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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선계곡, 천왕봉, 제석단
    지리 산행기 2022. 7. 11. 12:36

    # 언제: 2022년 07월 09일 토요일

    # 산행지: 칠선계곡, 천왕봉, 제석단,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5.7km   09시간17분

    # 산헹루트: 다샘펜션 - 인민군사령부터 - 창암사거리 - 백무(칠선)사면길 - 칠선폭포 - 대륙폭포 - 좌선폭포 - 삼천폭포 -

                       칠선계곡(등산로) - 마폭포 - 철계단 - 주능 - 상봉(천왕봉) - 통천문 - 호구당터 - 제석봉 - 제석단 - 코끼리바위                       주능 - 소지봉 - 창암능선 - 창암사거리 - 망바위 - 다샘펜션(원점회귀산행)

     

    지리산 천왕봉을 기준으로, 북사면으로 마천까지 장장18km의 길이로 길게 누워있는 칠선계곡은 험준한 지형과 수려한 계곡미로 지리산을 대표하는 계곡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계곡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천불동계곡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계곡중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 여느계곡과는 달리 칠선계곡의 숲은 전쟁전후에도 훼손되지 않아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으로 불리워진다.

     

    천왕봉을 기준으로 초암능선과 창암능선사이 골짜기들의 물길이 모두 합쳐져 칠선계곡을 이룬다고 보면되는데, 천왕봉 바로 아래쪽 칠선본류를 형성하는 마폭좌우골,하봉자락에서 발원되는 대륙폭포골 그리고 제석봉자락에서 흘러내린 제석봉골...이 세개의 물줄기가 합해져 칠선계곡의 물길로 이어진다. 

     

     

    천왕봉  해발 1.915m  위치 : 전남 구례군 ,  전북 남원시,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 천왕봉

     

    1967년12월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산으로 그 넓이가 4백84㎢, 1억4천평이 넘는 면적으로 계룡산의 7배, 여의도의 52배쯤 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활처럼 굽은 25.5km의 주능선은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칠선봉, 촛대봉, 천왕봉 등 1천5백m가 넘는 봉우리만도 16개나 이어진다.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에 접하고, 북쪽으로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명실공이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


    한국인의 기상이 발원되는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때로는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칠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반야봉, 노고단 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천왕봉 정상에는 지난 82년 경상남도가 세운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 「智異山 天王峰 1915m」, 후면에는「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세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스러운 모습을 하며 인간을 자연으로 부르는 천왕봉은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을 빚어내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천왕봉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기라도 하듯 뭇 인간들을 그냥 보내지를 않는다.


    우리민족의 영산(靈山)인 지리산 천왕봉

     

     

    칠선계곡(七仙溪谷)

    지리산 최대의 계곡미를 자랑한다.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탕에서 천왕봉까지 장장 16km에 이른다. 들어가면 갈수록 골은 더욱 깊고 날카로워, 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하여 숱한 생명들을 앗아가 "죽음의 골짜기"로 불린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등반하고 싶어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칠선계곡의 등반로는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9.4km 계곡 등반의 위험성 때문에 상당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반로를 벗어나서 마음놓고 발길을 둘 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을 출발하여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에서부터 주지터, 추성망바위,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선경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제석단(帝釋壇)

    주변에는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帝釋壇) 흔적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제석당 이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제석단 길은 과거에는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이였다고 한다.

    제석단은 해발 1천7백미터의 고지인데도 제석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야영지로 손색이 없는 양지바른 명당이다.

     

    이동항(방장유록) - 1790년에 쓴 옛산행기를 보면

    제석당 판잣집이었다. 그곳에는 얼굴을 희게 칠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돌부인을 모셔 놓고 있었다.

    제석당 옆에 있는 샘물에서는 찬 물이 돌 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물 성질이 매우 셌다. 그것을 그냥 마시면 금방

    배가 아팠다. 그래서 솥을 걸고 물을 끓여서 각자 마른 목을 축였다.

