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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_유지리산록 1463년 - 유람록지리 탐구방,탐방기고 2021. 3. 1. 11:50
이륙(李陸) - 방옹(放翁), 청파(靑坡) 출생 - 1438년(세종 20) - 사망 - 1498년(연산군 4)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장례원판결사, 대사성, 예조참의, 형조참의,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병조참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방옹(放翁), ·부휴자(浮休子), 호는 청파(靑坡). 이강(李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사간 이지(李墀)이며, 어머니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힘써 학문을 닦았다. 1464년(세조 10) 춘방 문과에 장원 급제해 겸예문에 선발되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을 받아 안효례(安孝禮) 등과 도성의 지도를 작성하였다.
1468년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어 「형국사목(刑鞫事目)」을 작성했으나 피혐(避嫌)으로 물러났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겸예문에 다시 선발되고, 사헌부 재직시 시폐(時弊)를 진언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다.
1471년(성종 2) 장례원판결사에 등용되고 당상관에 오른 뒤, 이어서 대사성·공조참의를 거쳐 1477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다시 예조·이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병조참지·형조참의를 지냈다.
1484년 가선대부로 승급, 경상도관찰사·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488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서반으로 옮겼다가 그 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0년 예조참판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춘추관사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5년(연산군 1)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대사헌에 등용되어 여러 가지 시폐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그 해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연산군 즉위에 소극적이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한성부의 좌윤·우윤, 호조참판·병조참판을 지냈다.
성품은 정한(精悍)했으며, 행정 수완이 있었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좁았으며, 축재에 힘쓰기도 했다 한다. 저서로는 『청파집』·『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이륙_유지리산록 1463년 - 유람록
李陸 [이ː륙]
1459년(세조 5)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힘써 학문을 닦았다. 1464년(세조 10) 춘방 문과에 장원 급제해 겸예문에 선발되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을 받아 안효례(安孝禮) 등과 도성의 지도를 작성하였다.1468년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어 「형국사목(刑鞫事目)」을 작성했으나 피혐(避嫌)으로 물러났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겸예문에 다시 선발되고, 사헌부 재직시 시폐(時弊)를 진언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다.1471년(성종 2) 장례원판결사에 등용되고 당상관에 오른 뒤, 이어서 대사성·공조참의를 거쳐 1477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다시 예조·이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병조참지·형조참의를 지냈다.1484년 가선대부로 승급, 경상도관찰사·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488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서반으로 옮겼다가 그 해 형조참판이 되었다.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0년 예조참판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춘추관사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연산군이 즉위하자, 1495년(연산군 1)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대사헌에 등용되어 여러 가지 시폐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그 해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연산군 즉위에 소극적이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한성부의 좌윤·우윤, 호조참판·병조참판을 지냈다.성품은 정한(精悍)했으며, 행정 수완이 있었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좁았으며, 축재에 힘쓰기도 했다 한다. 저서로는 『청파집』·『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륙(李陸))]1463년(세조 9년) 당시26세
천왕봉당(天王峯堂)에는 천왕의 석상이 있다. 정수리 위에 칼자국이 뚜렷한데, 왜구가 궁지에 몰리자 천왕이 돕지 않는다고 여겨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정수리를 찍은 것이라고 한다.
봉우리 꼭대기는 평평하고 너비가 수십 걸음 정도 된다. 동, 남, 서쪽 세 방향을 바라보면 확 트여 막히는 것이 없다.
