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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법주굴 - 이성계의 기도처 - 광덕사지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2. 15. 14:37
1463년 유지리산록, 암법주굴, 이성계
1463년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
자료출처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도서명 : 속동문선(제 21권) 저자 : 이륙(李陸)
이륙 作 유지리산록은 당시 지리산행 지침서. 김종직은 이륙의 유지리산록을 수친서로 작성. 1472년 8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리산 유람. 이륙은 기묘년(1462.세조8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파묻혀 공부하며 지리산을 두루 유람한다. 그가 주로 오른 코스는 <중산리 - 법계사 - 천왕봉> 천왕봉과 법계사 주변과 지리산 동부지역의 수계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좋은 탐구산행 자료가 된다. 이륙의 유두류산록은 그의 시문집 청파집에 담겨있다.
이륙의 청파집(靑坡集)
이조 초기의 문신 이륙(李陸:1438~98)의 시문집. 연산군 때 간행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간행 못했다. 1512년(중종 7) 아들이 시 몇 수와 극담(劇談)을 찾아내 자신의 지(識)를 붙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초간본 책 머리 강혼(姜渾)의 서문과 1499년 성현이 지은 청파비명이 있다. 1600년 초에 거듭 목활자로 간행되었는데, 서문과 발문이 없고 간행연도를 알 수 없다. 중간본 권1에 시, 권2에는 기·녹(錄)·설(說)· 서(序)·묘갈명·대책(對策) 등이 실려 있다. 1853년(철종 4) 후손 노선이 초간본을 편집 보완하여 간행. 삼간본 책 머리에는 목록과 강혼·권대긍이 1852년에 쓴 서문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은 두류산 위치와 주변환경을 기록한 글
이륙의 유지리산록은 1472년 유두류록 수친서. 이조 시대 지리산을 찾았던 선비들의 지침서
유지리산록 본문 1463년 8월 이륙 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영남,호남 사이에 웅거하고 있는데 그 높이와 넓이는 몇 백리 인지 알 수 없다. 지리산 주변에는 목(牧)이 하나, 부(府)가 하나, 군이 둘, 현이 다섯, 부속된 고을이 넷 있다. 동쪽은 진주, 단성이고 서쪽은 남원,구례,광양 남쪽은 곤양,하동,살천,적량,악양 북쪽은 함양,산음. 가장 높은 봉우리로 동쪽은 천왕봉, 서쪽은 반야봉. 서로 백 여 리가 떨어져 있고 항상 구름에 싸여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 서쪽에 향적사.......<장터목에서 15분 거리>
서쪽 50 리에 가섭대, 그 남쪽에 영신사.......<대성골 영신봉 아래(?) 절터>
천왕봉 서쪽 20 여리에 넓게 트인 평지........<세석평전>
편편한 사방 6~7리는 농사짓기 알맞다........<음양수 주변>
늙은 잣나무 숲과 무릎까지 빠지는 낙옆.......<음양수 주변 화전민 터>
사방을 둘러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세석평전 철쭉 군락지>
평지 남쪽 시내 따라 내려가면, 신흥, 쌍계 세 절이 있다. 의신사 서쪽 20리 칠불사, 쌍계사 동쪽 고개 넘어 불일암 산꼭대기 향적사, 그 밖의 이름난 사찰은 헤아릴 수 없다. 향적사는 나무 판자로 덮혀 있고 거처하는 승려는 없다.
영신사만 기와지붕이 덮혀 있고, 그곳에 승려는 한 두 명 뿐이다.
산세가 험하고 마을과 동떨어져 고승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환경.
영신사의 작은 샘에서 발원된 물은 신흥사 앞에서 큰 내.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를 화개동천이라 부른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천불암, 법계사.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굴 동쪽은 바다가 보이고 서쪽은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극히 맑은 운치를 자아내는데 그 굴을 '암법주굴'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또 다른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합쳐져서 폭포로 내려온다......<유암 폭포>
살천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 물은 소남진의 하류로 흘러 진주를 들러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청천강이라고 부른다.
소남진 산 북쪽 물은 동쪽으로 와서, 단성현 서쪽으로 꺾인다. 살천 마을에서 20 여 리를 더 걸어가면 보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살천 마을 앞 쪽을 내산이라 부르고, 바깥쪽을 외산이라고 한다.
