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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통암(圓通庵), 원대성마을, 수곡골, 양진암, 은정대(隱井臺)
    지리 산행기 2021. 8. 16. 11:48

    # 언제: 2021년 08월 14일 토요일

    # 산행지: 원통암(圓通庵), 원대성마을, 수곡골, 양진암, 은정대(隱井臺),

    # 산행거리: 14.00Km  08시간00분

    # 산행루트: 의신 - 원통암 - 덕평능선(갈림길) - 원대성마을 - 대성주막 - 수곡골 - 양진암 - 은정대 - 원통굴 - 의신

     

    # 비 내리네

      산행전 오는 비 반갑지 않은 손님

      기상청 오전 에 비 그친다하니 산행하기로 하고

      걷기좋은 길 찾아

      서산대사(休靜휴정)길 루트 잡았네

      산행지 도착

      비 내리는 비 양 생각 보다 적다

      산행루트 변경 하여 산행 길 걷는다

      의신, 원통암, 덕평능선(갈림길), 원대성마을, 그리고 대성주막, 막걸리 한잔...ㅎㅎㅎ

      수곡골, 양진암, 은정대, 원통굴, 의신 원점회귀산행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원통암(圓通庵), 가는 길 걷다보면 수령 수백년 넘은 감나무,

     

     

     

    우중 산행하며, 원통암으로 들어선다.

     

     

     

    원통圓通이란 지혜로 부처님의 이치를 깨달은 상태를 말한다고 하니 이 문을 들어서며, 잠시 그 지혜를 얻고자 한다. 

     

     

     

    문 상단에는 서산선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자 이제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좇는 선문으로 들어선다,

     

     

     

    원통암(圓通庵)

    원통암은 지리산 덕평봉 아래 해발 600m 고지에 있다. [진양지]에는 옛날 의신사 일대의 31개 암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통암은 의신사의 수많은 산내 암자 중의 하나였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원통암이 자리한 곳에는 뒤로는 덕평봉을 위시해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등 지리산의 주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좌우로 화개골의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 땅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지리산 연봉처럼 보인다. 암자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나뉘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의 산자락이 된다. 원통무애다. 내남 구분 없는 통함이다.

     

    '원통무애(圓通無碍)'는 불교의 '십무애' 중의 하나이다. 암자 이름인 '원통(圓通)'은 '원통무애'에서 나온 말이다. [삼가귀감]을 통해 불가, 유가, 도가의 삼교융화를 원했던 서산 대사의 행적이 곧 원통이요 무애다.

     

    청허(서산) 대사의 행적을 적은 제자 경헌(1544~1633) 스님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15세에 장흥 천관사에서 출가하여 경․율․논을 섭렵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휴정과 함께 승군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선조가 좌영장에 명했으나 사양하고, 또 선교양종판사에 명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대사]이 있다.

     

     

     

    서산선문으로 들어서자 조경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스님의 깔끔한 성격을 대변해 주네...티끌 하나 없는 절집.

     

    그 절집 지리산 하고도 남부지리의 깊숙한 곳.

    그곳의 한 암자에 선종 제62조 서산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원통암圓通庵입니다.

    원통암이 바로 휴정 서산대사의 출가 했던 암자 입니다.

     

    서산대사의 출가지, 밝혀지다

    서산대사는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고, 금강산에서 보림을 했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다.

     

    원통암이 서산대사의 출가지라고 한 근거...?

    서산대사의 제자 중 경헌 스님이 있는데, 그 분이 남긴 [제월당집]에 보면 삭발한 곳이 원통암이라고...?

     

    서산의 제자 제월당 경헌(1544~1633) 스님의 [제월당대사집] '청허대사행적'에는 "숭인 장로에 의지해서 원통암에서 삭발했다.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삭발출가한 곳이 지리산 의신에 있는 원통암으로 밝혀졌다. 그때가 21세였던 1540년으로 보인다. 서산대사의 입장에선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밝히기는 어려웠겠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스승의 행적을 정확히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빌려온글-

     

     

    원통암에서의 조망

    정면으로 좌측에서는 지네능선이 흘러내려오고

    그 중앙에 호남정맥의 맹주 백운산1222.2m이 한눈에 조망

    그 우측으로 한재를 지나 따리봉1127m, 도솔봉1153.2m이 나란히 조망

    소박하게 내리는 비, 운무 속의 조망 아름다울 따름.

     

     

    원통암(圓通庵)

     

     

     

    최 상단에 있는 원대성마을 가옥

     

     

     

    암자 터

     

     

     

    원대성마을 가옥

     

     

     

    암자터의 절구의 흔적

     

     

     

    대성석문

     

     

     

    수곡골 맞은편의 아담하고 깔끔한 대성주막에서

    탁주 한 잔을 기울이고

    수곡골로 향한다.

     

     

     

    비 내리는 대성계곡(대성골) - 수곡골 접어 들기전

     

     

    대성골을 건너 수곡골을 향해 언덕을 넘어서며, 바라본 대성동 마을

     

     

     

    수곡골 분위기 풍광

     

     

     

    수곡골 - 수곡골은 지리산 영신봉과 삼신봉 사이의 남부능선, 깊고 깊은 험지에 자리하고 있는 계곡이며, 대성골의 지류이다.