               

    1610/ 박여량

    제석당 뒤에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지리산

     

    백두대간 끝자락

    꿈꾸듯 찾아든 지리산

     

    그 장대한 능선에 서서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저 민초들이 숨 쉬는 들판을 보면서

    한 굽이 돌 때마다

    긴 한숨 몰아쉰다

     

    면면이 이어온 역사가 있고

    켜켜이 쌓인 사연과 더불어

    온갖 상처가 배여 있는 곳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추기고

    떡 한 조각에 허기를 면하며

    걷고 또 걸으며

    숨져간 젊은이들의 영혼을 달랜다

     

    그리고 내일은 밝으리라는

    여명을 기대하며 걷는다

    천왕봉 그를 향해 걷는다

     

    지리산의 의미를---

    오늘에 사는 의미를 새김질하며 걷는다

     

    이제 상처를 씻고

    내안의 아픔을 훑고

    어리석음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빌고 다짐하며 걷는다

     

    오늘 우리가 걷듯

    내일은 또 다른 젊은이가 걸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늘 그래 왔듯이

    내일도 모래도 지리산은 영원하리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다샘펜션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217-1

     

    백무동(白武洞)

    백무동이란 이름은 무속에 관한 풍습이 많은 곳으로 백무동은 천왕성모와 8딸이 관련된 전설이 있다. 각각 8도를 다스리는 무당이 된 천왕성모의 8딸 그중 셋째 딸은 하동에 정착해 100무당을 배출했고 전국 무당의 우두머리가 천왕봉 성모사를 받들기 때문에 옛부터 많은 기도객이 붐비는 곳이다.그래서 원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이라 불렀고 다른 뜻으로 백무(白霧)는 안개가 많은 마을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빨지산 인민군 총사령부 터 - 이곳을 한국동란전후로 인민군들의 사령부 막사터로 사용했다고 한다.

    1948년 여순반란 병력과 좌익세력이 제2병단 지리산 유격대를 결성하여 6.25한국전쟁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 1953년 8월 병단장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 수년 간 토벌대와 빨치산과의 전투시 빨치산 총사령부를(인민군총사령부) 설치하여 작전을 지휘한 곳이다. 그나마 안내문이 있어 여기가 그긴 줄 알지 없다면 어찌 알겠는가? 그 무성의함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해야겠다.

     

    당시 정황이나 기록을 보면 여긴 인민군총사령부터가 아니었다. 안내문도 제목을 인민군총사령부터라고 붙였지만 내용은 빨치산 지휘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남인민유격대는 총 4차례에 걸쳐 편제를 다시 하였는데 1950년 10월 10일 3차 편제 때 여기 백무동에서 197명의 인원으로 사령부 예하 102대대를 조직했다고 나온다. 그러니까 이 고점동 마을은 경상남도 인민유격대 제102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인근 4개 봉우리에서 사방을 관찰할수 있는 천혜의 아지트이며 현재까지 주변에 40여개의 막사 터가 발견되어 당시 총사령부기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고점동 마을

    고점동은 옛날 가락국시대에 무기를 만들던 마을로 가락국이 망한 이후로는 농기구를 만들다가 1969년 정부의 소개로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었다는데 당시 약 40호였다고 한다. 40호면 산골마을 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 에는 이 사람들이 경작했음직한 논과 밭들도 꽤 있었고 안내문도 일부 남아 있었다. 

     

    소설 두만강에 보면 조선 사람들은 바위 위에서도 벼농사를 짓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서도 인간의 놀라운 생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밭은 물빠짐이 좋아야하고 논은 물이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산골에서 물이 빠지지 않도록 해서 논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했을까? 손바닥만한 논배미 만들려고 개천 옆에 높다랗게 쌓아올린 축대를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이곳의 논들도 그에 못지않은 노력이 들어갔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락국의 무기제작소터

     

     

    창암능선 사거리

    창암능선에서 칠선폭포까지는 완만하게 사선으로 형성된 길이 오십분가량 이어진다.