보암사에서 빨리가면 하루 반나절이면 천왕봉에 도착할 수 있다. 돌 비탈이 험준해 길 찾기 어렵고 느티나무, 회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그 아래로는 가는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간혹 천 길 벼랑에 걸린 나무 껍질에는 이끼가 꼈다. 샘 줄기는 구름 끝에서 날아와 그 사이로 내리쏟는다. <천왕봉 아래, 빙벽등반 코스 통신골 폭포를 말하는 듯.>
그 쏟아진 물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진다. 수십 주의 나무를 베어내야 비로소 하늘을 좀 볼 수 있다. 일 좋아 하는 사람이 바위 위에 돌을 얹어 길을 표시해 둔다.
여름에 녹지 않는 골짜기 얼음과 눈.......<지금보다 추운 날씨>
음력 6월에 서리, 7월에 눈이 내린다.....<겨울이 일찍 시작된 흔적>
8월엔 얼음, 초겨울에는 이미 많은 눈. 온 골짜기가 펀펀해져 통행이 어렵다. 산에 사는 사람은, 이듬해 늦봄에 하산.
산 아래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구름 한 점이 없다. 산이 높아 하늘과 가까워,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
산 아래는 감나무, 밤나무가 많고, 그 위엔 느티나무. 느티나무가 끝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가 가득하다. 그 중 절반은 말라 죽어 푸른 것과 흰 것이 뒤섞여 있다.
정상에는 철쭉나무만 있을 뿐. 나무 높이가 한 자를 넘지 않는다.......<천왕봉 정상>
모든 아름다운 산나물과 진기한 과실이 많아 이 산 주변 주민들은 그 이익을 먹고 살고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
<청파집> 저자 이륙
세조~ 성종 명신으로 한양 청파동에서 출생(호 청파).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않았고 22세(1459년) 생원과 진사과에 오르고 1464년 문과 장원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 병조참판ㆍ대사헌 등의 벼슬에 이르렀다. 저술한 책으로는 청파집(靑坡集이 있다. 인조 때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은 육의 현손 이륙이 기묘년(1462.세조8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지리산을 두루 산행 후 남긴 기록물. 그가 오른 등산로는 중산리-법계사 - 천왕봉 지리산 동부지역의 지명 수계를 상세하게 기술 천왕봉 법계사 일대 지명 및 탐구산행의 좋은 자료.
살천은 현재 사천면을 말한다. 소남진은 '단성과 진주' 사이.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길 여원치, ⇒, 운봉, ⇒, 팔랑치, ⇒, 함양, ⇒, 사근역, ⇒, 산청, ⇒, 오조점, ⇒, 단성,⇒, 소남진, ⇒, 진주, ⇒, 관율역 .(단성현~소남진~평거역~진주목)
암법주굴
이조 건국 전, 이성계가 머물렀던.,지리산 기도처. 그가 이곳에서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중대한 결심을 했던 것은 분명한 듯. 옛 문헌 기록들과 지도 상의 이곳 표기가 그 증거. 암법주굴이 문헌 상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463년 <이륙>의 두류산록에 있는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自天王東下。有千佛菴,法戒寺。自千佛小北而上。 有小窟。東臨大海。西負天王。絶有淸致。號岩法主窟。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부분 <號岩法主窟(호암법주굴) <신동국여지승람> 국역본에서는 암법주굴(岩法主窟)이라 한다 대부분의 고서국역에서는 한결같이 <신동국여지승람>을 따른다. 문제의 마지막 구절인 <號岩法主窟>을 국역할 때 “바위(岩)를 법주굴(法主窟)이라고 부른다(號)” '그렇다면, 암법주굴이 아닌 법주굴이 맞는 걸까?' 고지도(古地圖)에는 법주굴(法主窟)로 표기 <조선지도> 제작연대 1750에서 1768년 사이 <동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법주굴(法主窟) 동여도는 19세기 중엽 金正浩가 제작 대동여지도 저본으로 삼았던 조선전도 木版本 '대동여지도'와 달리 채색 필사본. 요즘 암법주굴 이름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암법주굴 기록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등장. 암법주굴은 이조시대에도 많이 알려졌던 명소였다.