매양 아침에 해가 뜰 때는 마치 금쟁반이 눈 아래에 펼쳐진 넘실대는 겹겹의 구름을 뚫고 뛰어오르는 듯하다. 햇빛이 먼저 봉우리 정상을 비추는데 산 아래는 여전히 어두워 아직 채 밝아지지 않아 사방의 산들을 바라보면 모두 작은 구릉일 뿐 딱히 높은 곳은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 강과 호수들이 털처럼 가는 것도 다 바라다 보이는데 어디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면이 다 뾰족한 봉우리로 나무 사이에 쇠를 잇고 돌을 둘러 놓아 사람이 잡고 오를 수 있게 했지만 범이나 곰 같은 맹수들은 하나같이 다닐 수가 없다. 비록 까마귀나 솔개라도 역시 다가갈 수가 없었지만 오직 송골매는 가을이 깊어지면 내려와 앉곤 한다. 서쪽으로 이삼 리 정도 가면 석굴에 맞닥뜨리는데 오가는 자들이 이 굴을 통해 다닌다.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천왕을 신령하다고 여겨서 질병이 생기기만 하면 반드시 천왕에게 기도하고 산속의 뭇 사찰들은 신당을 세워 제사지내지 않는 곳이 없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서로 고기 먹거리를 가지고 가지 말도록 당부하는데 다들 말하기를,
“이 금기를 범하면 반드시 도중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길을 잃게 되고 헤아릴 수 없는 우환이 생긴다.”
라고 한다.
반야봉(般若峯)은 전라도와의 경계에 있는데 그 높이가 천왕봉과 비슷하다.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자들이 많이 산다. 쌍계(雙磎)에서 3일을 가면 여기에 올 수 있다고 승려가 말한다.
영신사(靈神寺) 동쪽 제단에는 가섭(迦葉) 의 석상이 있는데 어깨와 팔에 불에 탄 듯한 자국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석상이 다 타면 인간 세상이 변해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것이니 매우 영험함이 있다.”
라고 한다.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뜰아래 작은 샘이 있는데 물이 세고 매우 맛있어서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 동쪽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부도(浮屠) 모양처럼 생겼다. 여기 사는 승려들은 귀사(龜社)의 주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뜰에 백 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라고 한다.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섬진강과 가까워 이곳 승려들은 절 서쪽에 있는 최공(崔公)의 서루(書樓)에서 섬진강물을 속속들이 바라볼 수 있고 아직 그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계곡물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세속에서 밥 지어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다.
불일암(佛日菴)은 서쪽으로 쌍계사와 십여 리 떨어져 있는데 벼랑과 골짜기가 매우 험준해서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고 다닐 수 있는 길도 없다. 절벽의 허리를 뚫어 가르고 있는데 위아래로 모두 수백 길이나 되고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다. 절벽을 뚫을 수 없는 곳에는 나무를 가로놓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지나다니는 자들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털이 곤두서지 않는 이가 없다.
불일암도 아래로 백여 길이나 되는 절벽에 맞닿아 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이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학연(鶴淵)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이곳에서 독서할 적에 신룡이 때때로 못에서 나와 듣고 학도 그를 위해 너울거리며 날아다니면 공이 가끔 허공에 글자 한 자를 써 다리를 만들어 서로 왕래했다.”
라고 한다. 또 절벽의 바위에 난 작은 구멍으로 구릿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곳 승려들은 최공이 이곳에 구리붓을 감추어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속사(斷俗寺)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오륙십 리 정도 가면 있다. 홀로 서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여기부터 외산(外山)이다. 이 절은 동쪽으로 단성(丹城)에서 십여 리, 북쪽으로 산음(山陰) 에서 십오륙 리 떨어져 있고 앞으로 소남진(召南津) 과 또 십여 리 떨어져 있다.
이 절은 봉우리 아래 있는데 모두 백여 칸이나 된다. 가운데 자리 잡은 대전(大殿)은 보광전(普光殿)인데 경태(景泰) 연간 에 중창한 것이고 앞쪽에 있는 창판당(創板堂)은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서, 남, 북쪽에 각각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뜰 오른쪽에 있는 누각은 신라 때 지은 것인데 벽에 그려진 사천왕상의 금빛과 푸른빛이 여전히 새것 같았다. 전해지는 말로는,
“신라 승려 김생(金生)이 벽 위에 유마상(維摩像)을 그리고 고목 한 그루를 배경으로 그렸는데 산새가 가끔씩 날아와 앉으려다가 떨어지곤 했다. 뒤에 그림의 나뭇가지 한 개가 훼손됐는데 승려가 이어놓으니 이때부터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사천왕의 진영(眞影)이 매우 기이하고 고풍스러우니 불도자(佛道子)가 그린 것이 아니라 김생이 그린 것일 것이다. 고려 때 명현인 김부식(金富軾) 과 정습명(鄭襲明) 이 이곳에 유람을 왔다가 벽에 시를 남겨 놓았다. 계곡 입구 석벽에는 ‘석문(石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이 또한 최치원의 글씨라고 한다.
