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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신흥&의신(세이암,洗耳巖-의신사,義神寺-신응사&신흥사,神興寺-원통암,圓通庵)지리 산행기 2020. 10. 27. 18:05
# 언제: 2020년 10월 25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 신흥&의신(세이암,洗耳巖-의신사,義神寺-신응사&신흥사,神興寺-원통암,圓通庵) 역사산행
# 산행거리: 10.6Km 06시간 30분
# 산행코스: 화개초교(왕성분교) - 신응사&산흥사터 - 세이암 - 신흥교 - 의자바위 - 정류석 - 두류만목
서산대사길 - 화개동천 - 반달가슴곰생태학습장 - 의신마을 - 의신사터 - 원통암(Back) -
지리산역사관
# 신응사&신흥사,神興寺
지리산 자락인 화개면 일대에는 수많은 절이 있었다. 그중 부도가 남아있는 절터는 대성리에 있는 의신사지와 범왕리에 있는 신응사&신흥사지다.
신응사&신흥사지는 지리산 국립공원 칠불사 지구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쌍계사 앞을 지난 1023번 지방도가 칠불암과 의신 방면 두 갈래 길로 갈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작은 시골인 왕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신흥사지다. 부도는 초등학교 뒤편 대숲에 있다.하동 신응사&신흥사지 부도. 마을 정기를 누른다고 마을 사람들이 넘어뜨려 놓았다.
이 마을에는 부도와 관련해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오랜 옛날 한 도인이 이 신흥사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길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화가 난 도인은 절을 흥하게 하는 비법이라며 ‘망하게 될 이치’를 일러준다. 절 양 끝에 부도를 세우면 절이 흥한다는 것이다.신흥사 대중은 도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절터 양쪽에 부도를 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신흥사가 자리한 곳의 지세가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인데, 양 날개 되는 지점에 부도를 세워두니 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스님네들과 사찰을 폄훼하거나 비하하는 이런 종류의 전설은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억압받은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도인으로 상징되는 이는 유학자(또는 관리)이고, 그들이 스님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자 그 보복으로 절을 폐사시킨 것이 전설로 고착화된 것은 아닐까.
어찌됐든 ‘절을 망하게 한 부도’ 2기 중 한 기는 십수 년 전 홍수로 떠내려갔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 눈에 띄어 길가에 옮겨졌지만 누군가에 의해 도난 당했다. 초등학교 뒤 대숲에 있는 다른 한 기는 넘어져 있다. 세워두면 마을의 정기가 억눌린다며 마을 사람들이 눕혀 놓은 까닭이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돼 있는 것으로 보아 돌보는 손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때 쌍계사에서 이 부도를 옮겨 가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역사’라며 막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부도는 ‘참 예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단아하다. 마치 학과 같은 자태를 지녔다고나 할까. 몸에는 연잎과 같은 무늬를 이중으로 얇게 음각했다. 풀밭에 누워 부끄러운 듯 사리공을 훤히 드러낸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옆에는 부도를 떠받치고 있었을 지대석이 주인 잃은 방석마냥 덩그마니 놓여 있다.신응사&신흥사지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51-1, 지금의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이 있는 곳에 있었던 절집 터를 말합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방향으로 십리 벚꽃 길의 벚꽃터널을 빠져나와 칠불사와 지리산 대성골(의신마을) 가는 길로 나뉘는 삼거리 길에서 대성골로 가는 길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남서향의 볕 바른 산비탈입니다.