이긍익 作 연려실기술 中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이 바로 ‘암법주굴(巖法主窟)’ '연려실기술'은 이조 정조 때의 학자 이긍익 作. 태조에서 현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서 59권 42책. 이긍익(1736~1806)은 본관 전주. 호 연려실(燃藜室). 부친에게 수학,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 고증학파 학자로 소론파로 노론이 집권하자 여러 번 귀양 저작(著作)은 많았으나 겹치는 귀양살이로 거의 유실되고 전해오는 대표적 저서로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있다.
암법주굴은 이름,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곳. 기록으로만 전해왔고 그 위치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 하여, 어딘가에 있을 암법주굴 위치는 상당한 논란거리. 그 논란 중 가장 신뢰감 있던., 2가지 옛 설화.
암법주굴에 대한., 옛 설화
1. 암법주굴에 얽힌 설화 -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 씨 "암법주굴은 이성계(李成桂)가 기도를 드리던 곳 中 하나. 그 위치는 법계사 우측 2㎞ 지점이다."라고 주장해 왔었다.
2. '다큐멘터리 지리산'을 쓴 김경렬 씨.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 암자 절이라기보다 천연의 수도처였다."고 했다. 동학 농민 항쟁과 항일 의병들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반란 때 빨치산 야전병원이 되었다는 은닉처.
2 곳 외에도 암법주굴 물망에 오른 곳은 여러 군데. 천왕봉 아래 있는 토굴도 물망에 자주 올랐던 곳 해발 1900m 부근 천연암굴 안에 붉은 페인트 글씨. 종교단체의 흔적인데, 20~30명 들어갈 수 있는 동굴.
천왕봉에서 중봉 안부로 내려서는 벼랑 허리의 동굴 그러나, 이곳은 옛 문헌 상 위치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 동안 구전으로만 그 위치가 전해왔던 암법주굴. 많은 사람이 암법주굴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청학동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던 옛 성현들처럼. '그러나, 1463년 기록을 근거로 찾아낸 암법주굴.' 일명 '이성계 굴.'을 찾게 했던., 몇 구절 글귀. 암법주굴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 옛 기록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했던 쾌거였다.
1463년 이륙의 유지리산록 일부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이라 한다.
지리산 암법주굴
지리산 암법주굴 내부에서 바라본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석벽
지리산 암법주굴의 외부석벽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
<암법주굴> 은 그 위치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명만 전해져 왔던 <천불암>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 <암법주굴>을 찾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유지리산록>.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암법주굴.'
천왕봉 남동쪽 혹은 남쪽의 아래 암법주굴이 있고 암법주굴 남쪽 혹은 남동쪽 아래 천불암이 있다는 것 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던 <암법주굴> 위치를 찾아낸 것.
밝은 화강암 거대한 바위가 초가 지붕같이 튀어나와 지붕을 만들고 그 바위 뒤로는 숲에 가려진 병풍바위. 양지바른 마당 건너 석벽이 담을 치고 있는 천혜의 토굴
지리산 토굴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암법주굴.
석굴 안에서 밖으로 바라본 넓은 마당 마당 주변에 담처럼 둘러 서있는 석벽 마치 인공으로 정교하게 만든 정원 같다.
석벽 위에서 바라본 탁 트인 전망과 남해 바다 1463년 이륙 선생의 두류산록 내용과 일치한다.
법계사에서 천왕봉 가는 등산로 옆에 있는 석굴 법계사에서 개선문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석굴 그동안 암법주굴 또는 천불암으로 추정되었던 곳.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지며 확실해진 천불암 위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광덕사지 터가 곧 천불암인 듯. 해발 1450m 광덕사지, 북쪽으로 해발 1560m 암법주굴
'천불암 암자가 있었던 곳은.. 광덕사지 터.'
2004년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진 후 답사 열풍. 옛 선현들 유두류록 따라 답사 산행하는 산꾼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광덕사지.
