계의 안온한 느낌이 든다. 옆에는 샘터도 있다. 은둔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석문이 속세와 피안의 별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인 셈이다.
제10수 : 靈神庵 [영신암]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대성골)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모름지기 산도(세석촌장)을 불러 술이나 받아오게
靑鶴仙人何處棲 : 청학 탄 신선은 어느 곳에서 사는고?
獨騎靑鶴恣東西 : 홀로 청학을 타고 동서로 마음껏 다니겠지.
白雲滿洞松杉合 : 흰 구름 골에 가득하고 소나무 삼나무가 모여 있으니
多少遊人到自迷 : 약간의 유산객만 들어와도 저절로 길을 헤맨다네
千載一人韓錄事 : 천 년의 세월 속에 일인자인 한녹사는
丹崖碧嶺幾遨遊 : 붉은 절벽 푸른 고개서 얼마나 노닐었던고
滿朝卿相甘奴虜 : 조정 가득한 경상(정승판서)들은 노예와 포로 됨을 감수하는데
妻子相携共白頭 :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와 함께 백발이 되었네.
雙溪寺裏憶孤雲 : 쌍계사 안에 고운을 생각하니
時事紛紛不可聞 : 어지러웠던 당시의 일을 알 수가 없구나.
東海歸來還浪跡 : 해동(신라)으로 돌아와 도리어 유랑했던 발자취는
秖緣野鶴在鷄群 : 다만 야학이 군계 속에 있었던 연유로다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
한신능선(바른재능선)으로 하산하며, 토요산속 회원님 상봉 한다 - 좌고대에서 단체 사진
한신능선(바른재능선)으로 가기전 조망 - 영신사터, 비로봉, 좌고대
점필재 선생이 기행시 제11수 '하산음'에서
제11수 : 下山吟 [산에서 내려와 읊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제자)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우리가)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지리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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