지리산 끝자락이 어느 곳 하나 명당 아닌 곳이 없겠지만 무심한 눈으로 보아도 명당임이 분명한 이곳의 지세는 ‘금계포란(金鷄抱卵)’ 의 지형이며 앞으로는 맑기가 명경같은 계곡물(세이장洗耳場)이 사철 섬진강으로 흘러갑니다.절집의 역사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학교와 주변의 사택 터가 예전의 절집들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학교 옆의 최근에 지어진 사택 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절 망하게 한 부도'란 오명을 쓴 사연 많은 예쁜 부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칠불사와 의신사로 나누어지는 3거리 신흥마을에서 칠불사 방향 바위에 삼신동三神洞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신은 의신골에 있었던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응사&신흥사神興寺를 칭하며, 화개동의 삼신사라 불렀다. 주변의 풍광이 뛰어나 예로 부터 고운 선생 이래로 시인 묵객, 선사들의 유람처로 자리 잡았고, 조선 후기 많은 유학자들의 지리산 산행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절집이었다.왕성초교가 자리하고 있는 신흥사지는 풍수지리의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형국으로, 서산대사는 ‘하늘이 숨겨둔 아름다운 곳, 신선의 땅’이라 극찬하였으며, 많은 선승들이 머물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창건과 폐사에 관한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사지에 등재된 내용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되어 19세기까지 향화를 피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신흥사지 암굴(岩窟)에서 통일신라시대 철조여래좌상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또한 사지에서 발견된 대석불大石佛을 1915년 창덕궁 비원으로 옮겨갔다고 하며, 1970년대 탑신에 2행의 세로로 ‘만력십년삼월일판 조계종사노한당입탑(萬曆十年三月日判 曹溪宗師盧閑堂立塔)’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노한당(盧閑堂) 부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석종형 부도 1기가 전해지고 있다.
문헌에 신응사&신흥사는 ‘神興寺’, ‘神凝寺’ 등으로 확인되며 사세에 따라 ‘新興庵’으로도 불렸다. 최초의 기록은 고려중기 문인 李仁老가 신흥사를 찾아갔다는 내용이 『破閑集』에 있으며, 15~16세기에는 金宗直, 李陸, 金馹孫, 曺植, 柳夢寅 등의 문인들이 신흥사를 방문하여 남긴 글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는 신흥사에 머물며 「頭流山 新興寺 凌波閣記」를 남겼다. 成汝信의 『晉陽誌』와 『浮査集』에는 신흥사가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어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李柱大의 『冥菴集』에는 사명이 ‘신흥암’으로 변화되어 있어 18세기에는 사세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宋秉璿의 『淵齋集』에 신흥사의 옛터를 확인하였다는 글로 보아 신흥사는 19세기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이곳에서 반출된 철불과 석불, 팔각원당형 부도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신응사&신흥사 사세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는 서산대사의 능파각기를 보자
능파각은 현재 왕정초교 앞 계류에 조성된 전각으로 추측되며, 곡성 태안사 능파각이 오버랩 된다.
또한 기문으로 미루어 신흥사의 진입동선은 오늘날 과 달리 계류 건너편에서 능파각을 통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서산대사 두류산 신응사&신흥사 능파각기(1564년)
산에 사는 스님이 이곳에 이르면 선정에 살고 소객이 이르면 시에 고민하고 도사가 이르면 뼈를 바꾸지 않고 바로 가벼운 바람을 탄다.
그리하여 마음을 먼 하늘에 붙이고 몸을 뜬 구름에 맡긴 채 지팡이를 집고 나와서 그 사이에서 한가로이 읊조리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며 혹은 기대어 눕기도 하면서 늙어가는 줄 모른다.
또한 능파각은 매우 높아서 백척 위에 올라 별을 따는 정취가 있고 눈이 천리에 트여 하늘에 오르는 정취가 있다.
외로운 따오기와 떨어지는 노을은 가지런히 나는 것 같고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에 떨어져 있는 정취가 있고 맑은 시내와 꽃다운 물은 학이 노니는 것 같고
물에 떨어진 꽃이 흘러가는 모습은 무릉도원의 정취가 있고 가을엔 비단에 수 놓은 듯한 단풍의 아름다움이 있고 좋은 손님을 맞고 보내는 기쁨은 그지 없다.
서산대사에 앞서 탁영의 글도 보인다
1489년 4월14일~4월 28일(성종 20년)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 1464~1498)이 정여창(鄭汝昌), 임정숙(林貞叔)과 두류산을 여행하고 기록한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기록된 신흥사 풍광이다. 글 중에는 범패 시연을 묘사하는 내용도 있어 흥미롭다.
4월25일
二十五日癸丑.
及到神興寺.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렀다.
寺前澄潭盤石. 可以永夕.
절 앞에 맑은 못과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저녁 내내 놀 만하였다.
寺臨澗而構. 最勝於諸刹. 遊人足以忘歸矣.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서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빼어나 유람 온 사람이 돌아가기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昏投寺中. 云. 此作法道場.
어두워질 무렵 절 안으로 들어가니, 이 절은 불법을 닦는 도량이라 하였다.
