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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세개골, 영신대, 칠선봉, 선비샘, 덕평남릉, 좌선대, 오토바이능선지리 산행기 2022. 7. 3. 13:40
# 언제: 2022년 07월 02일 토요일
# 산행지: 큰세개골, 영신대, 칠선봉, 선비샘, 덕평남릉, 좌선대, 오토바이능선, 지리 의 폼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7.3km 09시간 48분
# 산행루트: 의신마을 - 큰세개골 - 영신대 - 칠선봉 - 선비샘 - 덕평남릉 - 좌선대 - 오토바이능선 - 의신마을
큰세개골
큰 대성골(세개골)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오랜 옛날부터 기도처로 소문이 자자하여 대성골 가장 깊숙한 자리에 위치한 영신대(靈神臺)는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로 통한다.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린 제단과 좌대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한다.
큰세개골 산행난이도 - 고급
큰세개골 : 물줄기가 영신봉 주변에서 시작되고 대성폭포가 있음
나바론계곡 : 물줄기가 영신봉과 창불대 사이에서 시작되고 매우 협곡임
나바론계곡우골 : 매우 협곡이며, 직벽이 많고 물이 적으며, 등산하기 매우 힘듬
창불대-자살바위 : 낙남정맥1구간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 배경이 매우 아름다움
음양수샘-음양수골 : 마른 너덜지역이 대부분이며, 하류지역에 물이 조금 흐름
음양수골 : 물줄기가 음양수샘 주변에서 시작되며, 마른너덜지역이나 등산하기 좋음
대성골은 지리산의 영신봉과 칠선봉의 남쪽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새양골, 대성골, 수곡골이 합쳐 대성계류가 되어 크고 작은 폭포수와 소를 만들며 의신계곡의 계류와 함께 화계천으로 이어져 내리는 지리산에서도 이름있는 깊은 계곡이다.
영신대(靈神臺)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곧 영신대이다.
지난날 영신사란 사찰이 자리했던 이 곳은 영신봉(1,651m) 바로 남쪽 사면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인생은 한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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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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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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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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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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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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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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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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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ㅤ# 산행지도
요즘 들어 주말날씨 오늘처럼 파란 하늘에 멋지고 아름다운 구름의 조화에 더 쾌청하고 시야도 좋다.
역시 지리 의 품속 폭염으로 더운 날씨인데, 온몸에 상쾌한 기분으로 엔돌핀을 만들어준다.
주변 시야에 촉촉한 길과 싱그러운 수목도 분위기를 돋운다.
화개천 지류를 따라 의신마을에서 신흥마을로 1㎞에 이르는 선유동(仙遊洞)은 바위와 나무가 조화롭고 은밀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은거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최치원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이 있고, 그가 은거했던 곳을 이르는 삼신동(三神洞)을 새긴 바위도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설 때 꽂아놓고 간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고 전해지는 푸조나무도 우뚝하다.
# 산행사진
삼신동(三神洞)
지명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신(神) 자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영신대(靈神臺), 신흥사(神興寺), 의신사(義神寺)에 모두 신(神) 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삼신동(三神洞)이다. 삼신동이라는 이름은 고운 최치원이 붙여놓았다.
삼신동(三神洞)각자
하동범왕리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을 내어 자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며 나도 살아 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세이암(洗耳岩)
「세이암 전설」은,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의 의신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을 따라가면 절벽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라 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여기서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의신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에는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洗耳岩)이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
의신 지리산역사관
하동 의신마을 지리산역사관은 화전민 생활을 시작으로 빨치산, 우리 고장 안내로 끝나는 작은 전시관이다. 털옷에 곰방대를 문 화전민 사진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동군 화개면에 위치한 지리산 역사관은 지리산에 얽힌 고단한 삶들을 기리는 곳으로, 총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실은 지리산 깊은 숲 속에 불을 내어 밭뙈기를 일구며 살았던 화전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에는 6.25 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전쟁에 관한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는 다양한 총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갔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동안 현재의 무탈함에 안도하게 된다. 지리산을 이고 있는 듯한 역사관 주변의 모습이 아름답다.
함께한 산우님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대성리의 중심 마을로 화개에서도 사찰이 가장 많았던 불교의 요람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의신사, 의신 암자에서 도를 닦은 의신조사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신 윗마을 삼정은 삼각등, 말안장터 등 세 곳의 길지가 있어 이곳에 묘를 쓰면 세 사람의 정승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삼정 혹은 삼점이 되었다 한다.
남부쪽 조망
멀리 광양 백운산을 보고
화개동천에 맞대어
좌론 그 악명높은 지네능선이
우론,
멀리 불무장등이 화개장터에 닺는
황장산 끄트머리가
앞으론 범왕능선이 치달아 내리고
소나무 연리지
원통굴(圓通窟)가는 길
길을 걷는다.
