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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력산행 妙香帶(묘향대) 하룻밤지리 산행기 2021. 6. 21. 09:57
# 언제: 2021년 06월 19-20일 토,일요일
# 산행지: 울력산행 妙香帶(묘향대) 하룻밤
# 산행거리: 0.0Km 00시간00분
# 산행루트: 폭포수골 - 묘향대 - 폭포수골
# 함께한 산우님 - 서울(현오님)외 - 경기도(몽화님)외 - 벌교, 사천, 목포, 등 여러 지억 산우님들과 함께 함?
# 妙香帶(묘향대) - 산중 절해고도의 수행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집이 있는 지리산 묘향대, 그곳을 찾아가기란 여간 녹록지 않다. 반야봉 자락의 깊은 산중에 위치해 찾아가는 길도 멀고 험하다. 그래서 묘향대는 뭇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반야 성지로 불리며 지리산 최고의 수행지로 알려져 있다. 묘향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아예 지리산 주능선에 올라서서 접근하거나 아니면 뱀사골에서 험한 계곡을 치고 올라야 한다.
그나마 편한 길은 주능선 상의 삼도봉에서 반야봉 북사면 허리 길로 접근하는 것이다. 아니면 반야봉으로 올라 반야중봉 정상에서 북사면을 타고 내려 접근할 수도 있다. 뱀사골에서 접근하려면 뱀사골 상부에서 폭포수골이나 함박골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길이 제대로 없고 험해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찾는 사람 많지 않은 마치 절해고도 속의 수행지 같은 묘향대다. 특히 겨울이 되면 묘향대는 고립무원이 된다. 한 번 눈이 쌓이면 길과 길 아닌 곳의 구분은 사라지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도 없을 만큼 온통 하얀 눈뿐이다. 그래서 한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일쑤여서 이곳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우리 접근로는 뱀사골에서 폭포수골이다. 폭포가 많아 폭포수골이라 불릴 만큼 가파르고 거칠다. 우리는 뱀사골과 폭포수골을 거슬러 올라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를 돌아보고 묘향대로 향한다.개운조사 머물렀던 반야성지 묘향대
반야봉 자락의 반야성지 묘향대, 병풍같이 늘어선 암벽 자락에 제법 넓고 편평한 조망 좋은 터가 있고 그 한쪽에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묘향대의 묘향암이다. 묘향암은 지리산 반야봉 북동자락 해발 1480m 고지에 위치한 은둔의 암자이다. 원래 사방 험로로 둘러싸여 인적조차 드문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리산 명소 중 한 곳이 돼 찾는 산객이 더러 있다.
묘향암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전부터 토굴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많은 도인들의 참선 수행지였다고 한다. 특히 죽음으로부터 해탈한 도인으로 알려진 개운조사께서도 한때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는데, 그는 지리산에서 182세까지 살다가 나뭇가지 하나 붙잡고 꼿꼿이 선 채로 열반한 전설적인 도인으로 산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지금의 암자는 1970년대에 화엄사 한 스님이 불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향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암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고색창연한 모습의 암자가 북향으로 고즈넉이 앉아있다. 오랜 세월 거친 풍우 속에 빛바래고 허름한 암자의 모습이 오히려 참선수행 도량으로서 이곳 형세에 더 조화롭게 어울려 보인다. 색이 바랜 양철 지붕도 올해 새로이 황금색으로 도색했다. 산중 오지에 번쩍거리는 황금색 지붕이 이채로워 보이고 암자 앞의 너른 잔디마당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조망 또한 멋지다. 앞쪽에는 명선북릉이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토끼봉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고스란히 조망된다.
암자 옆 암벽 아래에는 묘향대 명물 석간수가 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켜니 물맛이 깊고 청량하다. 험한 폭포수골을 힘들게 오른 후에 접하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의 묘향대, 일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런 곳이 길지가 아니면 어디이랴. 암자 옆 뜰에 수북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드는데, 어느 향수보다도 더 향기롭고 구수하다. 이곳 묘향암에는 호림스님이 십수 년째 지키고 계시는데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보니 스님도 지리산 산중의 혹독한 긴 겨울 날 채비를 이미 마쳤는가 보다. 오늘따라 속세로 출타하시는 스님, 스님도 여느 산꾼처럼 험한 길 내려가기 위해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있다. 탐방팀은 스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법당에 들러 예를 차린 후 앞뜰에서 한동안 여유를 가진다.
지리산에는 대(臺)라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을 일컬어 ‘지리 8대’라고 하거나 10대, 24대 등으로 부르고 있고, 한편으로 천왕 5대, 반야 5대, 혹은 7대 등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천왕 5대에는 통상적으로 영신대, 향적대, 문창대, 소년대, 향운대 등을 꼽고, 반야 5대에는 이곳 묘향대를 비롯해 우번대, 문수대, 서산대, 무착대를 일컫는다.