법계사(法戒寺)는 천왕봉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다. 배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선(天王舡)이라고 부른다. 천왕봉 쪽으로 삼사 리쯤 가면 또 집처럼 생긴 돌이 있으니 수십 명을 가릴 만한데 천불암(千佛菴)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자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화덕 자리가 아직도 있었다.
오대사(五臺寺)는 살천(薩川) 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누대 같고 이 절이 그 안에 있어서 오대사라고 부른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학 한 마리가 봉우리 위에 깃들어 살았다.”
라고 한다. 이 절에는 고니 알만한 큰 주옥이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고 한다. 은실로 그물을 쳐서 승려들이 전해 오며 보배로 삼고 있다. 수반분(水半盆)이라고도 하는데 주옥을 물에 넣으면 대야를 가득 채우고 넘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양사(安養寺)는 섬진강에서 동쪽으로 큰 고개 세 개를 넘어 육십여 리 가면 있는데 오대사와 함께 경치 좋은 절이라고 칭해지지만 기이한 유적은 없다. 마을과 꽤 가깝고 서실(西室) 벽에 세 조사의 진영이 엄숙하게 있을 뿐이다.
묵계사(黙契寺)는 안양사 앞 개천에서 물길을 따라 서북쪽 계곡 사이로 꽤 험한 길을 사십여 리 가서 물 근원에 이르면 있는데 땅이 확 트여 있고 비옥하다. 이 절은 지리산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서 뜻이 있는 승려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가서 거처한다.
우산(牛山)은 지리산 서남쪽으로 백곡촌(栢谷村)에 이르러 엎드린 소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우(牛)라고 부른다. 유방사(有房寺), 모방사(茅房寺) 두 절이 있는데 고려 때 장군 강민첨(姜民瞻) 이 창건하였다. 모방사에는 강민첨 장군의 화상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제사지낸다.
방어산(防禦山)은 지리산에서 서쪽으로 칠십여 리 정도 떨어져 진주(晉州), 함안(咸安), 의령(宜寧) 사이에 있다. 강이 이 산 북쪽을 핥으며 동쪽으로 지나가는데 이것이 정암진(鼎巖津)이고 산 서쪽에는 청원사(淸源寺)가 있는데 바위가 많은 계곡에 임하여 매우 맑은 운치가 있다. 청원사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리 미쳐 법륜사(法輪寺)가 있으니 서쪽으로 진주와 십여 리 거리이다.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이 지역은 매우 산수가 좋아 진주 사람들이 이곳에서 글을 읽고자 왕래가 끊이지 않는데 남긴 자취가 많습니다.”
라고 한다.
의림사(義林寺)는 진해(鎭海) 서쪽에 있는데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산문을 나서 몇 보쯤 가면 진해 성문을 환히 볼 수 있다.
두춘도(杜椿島)는 진해성에서 남쪽으로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작은 산이 북쪽에서 내려 오다가 바다에 임하여 멈췄다. 정상에는 수백 명이 앉을 만하고 삼면이 모두 절벽인데 경치가 그림 같다. 두춘나무가 회랑처럼 덩굴을 이루어 수십 명을 가릴 만하다. 아래쪽은 모두 푸른 바위들인데 바닷물이 밀려오면 잠기고 밀려나가면 바위가 마당처럼 평평해서 또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바위에 올라 바라보면 확 트여 거리낄 것이 없다.
금강사(金剛寺)는 김해성(金海城) 동쪽에 있다. 앞쪽에 안탑(鴈塔)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세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벽 위에 고려 때 시랑(侍郞) 정습명(鄭襲明)의 기문(記文)이 있다.