어제 걸었던 그 길 오늘도 걷는다
어느 날은 눈이 내렸고
어느 날은 비가 내렸다.
오늘은 꽃이 피였고 아침 햇살이 눈을 부신다
간밤에 작게뿌린 비탓에
무척 맑고 산뜻한 아침이다.
언제 까지 이 길을 걸으려는지는 모른다.
그날이 비록 내일이 될지라도
나는 오늘 이길을 걷는다
언제 까지나 꽃길일수는 없지만
그딴거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이 좋다.
원통굴(圓通窟)
언제나 이 자리를 지키는 노송
대성동 대성주막
대성동 대성주막 대성동마을은 이곳에서 1km 정도 더 들어간 산골에 원 대성마을 있었는데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정부에서 마을을 산 아래로 내려오게 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오는이 가는이 잠시 발을 내려놓고...ㅎㅎㅎ
탁배기 한잔 기울리며 쉼을 하는 곳
오늘은 탁배기 한잔 기울리지 못하고 식수 한잔 기울리고 깊숙히 지리 의 품속을 걷는다.
문바위
문바위를 들어서면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옛 어른들은 말 했다 전해 내려곳...ㅎㅎㅎ
원 대성마을 이정표쉼터에서 첫 휴식 타임 종생 형님께서 블루베리 최고 였습니다...ㅎㅎㅎ
원 대성마을
많은 집터가 있다. 이곳이 원대성마을...
이곳에 살다가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정부에서 대성마을로 이주시켰는가 보다.
작은세개골 들머리 첫번째 철교 - 의신마을 3.9km/세석대피소 5.2km
작은세제골을 계속 오르면 선비샘골 합수부가 나오고 계곡 합수부 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심한 너덜길이 계속되는데 이곳을 오르면 칠선봉으로 오를수 있다.
두번째 철다리 지점인데 이곳이 큰세제골 입구, 세석대피소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오면 시원한 계곡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대부분 등산객은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세석대피소를 오르시는 분들도 이곳을 벗어나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땀을 식히고 오르는 장소...
큰세개골
큰 대성골(세개골)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오랜 옛날부터 기도처로 소문이 자자하여 대성골 가장 깊숙한 자리에 위치한 영신대(靈神臺)는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로 통한다.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린 제단과 좌대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한다.
큰세개골 물 수량 풍부한 오지 계곡 위용을 자랑한다.
큰세개골 초입 부근의 와폭
큰세개골 계곡의 풍광 또한 뛰어나다.
큰세개골 & 우측 창불대골 갈림길
창불대골 아름다운 폭포 풍광 벗삼아 단체사진...ㅎㅎㅎ
큰세개골 풍광을 즐기며...ㅎㅎㅎ
큰세개골 협곡 지대
와우 대성폭포 다...대성폭포 하단부
큰세개골의 터주대감, 대성폭포
거대한 암사면이다. 120m에 이르는 대폭인데...수량이 풍부하다...
대성폭포 하단부
대성폭포 중단부 멋진 풍광이다.
대성폭포 좌측의 암봉
대성폭포의 최상단 폭포
폭포 아래 미려한 통암반이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편평하고 널찍한 폭포 조망암반이 딱 버티고 있다.
정말 멋진 지형지세이다. 자연히 산객을 자석으로 이끌듯 끌고와 앉게 만든다.
대성폭포 상단의 쉼터, 조망암반
대성폭포 위 큰세개골 풍광
나바론골 합수...대성폭 최상단에서 10여분 오르면 우측에서 나바론골이 흘러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영신대 바로 아래 좌우 합수부 우측골이 천국의 계단이다. 등로는 우골, 천국의 계단 초입 폭포의 좌측사면으로 이어지는데...천국의 계단을 오르려면 가로막은 폭포를 바로 타고 올라야한다.
영신대로 바로 오르는 큰세개골 풍광, 우린 영신대로 고고싱
나바론골 초입의 수문장 직폭,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나바론골 수문장 직폭을 올라야 천국의 계단을 갈수있다.
나바론골 수문장 직폭에서 잠시 쉬고 큰세개골 영신대로 걷는다.
영신사(영신대) 아리왕탑 위치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4월 5일 갑술일. <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영신사(영신대)기와 와편
영신사(영신대) 옥천
영신사 터
유람록에 대부분 영신사를 경유해가거나 숙박을 하고간다.
김종직 선생과 유몽인 선생은 이곳을 경유해가면서 주변을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8월 17일, 신사일(양력 9월29일)
(전략)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頭陀第一(두타제일) 두타 제일이
是爲抖擻(시위두수) 이것이 두수인데
外已遠塵(외이원진) 밖으로는 속세를 멀리하였고
內已離垢(내이리구) 안으로는 마음의 때를 벗었구나.