광덕사는 잃어버린 지리산의 옛 암자 중 하나. 언제 세워져 어느 때에 소실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산리 주민들은 광덕사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중산리 주민들이 들려준 '광덕사골'에 관한 구전.' 절터 기가 세서 주지승이 바뀌면 큰 불이 났었다는 설 광덕사지 부근에 이성계의 수도처 암법주굴이 있다는 설. 절묘하게 에워싼 큰바위 담안에 석간수 샘물이 있다는 설, 주민들로부터 전해 듣고 무작정 찾아나선 산꾼들. 그 결과 마침내 구전 속 광덕사지가 드러낸., 실체. 무엇보다 이곳 매력은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는 점. 중산리에서 천왕봉 오르는 기존 등산로인 칼바위, 순두류, 통신골 등 북적대는 인파에서 벗어난 곳 광덕사지 들머리 산길은 순두류 코스와 동일. 법계사 가는 삼거리에서 법계사 쪽 기존 등산로 20분 후 만나는 출렁다리를 건너 등산로 아님 이정표 마야계곡 입구 등산로 따라 40분 오르면 나무 이정표 법계사 1km 천왕봉 3.2km 이정표에서 10분거리 지계곡 그곳 건너 약간 너른 터 우측 바위 뒤로 10m 가면 계곡 천왕샘에서 발원한 작은 물길이 한참 아래 순두류계곡과 합류 후 중봉골과 합수되는 계곡 왼쪽 길. 길이 점점 희미해지며 드러나는., 광덕사골 속살 그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제각각 떨어지는 3단 와폭 와폭 지나면 길은 계곡을 거슬러 우측으로 이어진다. 계곡을 왔다 갔다 하는 구간이 많아 약간 까다롭다. 나침반은 3백50도 방향으로 놓고 40분 정도 오르면 20m 높이 바위가 나타나면 계곡을 버리고 우측 안부 그 주위에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들이 널려있다. 이 일대 넓은 공터가 '잃어버린 암자' 광덕사지. 가장 위쪽 너럭바위 아래는 무속인들의 제단 흔적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샘물 수량도 풍부하다. 광덕사지에서 천왕봉 등산로는..나침판 240도. 법계사와 광덕사지 오가는 길로 길이 뚜렷하다. 이 외길을 따라 30분쯤 비스듬히 산 사면을 걸으면 잘록한 부근에서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지릉과 만난다. 잘록한 지점을 넘는 길은 법계사 가는 길 이며, 이 지릉을 타면 바로 개천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개천문에 도착 후 천왕봉까지는 기존 등산로이다. 광덕사지에서 옹달샘이 있는 바위 뒤 키 작은 산죽 숲 천왕봉 동쪽 봉에서 흘러내린 지릉에 오를 수 있으며 , 지릉을 따라 천왕봉 오르는 길은 써레봉 길을 닮았고, 지릉 고개에는 마야계곡(중봉골) 등산로도 열려있다. 동학혁명에 실패 후 쫓기던 농민들. 대원군 시절 탄압받던 천주교 신자들. 일제 치하에 항거했던 의병 및 독립투사 그곳 등산로들은 은둔자들 옛 도주로. 그러한 사실을 대변해주는 게시판 하나. 게시판 내용이 눈길을 끌어 여기에 소개.
이 성계(1335 ~ 1408)
암법주굴은 이조 창건 전 이성계의 기도처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일컬었던 이성계 역사 상 지리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과연, 이성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조 제1대 왕(재위 1392∼1398). 본관 : 전주(全州) 호 : 송헌(松軒) 별칭 : 자 중결(仲潔), 휘(諱) 성계(成桂) 출생지 : 함남 영흥(永興)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內應) 공을 세웠고 아버지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 홍건적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로 승진 함경도 홍원으로 침입한 원나라 나하추를 함흥평야에서 격파 1364년 최유가 충숙왕(忠肅王)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 이어 여진족 삼선 삼개를 함경도 화주(和州)에서 격퇴.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격퇴. 당시 그의 지위는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로 운봉에서 왜구 소탕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를 길주(吉州)에서 대파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 임견미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 회군,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 다음해 정도전과 창왕 폐위 공양왕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 1391년 삼군도총제사로서 전제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 신진세력은 경제적 토대를 구축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이조 창건.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도읍을 한양으로 이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에게 선위 후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 1402년 왕자의 난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 건국이념으로 삼아 500년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기반을 닦기 시작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 천호(千戶)로 원나라에 벼슬 이자춘도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 이성계는 가문의 배경과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에서 활동, 새 왕조인 이조를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 태조 즉위 후에 세자 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이 이에 불만. 