鍾鼓喧聒. 人物鬧擾. 茫然若有所失.
종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고 사람들이 떠들썩하여 멍하니 정신을 잃을 듯 하였다.
是日約行四十餘里. 山路險阨.
이 날 약 40여 리를 걸었는데 산길이 험준하였다.
寺僧皆以爲健步健步云.
절의 승려들이 모두 말하기를, “잘 걸으십니다. 잘 걸으십니다.”라고 하였다.
余平日. 見郵童走卒. 行及奔馬. 自以爲事之甚難.
나는 평소 역졸이나 심부름꾼이 달리는 말을 뒤좇아가는 것을 보고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比山行初若重步. 爲日多而兩脚漸覺軒擧.
이번 산행을 하면서 처음에는 발걸음이 무거운 듯 했는데 날이 갈수록 두 다리는 점점 가벼워짐을 느꼈다.
始知凡事在乎習成耳.
그제서야 모든 일이 습성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二十六日甲寅.26일, 갑인일.
余每拄雙筇而行.始舍筇騎馬.
나는 항상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이 날에서야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有雲中興,了長老二僧. 相送出洞.
운중흥雲中興․요장로了長老 두 승려가 동구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신응사&신흥사에 대한 옛사람들의 글 몇 편을 보자. 고려조의 이인로는 청학동을 들릴 예정이었으나 찾지 못하고 신흥사에 묵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1170년대에는 신흥사가 운영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1170년대 이인로 파한집
(元)나라 영내의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봉오리와 꽃받침처럼 잘 어우러진 봉우리와 골짜기가 면면(綿綿)이 이어지어 내려오다,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 수천 리(里)에 서리어 맺히었다. 이 산 주위에 10여 고을이 있는데, 한 달 이상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이 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다. 구부리고 엎드려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동네가 나타나는데, 사방이 모두 좋은 농토(農土)다. 토질이 비옥하여 곡식을 심기에 알맞다.
푸른 두루미[靑鶴]만이 그 안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이름하였다.대체로 옛날 세상을 피한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무너진 담장과 집터가 아직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예전에 나의 집안의 당형 최상국(崔相國)2)과 영원히 함께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이 곳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살림살이를 담은 대고리짝을 두세 마리 소에 싣고 들어가면 속세와 멀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드디어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곳이 없었으며,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가 다투듯 빼어나고 다투어 흘러내렸다. 대울타리 안의 초가집이 복사꽃, 살구꽃에 보일 듯 말 듯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위에 남기고 돌아왔다 .
頭流山逈暮雲低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萬壑千巖似會稽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같네.
杖策欲尋靑鶴洞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隔林空聽白猿啼 숲 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뿐.
樓臺縹緲三山遠 누대(樓臺)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苔蘚依俙四字題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試問仙源何處是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메인가?
落花流水使人迷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 유람기(1558년 4월10일~4월 25일)에도 신흥사가 등장한다. 즉 이시기에도 신흥사는 향화를 피우고 있었다.
신응사에서 글을 읽다讀書神凝寺...남명 조식
요초춘산녹만위(瑤草春山綠滿圍) 아름다운 풀 봄 산에 가득한데
위련계옥좌래지(爲憐溪玉坐來遲) 시냇물 좋아 늦게까지 앉았다
생세불능무세루(生世不能無世累) 세상 사는 데 번거로운 일 없지 않아
수운환부수운귀(水雲還付水雲歸) 물과 구름을 물과 구름에 되돌려 보낸다신응사&신흥사지 부도
범왕리 왕성초교 뒤편 대밭에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 홀로히 신흥사터 지킴이로 남아 있다. 방형 지대석,탑신과 연봉형 보주가 일체형이다. 탑신 하대를 한 줄 돌대로 구획하고 탑신에는 작례를 보지 모산 기하학 문양을 커튼처럼 선각으로 표시하였다. 탑신에는 불비형 패를 조성하고 주인공의 당호를 새겼지만 육안으로 구분이 힘들다.범왕리 푸조나무
부도와 더불어 신흥사지의 터줏대감으로 왕성초교 정문앞에 있다. 수령 500년이상으로 추정되며 마을 당산으로 보인다.
이 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운 최치원은 나무가 살아 있으면 자기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자기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한다.
이런 이야기가 위의 탁영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선생은 "상고해 볼 가치도 없지만 기록해둔다"라고 하였다.