得道居先(득도거선) 앞서 도를 깨치고
入滅於後(입멸어후) 뒤로 적멸에 들었으니
雪衣鷄山(설의계산) 설의와 계산이
千秋不朽(천추불후) 천추에 썩지 않으리라.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
○유몽인_유두류산록 1611년 4월 5일 갑술일(양력 5월16일)
(전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 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영신사(영신대)터
함께한 산우님
석가섭
영신대에 숨어있는 마하가섭 이야기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다보면 빈발암, 가섭전, 영신암이 등장한다. 빈발(賓鉢)은 가섭(迦葉)이 출가하기 전의 속명 핏발라(Pipala), 가섭(迦葉)은 출가 후의 법명 가사파(kā-śyapa)를 음차하여 한역한 것이다. 영신(靈神)은 가섭이 열반에 들기 위해 선정(禪定)에 들어간 후의 이름이다. 빈발(賓鉢)과 가섭(迦葉), 영신(靈神)은 마하가섭(Mahākā-śyapa)의 출생과 출가, 적멸(寂滅)의 시점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한다. 가섭의 출생부터 적멸까지의 이야기가 세석평전과 영신대에 담겨있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촛대봉은 빈발봉으로, 영신봉은 계족봉으로, 영신대에 영신암과 빈발암, 가섭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해당 안평대군이 영신암 법당에 있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 족자에 쓴 찬(贊)을 읽어보면 이해가 쉽다. 요약하여 말하면 마하가섭존자가 설의 계산(계족봉) 아래 영신대 바위 속에 깃들어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가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蒙山畫幀迦葉圖贊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의 비해당 贊)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道(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 雞山 : 계족산 영신봉을 가리킴.
인도의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吒播陁山:Kukkuṭapāda-giri)이 있다. '꿋꾸따'는 '꼬꼬댁'하는 닭울음 소리의 의성어이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빠따(pāda)'는 발(足), 기리(giri)는 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산의 모양이 닭 발의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석가섭은 '마하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미래에 오실 미륵불께 전하기 위해 꿋꾸따빠다산(계족산)의 바위 동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계족산으로 한역(漢譯)되었고, 인도에 있는 계족산을 지리산 영신대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마하가섭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영신대 바위 속에서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영신대는 미륵신앙의 성지인 것이다.
2017년 석가섭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최석기 교수님의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에 대하여(遊頭流山紀行篇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고시(176韻, 352句, 2516字)를 남기는데 석가섭을 이렇게 노래한다. '천 길의 가섭상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나는 황준량의 시를 읽고 2017년 9월 3일 영신대에서 가섭의 형상을 보았다. 햇빛에 드리운 바위가 가섭이 깃든 자연불(가섭상)로 보인 것이다. 이후에 여러 차례 영신대를 찾았으나 가섭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10월 25일 아침 영신대 석문 기도터를 지나 암봉 위에서 영신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마음의 문을 열면 석가섭의 형상을 친견(親見)할 수 있다. 이 위치는 점필재가 창불대에서 영신대 석문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의 암봉에 있다. 창불대에서 영신암으로 내려오며 석가섭을 보고 석문을 통해 영신대로 들어온 것이다.
김종직의 영신암 시 1연 '전괄(창불대)과 거상(나바론계곡)을 둘러보고 돌아오니/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는 치(觶)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부도를 닮은 비로봉
영계(靈溪)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기도처 가는 석문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기도처
영계(靈溪) 아래 조망처
칠선봉 해발1.552m
선비샘 가는 길
선비샘
선비샘 유래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의 한 기슭인 덕평마을에 이씨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씨 노인은 불우한 시골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얼굴마저 추하게 생겨 사람들은 모두 이씨를 모두 멀리하며 홀대(忽待)하였다.
이씨 노인은 못생긴데다가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며 단 한번만이라도사람 대접을 받으며 선비처럼 고결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식하고
외모가 추하게 생긴 이씨 노인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으며 자기를 찾아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던 중 이씨 노인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인네를 만나 두 아들을 두게 되였다.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씨 노인은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가난을 면치 못했으며 사람들로부터 항상 냉소와 천대 속에 살았다.
이씨 노인은 이렇듯 뜻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고생으로만 연명하다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이 때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산에서 샘물을 마시면서 항상 샘터에 합장을 하는 것을
보아왔던 이씨 노인은 죽어서나마 공경을 받고자하는 생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씨 노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상덕평 샘터 위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장사 지냈다.이씨 노인을 장사지낸 후 상덕평 샘터를 찾은 지리산 등산객들은 샘터에서 물을 마신 후
항상 샘을 향하여 합장을 하니 이씨 노인은 평생에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었던 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된 것이다.
후일 이러한 내막을 안 마을사람들은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하여이 샘을 선비샘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좌선대 움막
덕평남릉 좌선대
오토바이능선 & 덕평남릉(도덕봉) 갈림길 & 오토바이능선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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