내가 천순(天順) 연간 말엽에 남쪽으로 영남 지방에 와서 단속사에서 독서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 그 해 가을 8월에 단속사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살천현에서 자고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영신사, 향적사(香積寺) 등을 두루 거쳐 반야봉으로 가려했는데 주머니가 텅텅 비어 결행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섬진강을 죽 따라가다가 멈추고 다시 동쪽으로 큰 고개 세 개를 넘어 소남진으로 돌아왔으니 여행길이 모두 이백여 리 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 발길이 이르지 못한 곳과 눈으로 보지 못한 곳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이 여행 기록 또한 어찌 지리산의 진면목을 여실하게 드러내서 산의 윤곽이나마 그릴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지리산의 승경을 말해 준 승려가 있었는데 그 말이 내가 본 것과는 매우 달랐다. 모르겠다. 내가 보지 못한 곳을 그가 볼 수 있었으며 내가 이르지 못한 곳을 그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산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비유하자면 기린을 볼 적에 그 발굽을 보는 자는 말이라고 여기고 꼬리를 보는 자는 소라고 여기며 몸통을 보는 자는 고라니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인데 세 사람이 비록 보는 것이 같지 않지만 또한 기린을 못 보았다고도 할 수 없다.
지리산이 수백 리에 걸쳐 서려 있어서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서쪽을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가는 사람은 북쪽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한 쪽 방면으로 유람을 떠나 수십 일을 돌아다녔으나 세상에서 이른바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 과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내가 본 것을 가지고 남의 말을 폐할 수는 없으나, 내가 오른 곳은 천왕봉이다. 천왕봉에 올라 바라보면 지혜롭건 어리석건, 명석하건 무식하건 간에 보는 것이 상의하지 않아도 같은 것인데 저 승려가 본 것은 유독 나와 다르니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람가기 전날 저녁 절에 물어서 길잡이를 고용하려고 하니 이 때 절에 사는 승려가 무려 백여 명도 넘었는데 지리산을 다녀 본 승려가 하나도 없고 또 말하기를,
“지금이 막 수확기라 유람을 다닐 수 없습니다.”
라고 한다. 내가 이 때문에 승려들의 생계 걱정이 세속보다 심함을 알았으니 어찌 이들이 허랑하게 발품을 허비해가며 험하고 높은 산길 수백 리를 기꺼이 가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산기슭에서 늙어 죽으면서도 발걸음이 산 위에 미쳐보지 않은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는 지리산에 산다. 나는 지리산을 보았다.”
라고 하니, 내가 저 승려가 단정한 법사이지 생계에 급급해하다 늙어 죽는 무리가 아니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옛날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올라가서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는데 내가 처음에 의심했다가 결국 믿게 되었고,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가서 천하를 작게 여기셨는데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가 이 산에 오르고 나서야 성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으니, 언젠가 지팡이 짚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대고 길게 메아리쳐 보고 흉금을 헤치고 바람을 맞는 자가 있다면 지금 나의 이 말을 가지고 질정해 보라.
계림(鷄林) 이백승(李伯勝)과 철성(鐵城) 이방옹(李放翁)과 밀성(密城) 박정부(朴貞父) 등이 지리산 서쪽 단속사에 독서하러 가을 8월 그믐 5일 전에 들어 왔다.
* 가섭(迦葉) --마하가섭(摩訶迦葉), 석가의 십대(十大) 제자 중 한 사람.
* 산음(山陰) --현 경상남도 산청군
* 소남진(召南津)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의 나루
* 경태(景泰) 연간 --중국 명나라 대종(代宗) 때의 연호(1450~1456)
* 김부식(金富軾) --고려시대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 문학가.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 정습명(鄭襲明) --고려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형양(滎陽), 영일정씨형양공파(迎日鄭氏滎陽公派)의 시조.
* 살천(薩川)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이곳에 살천현이 있었음.
* 강민첨(姜民瞻) --고려시대의 장군. 본관은 진주.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뜻과 기개가 있고 굳세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음.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이 유명함.
* 천순(天順) 연간 --명나라 영종(永宗) 때의 연호(1457~1464)
* 계림(鷄林) -- 경주
* 철성(鐵城) -- 철원
* 밀성(密城) -- 밀양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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