二十六日甲寅.
26일, 갑인일.
余每拄雙筇而行.始舍筇騎馬.
나는 항상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이 날에서야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有雲中興,了長老二僧. 相送出洞.
운중흥雲中興․요장로了長老 두 승려가 동구 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至一略彴. 了長老云. 近世有退隱師者住神興. 一日語其徒曰. 有客至. 當淨掃除以候.
한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요장로가 말하기를, “근세에 퇴은退隱 선사가 신흥사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거라.’라고 하였습니다.
俄而有一人騎白駒. 結藤蘿爲鞅轡. 疾行而來. 履獨木如平地. 衆皆駭之.
잠시 후 한 사람이 등나무 덩쿨을 엮어 걸이와 고삐를 한 흰 말을 타고 빠르게 건너오는데, 외나무다리 건너는 것을 평지와 같이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至寺迎入一室. 淸夜共話. 不可聽記.
절에 도착하자 스님이 방으로 맞아들여 밤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인지 듣고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明朝辭去. 有姜家蒼頭者. 學書於寺. 疑其異客. 執鞚以奉之.
다음날 아침 작별하고 떠나려하니,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강씨姜氏 성姓을 가진 젊은이가 그 특이한 손님을 기이하게 여겨 말의 재갈을 잡고 그를 따라가려 하였습니다.
其人以鞭揮去. 袖落一卷文字. 蒼頭急取之.
그 사람이 채찍을 휘두르며 떠나는 바람에 소매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는데 젊은이가 황급히 그 책을 주웠습니다.
其人曰. 誤被塵隷攬取.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 잘못으로 속세의 하찮은 사람이 취하여 보도록 하였구나.
珍重愼藏. 勿以示世.
보배처럼 소중히 여기고 삼가하여 감춰두고 세상에 보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言訖急行. 復由略彴而逝.
말을 마치자 급히 떠나 다시 외나무다리를 지나갔습니다.
姜蒼頭者. 今白頭猶居晉陽之境. 人有知者. 求觀不與.
젊은이는 지금 백발 노인이지만 진양의 경계에 살고 있으면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 책을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蓋其人. 崔孤雲不死在靑鶴洞云.
그 사람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인데, 죽지 않고 청학동靑鶴洞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其說雖無稽而亦可記也.
그 말은 비록 상고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기록해둘 만하다.의신사,義神寺
의신사지 법해당(?) 부도를 뵙기 위해 의신마을에 도착하였으나 피서인파로 뙤약볕에 주차공간 찾기가 부도 찾기보다 더 어렵다. 도로변에 불법 주차 후 동리 아주머니에게 탐문하였더니 개략적인 위치와 부도를 잘 아는 분의 집을 알려주었다. 부도는 길을 따라 올라 가다가 우측으로 난 희미한 길(위사진 상단 소나무 아래)로 들어서면 10여미터 전방에 위치한다.
부도로 향하는 의신마을 마지막 집(의신길 26-11)에서 부도 까지는 넉넉잡아 15분 미만의 거리이다. 사진 아래편 경작지 위쪽 우측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의신마을은 처음에 마을 터에 있었던 의신사 등과 같은 여러 암자들이 생기면서 사하촌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신사 혹은 의신암은 17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며, 1611~1680년 사이의 어느 때에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는 의신사 외에도 대승암, 고대승, 상대승, 동암 등의 절이 있었다.
의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혹은 「속두류록(續頭流錄)」]에 보인다. 남효온은 1487년(성종 18) 10월 1일에 의신암을 다녀갔는데, 그가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절 서쪽은 대나무 숲으로 가득하였고, 방앗간과 뒷간도 대숲 사이에 있었다. 법당에 금칠한 불상 한 구가 있었는데 승려가 의신조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편 김일손은 1489년(성종 20) 4월 25일에 의신사를 기행했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으며, 절의 벽면에는 김언신·김미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주지 법해(法海)와 30여 명의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15세기 의신사의 사실을 증명하듯이 현재에도 의신마을 뒤편의 의신사로 추정되는 옛터에는 석종 모양의 높이 175㎝의 법해당(法海堂) 부도가 있다.
