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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2년 08월 14일 일요일
# 산행지: 대성골, 수곡옛길, 여름 피서산행. 지리 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7.00km
# 산행루트: 대성골 - 수곡옛길
대성(大成)골
이곳은 화개동 계곡을 지나 계속 오르다가 대성교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오르면 빗점골(이현상 유적지)이고, 오른쪽으로 꺾어 대성리 쪽으로 오르면 나타나는 계곡으로 1952년 1월 17일경 소위 백야전(白野戰) 전투사령부의 제3기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 사면초가 격으로 포위당한 빨치산 수백명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피의 골짜기 이기도 한다.주능선에 이르는 등산로는 세석고원과 영신봉의 2가지 코스가 있는데, 두 코스 모두 의신마을에서 출발해 대성리~작은 세개골(원대성마을)~큰 세개골까지는 동일하며, 세석고원은 계속해서 음양수샘~세석 입구에서 거림골 코스와 만나 세석고원에 이르고, 영신봉은 곧바로 좌측으로 빠져 계곡을 따라 올라간 후 대성폭포~영신대를 거치는 코스이다.
영신봉의 남쪽에 펼쳐진 이 대성골은 설악산의 산세(山勢)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양쪽에 암벽이 내리꽂히면서 깊숙하게 이어진 협곡으로서 지리산의 어느 계곡에도 뒤지지 않는 장쾌하고 웅대한 규모인데, 지리산 마지막 비경인데다 인적마저 없다보니 마치 무릉도원 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대성골에 거목이 없는 이유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일단 지리산에 들어서면 어설픈 미적 감각은 천박해진다. 어설프게 멋을 부린 것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나무는 나무대로 원시림을 이루고, 계곡은 계곡대로 거침이 없다. 거기다가 울창한 숲은 숲대로, 크고 작은 돌은 돌대로, 야생화는 야생화대로 자기자리를 지키면서도 서로 행복한 조화를 이룬다.
대성골을 따라 오르는데 물소리 청아하고, 새소리 경쾌하다. 대성동에서 30분 이상을 올라서야 원래 대성동 마을이 있었던 원대성에 도착한다. 원대성의 주민들은 1968년 울진·삼척지구 간첩침투사건 이후 전국의 화전촌을 산 아래로 내려오도록 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현재의 대성동마을로 이주하였다.
원대성을 지나자 작은세개골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른다. 작은세개골에서 큰세개골로 오르는 지역은 지리산의 다른 곳보다는 현저하게 크기가 작은, 사람 허벅지 크기의 활엽수가 정갈하게 자라고 있다. 거목이 없는 이곳 숲에 얽힌 사연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에서 토벌군에 쫓긴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인 대성골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 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 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주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여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실록 정순덕> 상권)
다리 두 개를 건너고서야 큰세개골을 만난다. 큰세개골 다리를 건너자 10m 정도 되는 와폭 두 줄기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포효를 한다. 폭포수 소리를 듣고있노라니 빨치산 대원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그 때의 그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늦게 핀 쪽동백만이 폭포의 절규에 귀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큰세개골로 접어들자 사람의 통행도 거의 없는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다. 계곡은 장맛비에 무너지기도 하였지만 스스로 회복을 해 가고 있다. 수백 년 된 고사목이 계곡가에 넘어져 푸른 이끼의 서식처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아, 이 원시의 멋.' 태초에 산이 있었고, 거기에 골짜기가 있었다. 나무와 풀이 있었고, 돌과 물이 있었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포근하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 세파에 찌든 가슴이 말끔하게 씻겨지는 것도 그 속에 담겨있는 원시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산은 항상 어머니의 품속 같다.