사병을 동원, 방석, 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 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방원이 세자로 책립,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방원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지금의 함흥)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에 귀경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운명.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 神武大王) 능은 건원릉(健元陵) :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
고려 충숙왕 4년 10월 11일, 한길도 영흥군 흑석 마을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흥은 함흥에서 70리 떨어진 원나라 땅 이자춘은 원나라 천호장 벼슬을 지냈지만, 그의 조상은 전주에 뿌리박고 살던 호족이다.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활을 아주 잘 쏜 명궁. "아니, 아이가 어른 활을 가지고 쏘잖아?" 이성계는 형 원계, 천계와 함께 말달리기 활 쏘기 대회에서 최고상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는 고려 군과 손잡고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고, 함주(함흥) 이북을 고려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자춘을 삭방도 만호겸 병마사로 봉하노라!"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 해 4월, 이자춘은 병으로 운명했고 이성계가 상장군 동북면 상만호가 된 것. 이성계는 그 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아냈다. 어느 날, 서까래 셋을 지고 '꼬기오' 하고 우는 꿈 이성계는 고승을 찾아가 꿈의 해몽을 해달라 부탁했다. "서까래 셋을 등에 지셨다면, 장차 왕이 되실 운명. 등에 서까래를 진 글자가 임금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더니,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이조 왕조의 태조 그의 나이 58살 때였고 17가지 정책을 발표. 새 왕조를 일으키는 데 공이 큰 사람들, 배극렴, 조준, 정도전 17명을 1등 공신 조영규, 조반 등 12명을 2등 공신에 봉. 고려 옛 충신들은 광덕산 아래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아 72 사람은 불에 타 죽어 고려 왕실에 충절을 다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인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이라 지었고 1292년 3월 계룡산에 도읍 공사. 그러나, 큰 강이 없어 도읍지로 부적당해 12월에 공사 중단. "무학대사, 도읍지는 어디로 정하면 좋겠소?" "한양이 좋을 듯싶습니다." 조선이 두 번째로 정한 도읍지는 무악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신촌과 연희동 일대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무악 궁궐터를 반대했다. 예로부터 제왕은 남향에 자리잡았다고 주장 결국,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궁궐터로 잡았다. 1394년 9월, '신도 궁궐 조성 도감' 도읍에 대궐을 짓는 관청을 두었다. 다음해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1393년 10월, 태조는 궁궐이 완성되기 전 개경의 각 관청에 2명의 관인만 남겨 놓고 서울로 옮겼고 정도전은 경복궁 이름을 지었다. 한양에 도성을 쌓는데, 총 19만 장정이 동원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리라!" 태조 이성계는 승유, 농본, 사대 교린 외교 정책 새 나라 이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조를 창건하며 이성계는 수많은 정적을 숙청. 하여, 이성계는 건국 초에 민심 지지 기반이 취약. 라이벌 최영을 죽인 것이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요인.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나를 내리고 또 제갈량을 냈을까?"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패하며 한탄한 말. 이조가 세워지자 고려왕조 최영 추종세력들이 한탄 "하늘은 최영을 내리고 또 어찌 이성계를 맞 세웠나?"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의 기둥이었고 세력도 비슷하였다. 최영은 진취적 기상을 가진 인물이고 시대 예속적인 기품 이성계는 자주 독립적 보스이고 현실주의 사고방식의 인물, 최영이 북벌을 주장한 대신에 이성계는 반대했다. 최영이 기개로써 버티면 이성계는 모략으로 이끌었다. 최영이 의(義)로 책(責)하면, 이성계는 이(利)로 달랬다. 최영은 권세로 통솔했고, 이성계는 다수 의견을 존중했다. 당시 최영은 임금의 신임을 얻어 이성계 파의 반대를 눌렀고 14년 4월에 3만 8천의 군사를 내어 역사적 북벌을 시작하였다. 북벌을 하려면 이 성계를 좌우 도통사 중 하나로 임명해야 했다. 최영은 마음이 곧으나 지혜가 적었고, 뜻은 굳으나 기다릴 줄 몰랐다. 이성계를 앞세워 성급하게 북벌을 강행한 것 또한 최영의 실책이었다. 