양대박(梁大樸)[1543~1592]도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에서 1560년(명종 15)에 의신사를 돌아보았다고 했으며,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1611년(광해군 3) 4월 5일에 의신사를 다녀간 후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의신사 주지 옥정과 시를 읊었던 사실을 적고 있다. 한편 송광연이 1680년(숙종 6) 윤8월에 지리산을 기행하고 적은 「두류록(頭流錄)」에 의신사 옛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이미 의신사가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방형대좌위에 탑신과 보주가 하나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이다. 법해당法海堂 부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每堂.탑신에 새겨진 명문
맨위 글씨는 확인 되지 않고, 중앙의 글씨도 부수가 훼손되어 해海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즉 온건한 글씨는 당堂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디지털하동문화대전, 하동문화원의 하동의 문화유적 등에 비롯 각종 자료에 법해당法海堂 으로 공인(?)되었을까?
1489년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유록續頭流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계축에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능선 북쪽은 함양(咸陽) 땅이요, 능선 남쪽은 진주(晉州) 땅이다. 한 가닥 나무꾼의 길이 함양과 진주를 가운데로 나눠 놓은 셈이다.
방황하여 오래도록 조망하다가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토산(土山)이요, 길이 있어 찾아갈 만하다.
매를 잡는 자가 많아서 길이 이뤄져 상원사(上元寺)나 법계사(法界寺)의 길처럼 심하지는 않다.
산마루로부터 급히 내려가서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당도하면 절이 평지에 있고, 절벽에는 김언신(金彦辛) ㆍ 김미(金楣)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거주승(居住僧) 30여 명이 역시 정진(精進)하고 있으며, 대밭과 감나무 밭이 있으며, 채소를 심어서 밥을 먹으니 비로소 인간의 세상임을 깨닫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청산을 바라볼 때, 벌써 연하(煙霞)를 이별하고 원학(猿鶴)에게 사과하는 회포를 달게 된다.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
잠깐 쉬고 드디어 떠나는데 높은 데를 오르기 싫어서 이에 시냇물 따라 흰 돌을 밟고 내려가니, 동부(洞府)가 맑고 깊숙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혹은 지팡이 꽂아 놓고 노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원문해석 출처/지리산 99. 엉겅퀴님
의신사에는 30여명의 스님이 정진중이었으며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내용이 있다. 즉,김일손의 속두류유록이 아니고는 법해스님의 법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인지하는대로 스님의 법명과 부도의 당호를 같이 사용하는 작례는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속두류유록에 등장하는 의신사 주지 법해스님이 부도의 주인공 법해당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으며, 오하려 다른 스님의 부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한번 뿐인 소중한 내 인생인데
잠도 안오고 괜히 초조해지고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가 싶고
나만 이런가 싶고,
징글징글하게 사람이 싫다가도
한순간에 눈물나게 사람이 그립고,
너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라는 말에
괜시리 더 서러워 지는 날..
알아요,
많이 힘들죠,
정말 지쳐 죽겠죠?
현실은 내가 꿈꿨던 것과 달리
더 비참해져만 가고 점점 미치겠고,
일도, 사랑도, 인생도
되는거 하나 없고
가슴은 답답하고
몸은 지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답답한 현실,
갑갑한 인생,
그냥 될 대로 되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만사 귀찮다고 포기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많았을 거에요.
그런데 정말 포기할수 있겠어요?
못하잖아,
한번뿐인 소중한 내 인생인데
어때요?
다시 한번 힘을 내보는 게..!!
-흔들리는 나에게 필요한 말 한마디-중-# 산행지도
# 산행사진
지팡이, 아드리나무가 되다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옛 신흥사 터에는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가 들어서 있다. 그 교문 앞에는 높이가 30미터에 가까운 크고 잘생긴 나무 한 그루가 당당하게 서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된 보호수인 이 푸조나무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속세를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이곳에 지팡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았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무에 앉아 고운 선생의 '호리병 속 별천지(壺中別天,호중별천)'을 조용히 음미했다.