대성골 :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덕평남능, 남부능선 주변 계곡 물줄기가 합수됨
대성골 : 큰세개골, 작은세개골, 나바론계곡, 음양수골, 세양골, 수곡골, 선비샘골 이 합수됨
큰세개골 : 백두대간 영신봉 주변에서 발원되며 나바론계곡, 음양수골이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작은세개골 : 백두대간 칠선봉과 덕평봉 주변에서 발원되며 선비샘골이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나바론계곡 : 백두대간 영신봉 주변에서 발원되며 좌우골이 큰세개골로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음양수골 : 음양수샘에서 발원, 좌골은 창불대 주변에서 발원되어 큰세개골에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세양골 : 지리산 남부능선에서 발원되며 계곡물이 매우 깨끗하고 좌우골이 합류되어 대성골에 합수됨
수곡골 : 지리산 남부능선 약1,240m 주변에서 발원되며 대성주막 주변에 합수됨. 계곡에 양진암이 있음
선비샘골 : 선비샘과 덕평봉 주변에서 발원되며 여러 계곡의 물이 작은세개골에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덕평남능 : 덕평봉에서 남쪽으로 뻣어내린 산줄기를 말하며 좌측에 작은세개골이 대성골로 흐르고 있음
오토바이능선 : 덕평남능 약1,245m 주변에서 분기되며 길은 좋고 지리산역사관으로 하산할수 있는 길임
천국의계단 : 영신봉 주변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수량이 적을시 계곡으로 영신대에 오를수 있음(주의요)
우천 허만수 선생 기도처 : 제1제단(영신대), 제2제단(창불대옆), 제3제단(음양수위), 제4제단(남부능선)
지리산 대성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보기드문 기도처로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근세에 들어서는 6.25 전란의 소용돌이속에 피의 제전의 역사를 간직한 길고 깊은 골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화개동천 맨 안쪽에 숨어있는 협곡의 수림과 남향으로 배치된 기암 절벽, 그리고
그 위용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려는 듯 흐르는 물줄기는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다.
세석평전을 거느리는 영신봉의 위엄은 세석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오랜 옛날부터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성골을 찾아나서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리산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품어주는 곳이라 해서 예로부터 ‘어머니의 산’으로 일컬어져 왔다.
하지만 50여년 전 이곳의 산자락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념이라는 굴레에 옥죄어진 수많은 생명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포와 절망의
나락에 빠지며 스러져간 곳이다.
특히 대성골은 빨치산들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곳.
그 슬픈 역사를 목도했을 골짜기를 해원(解寃)을 비는 마음으로 들어가 본다.
대성골은 빨치산 투쟁의 최대의 비극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수백여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다.
여러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등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였다.
그 해 1월 한달 동안이 토벌대와 미군 합동군 백야전사령부 3기 토벌작전 시기로 보인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눈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였다.
다음날 새벽 무렵 눈 덮인 대성골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1만여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토끼몰이 하듯 빨치산을 대성골로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 까지 동원하여 포격을 했다고 한다.,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이른바 백야전 사령부의 제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대성골에 모인 빨치산은 사면초가 격으로
수백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이 전해진다.
3일 동안 대성골 계곡 일대에는 피가 흘렀다고 한다.
당시 몰살 당한 빨치산의 규모는 각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1952년 1월께 남은 빨치산 수를
미뤄볼 때 이기형씨의 "죽음의 골"에 나오는 수백명(대략 800여명)이 근사치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빨치산 몰살 사건이 이곳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대성골이 갖는 지형적 특성에서 비록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계곡중 대성골이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안성 맞춤이어서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이곳으로 숨었고, 때마침 토벌대의 정보와 작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한편 1953년 여름, 토벌대에 쫓긴 김점분外 15명의 여성 빨치산들은 세석아래 음양수 샘가에서 포위되었었다.
더이상 피할 곳 없자 그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이 아름다운 지리의 골짜기에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단 하나의 생명을 버려야 했던
그들의 궁극적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과 파르티잔의 최후를 생각치 않을 수 없다.
빨치산의 대명사, 이현상 그는 누구인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고대 법학과를 나온 인물.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등으로 빨치산부대 실록인
'남부군(南部軍)'을 쓴 이태(李泰)가 기록하고 있다.
'빨치산 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 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될 만큼 이현상은 빨치산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 북에서조차 외면당하면서 고립무원속에 끝까지 버틴
외로운 빨치산 이현상...'
이현상은 빨치산 제2병단장,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남한 내의 최고 빨치산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난 순천역에 나타나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끌고 간 뒤
53년 9월까지 햇수로는 6년에 걸쳐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을 주도한다.
그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탄을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어 사라졌다.
정충제씨가 기록한 "실록 정순덕"과 이기형씨가 쓴 "죽음의 골",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등은
1950년대 초 지리산 일대에서 치러진 군·경과 빨치산의 처참한 격전을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성골의 비극이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세기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대성골엔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무심한 대자연은 수천년 변함없이 그대로 인간이 하는 일을 모른듯 지켜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을 찾아가는 길은 화개동천을 따라 잘 포장된 길을 올라 대성교에서 시작된다.
등산로는 대성교(大成橋)에서 시작되는 길과 조금 위의 의신 마을에서 시작되는 두갈래다.
세석까지 12km, 대성교에서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지만 의신부터는 평탄한 길이 시작돼
1km만 지나면 따로 시작된 두 길이 하나로 된다.