     

     

     

    수곡폭포

     

     

     

    화전민터

     

     

     

    양진암에 오르기 전 양진암 앞 바위

     

     

     

    이 거대한 암벽위에 양진암이 있다

     

     

     

    양진암

     

     

     

    사면을 넘어 수곡마을터에 이른다. 폐허의 마을터, 곳곳에 남은 석축 만이 마을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켠에는 절구통이 나뒹굴고 있고

     

     

     

    마을터를 가로질러 오르며 은정대로 향한다.

    은정대 오르기전 거대한 암석 바위

     

     

     

    369년 전의 오두인(吳斗寅), 흔적을 찾아 수곡골 은정대(隱井臺)에 찾아 오르다. 오전 겨울비, 그리고 약간의 눈, 산행에 지장 없길 바라며, 목적지인 의신마을 출발, 고속도로 달리는 동안에도, 비,눈 내린다. 그런데 산행 시작 목적지인 의신마을 도착 전혀다른 날씨다. 화개동천의 끝 마을 의신, 아침 공기부터 다르다. 냉기 속에 청량함이 묻어난다.

    오늘은 조선중기의 선비, 오두인(1624~1689)이 올랐던 수곡골과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은정대(隱井臺)를 찾아 떠나본다.

     

    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頭流山記 南臺寺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본관이 海州, 호는 陽谷,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父는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648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1651년 공무로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11월 1일~11월 6일까지 5박 6일 동안 경상우도의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의 유람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1년 오두인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 오숙(吳䎘)이 화개동천과 불일암을 유람하였고, 1647년 계부(季父:막내숙부) 오핵(吳翮)이 다녀갔다. 이 세 사람은 특이하게 불일암에서 옥소암과 영대암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왔다. 1647년 이곳을 유람한 계부(季父) 오핵(吳翮)은 불출암과 쌍계사 사이 계곡 바위에 장원암이라는 시를 묵서(墨書)로 남겼는데, 5년 후 오두인이 이 묵서를 발견하고 화답 시를 읊었다고 한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의 앞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청학봉은 비로봉(백학봉)을 가리킴. 우선(羽仙) : 오숙(吳䎘,1592~1634)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유람 일정은 1651년 11월 1일 진주 관아를 출발하여 옥계사에서 자고, 11월 2일 악양을 거쳐 쌍계사에 도착, 11월 3일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원을 둘러보고 쌍계사 적묵당에서 자고, 11월 4일 아침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거석교 -홍류교(삼신동 각자)-신흥사터-능파각(세이대)-사자곡을 지나 기담(妓潭)에서 쉰 후, 능인사(能仁寺)에서 점심을 먹는다. 저녁 무렵에 능인사(能仁寺)를 출발하여 은정대(隱井臺)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11월 5일 은정대(隱井臺)를 출발하여 수국현(水國峴)넘어서 거림으로 내려가 남대사를 거쳐 신계촌에서 유숙하고, 11월 6일 신계를 출발하여 덕천서원에 들렀다가 진주 관아로 돌아갔다. 이때 오두인과 동유(同遊)한 일행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의 이름을 은정대(隱井臺)은정(隱井)의 바위벽에 새겼다. 이 성명의 석각이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 의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 관련 발췌

    1651년 11월 4일 <중략>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學僧) 담희(淡熙)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井臺也。菴在絶頂。去塵宸最遠。經僧淡熙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 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     -빌려온글-

     

     

     

    옛적, 이곳에는 은정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람에 나선 오두인 일행이 하루밤 머물기고 했고...?

     

    오두인(1624~1689)은 조선조, 인조에서 숙종조에 걸쳐 고위 벼슬을 한 선비로 사헌부 지평을 거쳐 경기도관찰사와 공조,형조판서를 지내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자료에 의하면, 그가 젊은 시절인 1651년 11월1일부터 11월6일까지 5박 6일간, 지리산 유람을 하고 산행기인 '두류산기(頭流山記)'를 남겼다. 두류산기는 그의 저서 양곡집(陽谷集)에 실려 있다. 그는 경상우도 지역, 재해 시찰을 마치고, 진주목사와 하동태수 등을 대동하고 평소 꿈꾸던 지리산 산행에 나섰다. 진주관아를 출발하여, 하동을 거쳐 쌍계사,불일폭포 일대를 돌아보고 대성계곡, 수곡골을 통해 남부능선을 넘었다. 그리고, 자빠진골을 통해 거림,내대로 하산, 덕산을 거쳐 진주관아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들이 은정대에 하루 묵으며 암자 뒤 바위에 일행들의 이름을 나이 순으로 새겼는데...

     

    김정, 이상일, 이진필, 오두인, 김집 등 이다. 당시 일행들의 면면은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사헌부 지평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 이었다.

     

     

     

    은정바위에는 오두인 일행의 이름을 새긴 각자도 보인다.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에 나오는 은정암과 오두인 일행들의 성명 석각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은정(隱井)/샘

     

     

     

    언제나 이 자리를 지키는 노송

     

     

     

    원통굴(圓通窟)

     

     

     

    소나무 연리지

     

     

     

    대성동길 등로에서 바라본 단천지능, 지네능선, 광양 백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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