이성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조를 창건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최 영 장군>. 최영은 전쟁에 나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장수. 한번도 뇌물 받는 일이 없었고 맑고 깨끗한 성품. 73세에 목 잘려 머리가 땅에 떨어져도 곧게 버텼다. 최영이 운명하자 고려 온 백성들이 슬퍼했다. 이성계의 집단 이기주의는 최영을 꺽는 데 성공. 그러나, 고려의 민심을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지리산은 그 곳 산세만으로는 풀 수 없는 한반도 사상의 산실. 한반도의 사상은 국경과 역사 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하여,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사상적 밑바탕을 파헤쳐보기로 하자. 지리산의 옛이름은 <불복의 산> 또는 <반역의 산> 이다. 그것은 이성계가 지리산을 그렇게 부른 데에서 유래된 이름. 명(明)이 일어나자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내고 국권 회복 조정 기반이 약할 때 홍건적과 왜구 침입으로 중용된 이성계 1388년 고려 우왕은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 명령 '이때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을 강행한 이성계.' 승산 없는 명나라 정벌 강행보다 쿠데타가 유리한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운다. 이성계는 자기 세력을 키운 후 1392년(공양왕 4)에 이조 창건. 이성계는 신라시대부터 계승된 골품제 악습을 청산. 아울러, 정권안정을 위한 과도기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조는 한양에 천도하여 옛 백제권의 민심을 수습한다. '원래, 한양은 백제의 도읍(위례성 부근.)' 백제 초기의 도성은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을 근거로 하여 건국. 전북 익산, 충남 직산, 경기도 광주 여러 설 중에서 광주가 유력. 위례라는 지명은 처음 온조가 남하하여 자리잡은 한강의 북쪽이다. 이조의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던 한양과 신도안. 두 곳 모두 우연히 백제 영역이라 보기엔 어렵다. '이조가 옛 백제권에 도읍을 정한 이유?' 태백산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 검룡소와 황지 못을 모두 품은 영산. 태백산 신단수를 단군 성역화한 것은 강원도 민심 수습책. 아울러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인 듯.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부른 이유는 옛 고려 민심을 경계. '옛 고려를 창건한 세력 바탕은 지리산 일대.' 하여, 이조 500년간 영남 유림들은 재야 세력에 머문다. 이조의 지지 기반은 한반도의 중부(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이조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지지기반이 아닌 곳은 탄압. 이조는 반발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해 정권 조기 안정에 성공한다. 이조는 무인 정치로는 민생 안정에 한계를 느껴 유림이 정권 장악. 하여, 이조 중기 문무세력의 갈등, 지역 감정, 사색 당파가 싹튼다. 고려는 견원의 후백제 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창건한 나라. 왕건은 5호 세력과 지리산 불교 민심을 바탕으로 정권 안정. 그 당시 한반도를 지배했던 사상은 유교와 불교가 양대 산맥. 이조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후 지지 기반이 불안정했다. 이조는 고려의 기반세력 사람들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았다. 특히, 고려의 도읍 개성인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반발. 하여, 이조에서는 개성인들 관직 등용을 철저히 차단. 훗날, 개성인이 한반도 상권을 장악하게 된 계기이다. 이조에서 관직에 오를 수 없어 상인의 길을 선택한 때문. 상권을 거머쥐고 옛 고려의 재건을 위해 이조 정권에 저항. 이조는 지지 기반이 취약한 고려(옛 신라 지역) 민심도 늘 경계. 지리산 일대의 500 여 사찰은 이조에 들어와 38 개 사찰만 남는다. 이조는 사찰을 없앨 구실을 찾으려 암행어사까지 파견해 감시. 이성계가 창건한 이조는 유교와 불교 양대 세력이 민심의 밑바탕. 그러나, 유교와 불교의 사상 대립으로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할 입장. 이성계는 민심 지지층이 두터운 유교세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여, 이 성계는 유교세력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무학대사는 불교 중흥의 숨은 뜻을 접고 이조 권력의 핵심에서 떠나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이조 왕국을 창건한 개국공신. 이조 역사 및 두 인물의 발자취를 통해 '반역의 산'에 대해 알아보자. 아울러, 이조가 불교문화를 탄압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도 파헤쳐보자. 이조는 창건 초기에 불교 포용정책을 쓰다가 이조 후반에 정책적으로 불교에 박해를 가한다. 이조를 창건한 밑바탕 주류는 유교사상을 추종하는 유림이었다. 이조는 유림 선비들의 붕당정치로 민생이 피폐해져 국운을 다한다. 국가의 장래보다 권력 다툼은 나라를 망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다.'지리 박물관(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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