묘향대는 반야봉 정상에서 묘시 방향에 위치해 묘향대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지리산의 대(臺)는 통상 전망이 아주 좋고 높은 언덕이나 바위 자락에 위치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으로 꼽히는 곳들이다. 흘러간 역사 속에 각 대마다 나름의 사연들을 품고 있고 그곳에 들면 대부분 경관이 일품이다. 또한 좋은 기운이 흐르고 있어 탐방한 산객의 마음마저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곳이 지리산의 대(臺)이다. -퍼온글-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산행지도
# 산행사진
와운교
울력산행 배낭 짐 약 30Kg 마음속으로 걱정 아직 다친부위 완쾌되지 않해서...?
무거운 배낭메고 폭포수골로 올라갑니다
힘들도 즐거운 시간보내며
폭포수골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
"흔적"
속칭 호박돌 박힌 폭포에서 좌측으로 쳐 비트 앞쪽에 위치한다.
구들장 형태로 석축도 비교적 온전하다.
아랫부분은 돌을 쌓고 지붕은 수풀로 얽어매었을 것이다.
박영발 조선노동당 전남위원장을 호위했던 빨치산들의 감시초소였단다.
그들의 용어론 "호위대트" "비트" 에서 "비"를 빼고
환자비트는 환자트, 무기비트는 무기트 이런식이었다.
장기수로 복역 후 석방된 빨치산(박남진) 출신이
기억을 더듬어 이곳을 05. 2. 14.에 최초 찾았다.
아래 자료는 박영발비트 발견 경위 유품 등 관련 자료
1. 2005년 2월 14일
3회에 걸친 수색 끝에 박영발(1913-1954.2.21)전남도당위원장의 최후 비트를 발견했다.
어마어마한 바위 안에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다
밑으로 내려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하는 복층구조다.
이곳에서 '조국출판사' 라는 이름으로 각종 유인물들을 발행했다.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를 주로 사용했다.
이 동굴에서는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
그리고 여성비서를 제외한 일곱이 그곳에서 전사했다.박남진(54년 12월 체포)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5지구당 위원장이 빗점골에서 전사하자박영발 위원장의 보위대가 암벽 지대가 많은 반야봉 아래에 비트를 마련해
그 해 10월 말부터 다음 해인 1954년 2월 박 위원장 전사까지 약 4개월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했다.2. 2005년 5월 2일
'박영발 비트' 에서 50미터 쯤 아래 호위대트 옆에서 등사기를 발견했다.
1953년 9월 '제5지구당' 해체 이후 전남도당위원장을 내려놓은 박영발은
이곳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했다.
그 때 사용했던 등사기였다.박남진, 19살 때 결혼하여 1947년 나주시 영산포에서 서점 '우리서원'을 운영하던 중에
3살난 딸 아이와 임신 5개월째인 부인을 남겨두고
1950년 입산한 후 빨치산으로 활동, 조국출판사 필경사로 일했다.깡통에 담긴 검은 잉크, 부식되긴 했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등사기 본체 그리고 놋쇠 숟가락(당증이기도 했던)이 함께 바위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놋쇠 숟가락은 끝을 갈아 등사지에 글을 쓰는 철필로도 사용되었다.
아마 밥을 먹을 때 보단 철필로 쓰였던 시간들이 더 많았으리라..지금은 '전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등사기
무전 통신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전기줄
주인을 잃은 고무신과 스피커 등의 유품들
빨치산 부대원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용 앰플
암벽 사이 비트(천연굴)
비트입구 사다리
비트 내부 - 무전 통신용 전선이 온전하고 그 안쪽으로도 굴이 하나 더 있다. 입구 굴은 서너 명 생활이 가능한 공간이다.
공터, 비박터에서 서울팀과 합류
妙香帶(묘향대)
묘향대 석간수
힘든 울력 배낭 메고 妙香帶(묘향대) 도착해 주변 조망에 취하고
인생에 즐거운 시간 먹는 것 빼면 남는 것 없다 - 이른 저녁시간 - 산속 밤은 이찍온다...?
반야봉
현호님
고향은 장흥 사는 곳은 서울 에델님 오랜만에 뵙고 반가웠다
반야봉 낙조 - 반야봉낙조 해발 1,732m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뻗어 나가는 높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동북방5,5Km 지점 지리산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落照)의 장관에서 찾는다. 한낮의 창창하던 햇빛이 그 화려했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어둠속으로조금씩 조금씩 깊은 산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인간의 모든 번뇌와 마음, 그리고 악의 감정도 사그라들게 하며 세속에 찌든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곳이다.妙香帶(묘향대)에서 하룻 밤
妙香帶(묘향대)에서 하룻 밤
아침에 호림 스님 과 녹차 한잔
함께 한 산우님 과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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