     

     

    칠선폭포 - 칠선계곡의 얼굴마담격인 칠선폭포

     

     

    함께한 산우님

     

     

    칠선폭포 전설

    그 엣날 멀고도 먼 그 엣적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옥황상제를  모시던  일곱 선녀가 천하의 제일경인 지리산을 구경하고 칠선폭포에서 목욕을 하려고 날개옷을 입고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데흑심 많은 곰이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서 감출곳을 찾다가 나무가지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숫 사슴의 뿔이였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하늘로 오를려고 벗어둔 날개옷을 찾았지만 옷이 없어서 안절부절 할적에 맘씨 착한 사슴이 뿔에걸린 옷을 갔다주자 감사히 여기고 자초지정을 들은 선녀들이 맘씨 착한 사슴들이 곰들로 부터 보호받고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살수 있도록 곰들을 넘어 골짝인 국굴로 쫒아버렸다. 합니다...?

     

     

    칠선폭포 상단

     

     

    칠선계곡 비비추

     

     

    대륙폭포

    지리산 최고의 기감을 자랑하는 대륙폭포, 오늘도 역시, 쌍으로 허연 물줄기를 연신 토해내고 있다.

     

    폭염속의 날씨에 폭포의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한순간에 앗아간다.

     

    늘 볼때마다 울림이 있는 폭포다.

    경이감이 느껴지는 폭포의 기운을 만끽하며 폭포 아래 전을 펼치고 잠시 쉬어간다.

     

     

    대륙폭포골을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칠선골을 오른다.

    잠시 식혔던 몸도 이내 달아 오르고 땀이 등짝을 흠뻑 적신다. 

     

     

    땀 한번 쏟고나니 삼층폭포다. 

    상단은 부드러운 와폭, 중단폭은 소가 아름다운 

    두줄기 쌍폭이며 하단은 아담한 직폭이다. 

     

     

    삼층폭포

     

     

    ㅡㅇ

    절구통 바위

     

     

    마폭포

     

     

    암반에 밥자리를 펼치고, 분위기를 반찬삼아 오찬을 가진 후,

    한동안 여유를 갖다가 천왕봉을 향해 가파른 능선 등로에 첫발을 디딘다.

     

     

    주목

     

     

    몇아름이나 되어 보이는 주목은 천년은 됐음직해 보인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더니, 거죽만 남은 노거수 주목도 버티고 있고...?

    이 지역에는 유독 주목이 눈에 많이 띈다. 

     

     

    가파른 오름길에 땀은 비오듯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아름드리 노거수 고목 등,

    자연이 주는 경외심에 산행 피로감은 반감된다.

     

     

    철계단 -  중력을 극복하고 가파르게 오름길 걷는다 상봉(천왕봉)으로 고고싱

     

     

    천주,天柱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일월대(日月臺)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상봉(천왕봉) 해발 1.915m

     

     

    통천문(通天門)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인 통천문(通天門)..!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하지 못한다’했던 이 수직암굴...!

     

     

    주능길을 걷다가 호구당터 제석봉, 전망대를 찍고

    고사목지대를 가로질러 제석단, 코끼리 바위 쪽으로 향한다.

     

     

    호구당(虎口堂)터

    통천문과 제석봉 사이에 안온하고 호랑이 입을 닮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움집 형태인 반지하...
    출처 : 지리산 백무동_최석기

    <하익범_유두류록 1807년>
    향적사 옛 터에 이르러 조금 쉬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 명의 남녀가 돌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에 올라 오 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오 리를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

    역참은 사람의 왕래가 활발한 교통의 요지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정황상 하익범이 말한 향적대 주변 능선상에 호구당 역참은 장터목이다.
    박래오는 호귀당이라고도 불렀다니 호랑이한테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한 곳이 아닐까?

     

     

    제석봉  해발 1,808m

    제석봉은 높이가 1,808m로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연봉 천왕봉은 동 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한층 유명 하다. 이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예전엔 고사목이 10만그루나 되었다는데,

    지금은 간간이보이는 고사목에 자라나는

    어린 구상나무들.

     

    제석봉 일대 약33만m²는

    나무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로 숲이 울창 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에고자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이르도록

    나무는 몇그루 되지않는 고사목 지대다.

     

     

    제석단에서 단체사진

     

     

    제석단각자

     

     

    코끼리 바위

     

     

    창암오거리

     

     

    망바위를 올라보지만 가득찬 운무로 시계는 그렇게 좋지 못하고..

    눈앞 움푹패인 칠선골의 깊은골짜기와 운무에 가려버려 보이지않는 마폭좌골과 상봉을 눈가늠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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