東國花開洞。壺中別有天。(동국화개동 호중별유천)
仙人推玉枕。身世欹千年。(선인추옥침 신세훌천년)
春來花滿地。秋去葉飛天。(춘래화만지 추거엽비천)
至道離文字。元來在目前 (지도리문자 원래재목전)
擬說林泉興。何人識此機。(의설림천흥 하인식차기)
無心見月色。黙然坐忘歸。(무심견월색 묵묵좌망귀)
長風生萬壑。赤葉秋山空。(장풍생만학 적엽추산공)하동 범왕리 푸조나무 -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123호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산37
경상남도 기념물 제123호. 이 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우리나라 남쪽지방에 자라는 수종이다. 이곳 한 그루의 푸조나무 노거목은 높이 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6.25m, 수관폭(樹冠幅)은 동서로 25.9m, 남북으로 29.2m에 이르는 거목이고, 나무의 나이는 약 5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관의 발달이 거창하고 우리나라 푸조나무 중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금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을 내어 자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며 나도 살아 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신응사&신흥사,神興寺지 부도 바로 테크옆에 대나무 숲 있었는데, 깊은 숲으로 찾이는 못햇다 이제 공부를 하여 위치를 확실히 알것 같다.
하동 신응사&신흥사지 부도. 마을 정기를 누른다고 마을 사람들이 넘어뜨려 놓았다. -퍼온사진-
신응사&신흥사지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51-1, 지금의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이 있는 곳에 있었던 절집 터를 말합니다. -퍼온사진-
신응사&신흥사,神興寺지 부도
신응사&신흥사지 부도
범왕리 왕성초교 뒤편 대밭에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 홀로히 신흥사터 지킴이로 남아 있다. 방형 지대석,탑신과 연봉형 보주가 일체형이다. 탑신 하대를 한 줄 돌대로 구획하고 탑신에는 작례를 보지 모산 기하학 문양을 커튼처럼 선각으로 표시하였다. 탑신에는 불비형 패를 조성하고 주인공의 당호를 새겼지만 육안으로 구분이 힘들다.세이암 (洗耳庵)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洗耳岩) 전설(傳說)
세이암 전설 은,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의 의신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을 따라가면 절벽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라 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여기서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의신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에는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洗耳岩)이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세이암 (洗耳庵)주변 각자
세이암 (洗耳庵)주변 각자
세이암 (洗耳庵)주변 풍경
오늘 산행의 포인트는 지리산 옛길이다. 이 길은 서산대사길, 의신 옛길, 또는 신흥-의신 옛길로도 불리우며 경남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신흥교)과 의신마을(출렁다리)을 잇는 4.2km 구간을 말한다. 특히, 의신마을의 주변은 지리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암자와 사찰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조선 불교의 요람이기도 했었다고 한다.
수려한 산세에 물길과 산길이 조화를 이룬 이 곳 화개동천(花開洞天)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신흥 삼거리에서 범왕마을 방향의 길가 바위에 새겨진 신응사지(神凝寺址), 의신사지(義神寺址), 영신사지(靈神寺址) 마을의 의미를 함축한 삼신동(三神洞) 각자와 푸조나무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서산대사께서 불교에 입문한 원통암(圓通庵), 신응사(신흥사)터에서 의신사터를 잇어 그 곳에 이르는 길로 즐거운 여정을 떠나본다.
신흥교
신흥교에서 바라본 화개동천
신흥교 건너기 전 지네능선 들머리인 세이암(洗耳岩), 세이정(洗耳亭)이 바라다 보이는 맞은편, 옛신흥사터 조금 위쪽이 서산대사길 들머리이다.
신흥 - 의신옛길(서산대사길)로 들어선다.
토끼봉에서 발원한 범왕능선, 그 끝자락의 팔백고지가 웅장하게 똬리를 틀며 화개동천으로 이어지고, 그 가장자리를 아우름이 서산대사길이다.
큰 암석 옆을 걷고, 적당한 오르내림과 굽이굽이 도는 그 길에 지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새소리가 더해져 산길과 물길이 조화를 이루는 더욱 낭만적인 여정을 느끼게 한다.
의자바위 도착
의자바위 -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무렵, 편안하게 쉬어가라는 의자바위도 이색볼거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서산대사가 의신사의 범종을 훔쳐가는 왜놈들이 미워 돌의자로 변하게 했으며, 그 신비함에 그 신비함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한다.
건너편 단천마을 입구 전, 정류석(停留石)의 위치를 알리는 나무계단 정류석은 지금의 정류장과 같이 신흥과 의신을 경유하던 사람들이 한 숨 쉬어가며 여정의 고단함과 시름을 달래는 명소이었다고 한다.
반석위에 세겨진 각자性者心之理(성자심지리)-본성(성품)은 마음의 핵심(주재자)이요心者性之器(성자심지기)-마음은 본성의 그릇이니라인간사 마음에 따라 희노애락이 있나니 성품이 자아(自我)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류만묵을 쓴 풍류객 동초 김석곤 지인들(모두 간재 전우의 문하인으로 추정) 이름인 듯
[자료] 블로그 '하얀사랑의터'에서 동초 김석곤(東樵 金晳坤 1874~1948)이 초서로 쓴 칠언율시를 가져왔다.
一經一緯有誰知 (일경일위유수지) 날줄이 하나이면 씨줄도 하나임을 뉘 있어 알리오
雖由縱橫亦不知 (수유종횡역부지)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라
疑惑人人莫深究 (의혹인인막심구) 의혹하는 사람들아 깊이 궁구하지 마소
相從織者自然知 (상종직자자연지) 베짜는 이와 상종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東樵又題 (동초우제) 동초가 또 짓다날줄과 씨줄은 쌍계사 진감선사와 최치원을 이르는 말인데,서산대사가 1549년 봄 쌍계사 중창기에 '일경일위'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베라는 것이 씨줄 날줄 하나하나 모여 된 것이니 결국 인드라망의 세계를 말함이다.
이 세상이 그물코같이 엮겨 있고 그런 것은 자연의 이치니 씨줄날줄 모두 그 역할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의미로 읽힌다.[하얀사랑의터]
정류석(停留石)윗쪽 단천마을 입구 맞은편 화개동천 건너 적벽
동초 김석곤의 초서체 각자인 頭流萬墨(두류만묵) 지리산의 모든 시서(詩書)를 대표한다는 뜻
적벽 바로 아래 가운데 암반이 두류만묵 있는데 찾이 못했다. 아마 태풍, 장마로 위실 되었을가.
죽통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의신마을 전경
출렁다리를 건너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는 골목으로 오른다. 좌측으로 두 번째 골목에 대숲이 있으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옛의신사터이다.
의신사지 법해당(?) 부도를 뵙기 위해 의신마을에 도착하였으나 피서인파로 뙤약볕에 주차공간 찾기가 부도 찾기보다 더 어렵다. 도로변에 불법 주차 후 동리 아주머니에게 탐문하였더니 개략적인 위치와 부도를 잘 아는 분의 집을 알려주었다. 부도는 길을 따라 올라 가다가 우측으로 난 희미한 길(위사진 상단 소나무 아래)로 들어서면 10여미터 전방에 위치한다.
부도로 향하는 의신마을 마지막 집(의신길 26-11)에서 부도 까지는 넉넉잡아 15분 미만의 거리이다. 사진 아래편 경작지 위쪽 우측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의신사,義神寺지 숙제다, 여러 곳을 찾아 보았지만 우겨진 대나무 숲 으로 위치를 찾이 못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것 같다. 얼마나 다렸던 곳인가 그렇지만 가지 못했다. 여유있는 시간 가지고 하나 하나 숙제 해야겠다.
명당은 명당 인것같다 - 명당 자리 보지는 못하지만 의신사지는 아니지만 의신사지 주변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조망되는 하동 독바위 그리고 의신마을 멋진 풍광이다.
원통암 오르는 길에 오래된 감나무 - 얼마나 오래 시간 자리를 지켰을까.
원통암에 도착 - 서산산문 눈에 들어온다.
서산선문을 들어서며 소박하고 정갈한 원통암을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
원통圓通이란 지혜로 부처님의 이치를 깨달은 상태를 말한다고 하니 이 문을 들어서면서 잠시 그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그 지리산 하고도 남부지리의 깊숙한 곳. 그곳의 한 암자에 선종 제62조 서산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원통암圓通庵입니다. 원통암이 바로 휴정 서산대사의 출가 했던 암자 입니다.
서산선문으로 들어서자 조경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스님의 깔끔한 성격을 대변해 주는 듯 싶습니다.
원통암에서의 조망. 정면으로 좌측에서는 지네능선이 내려오고그리고 그 중앙에 호남정맥의 맹주 백운산1222.2m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그 우측으로 한재를 지나 도솔봉1153.2m이 나란히 솟아 있으니 그 흐름을 도솔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수차 왔지만 시간을 만들지 못해 들리지 못한 지리산 역사관 들려 공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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