이곳이 옛날 능인사(能仁寺)가 있었다는 절터이다.
해발 500m지점이기도 하다.
당장이라도 집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넓고 편편한 터에 샘도 있다.
달고 시원한 이 샘물을 마시고 세 사람이 장군이 됐다 하여 의신마을 주민들은 '장군수'라 부른다.
대성계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있는 계곡으로 대성계곡은 지리산 남부 능선의 물이 모여 든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리산 남부 산지의 화개천 계곡은 위성사진으로 보면 직선인 곡지가 두 개 나타난다.
첫 번째 곡지는 벽소령에서 의신계곡의 삼정마을, 연동계곡의 칠불사 입구,
목통마을을 지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까지 발달한 곡지로 칼로 벤 듯이 뚜렷하다.
다른 하나는 그 오른쪽에 칠선봉과 영신봉 사이에서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계곡 쪽으로 발달한,
일명 큰세개골과 작은세개골을 형성한 곡지로 벽소령~연곡사로 이어지는 곡지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직선상의 곡지이다.
두 곡지 모두 북동~남서 또는 북북동~남남서 방향이며 하천의 흐름이 아니라 구조선을 따라 형성되었다.
대성계곡은 이들 중 동쪽의 큰세개골과 작은세개골을 따라 흘러온 물이 갈라진 틈을 따라 흐르면서 지형을 침식시키고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칠선봉과 영신봉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한 직선상의 곡지는 산중턱부터 지그재그 모양으로 변형되는데,
여기서부터 의신계곡 입구인 대성교까지가 대성계곡이다.
눌제(訥齊) 양성지(梁誠之)의
지리산 讚詩
<조선초기>
智異蒼蒼 倚半空 울창한 지리산은 창공에 높이 솟았고
天岩萬壑 灑飛淙 천만 기암 계곡의 흐르는 물은 폭포수를 이루네.
洞中靑鶴 應期我 이 동중에 청학은 있다고 하나 나를 속이는 말이니
胡不來聞 嶽寺鍾 어찌하여 산사의 종소리마저 들으러 오지 않은고.눌제(訥齊) 양성지(梁誠之/1415~1482)
본관 남원(南原). 자 순부(純夫). 호 눌재(訥齋) ·송파(松坡). 시호 문양(文襄). 1441년(세종 23) 진사와 생원에
합격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경창부승 ·성균관주부를 거쳐,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겸 고려사수사관(高麗史修史官)으로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 1453년(단종 1)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였다. 1455년(세조 1)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 1463년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고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책을 보관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 중추부지사(知事) ·홍문관제학(提學) ·춘추관지사를 겸직하며 《세조
실록》, 1470년(성종 1) 《예종실록》 등 편찬에 참여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大提學)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였다. 그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82년 서적의 인간(印刊) ·수장(收藏)에 관한 12조의 건의문을
올렸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문집에 《눌재집》, 저서에 《유선서(諭善書)》 《시정기(時政記)》《삼강사략
(三綱事略)》 등이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한시
請看千石鍾 (청간천석종) 천석이나 되는 무거운 종은
非大叩無聲 (비대고무성) 큰 채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세월 속 우뚝 서 있는 저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구나.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지리산을 너무 사랑하여 말년(61세)에
모든 재산과 장자(長子)권리까지 동생 ‘환(桓)’에게 물려주고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남명은 덕산에 터를 잡고 올바른 심성수양과 후학에 평생을 바치는 한편 무려 지리산을
열번 이상 오르면서 많은 시와 지리산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어머니에 품속 같은 지리산
심 재 순
어머니의 치마폭 같이 펼쳐진
지리산에서 사랑을 속삭여 보세요
당신의 마음이 흔들릴 때
지리산에 한 번 올라 보세요
봄의 전령사가 찾아와 푸른 새 순이
이 가지 저 가지 돋아 남을 볼때
천왕봉에 설산이 남아 있어요
아래는 봄 위에는 겨울
봄이 겨울을 몰아 내는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다오
지리산에 한번 올라 보셔요
온 세상의 잡다한 것을 다 모아 놓고
한 점 티끌도 없이 초록으로
버티고 선
지리산을 올라 오셔요
당신도 초록으로 물들어
세상사 모두 초록으로 피어 날겁니다
아름다움도 시기를 합니다
온통 불타는 지리산에 와서
당신의 생각도 태워 보세요
필요 없는 것
불타는 지리산 단풍에 태우고 가세요
당신의 머리가 가벼워질 겁니다
세상사 힘들거든 지리산을 올라 보셔요
하얗게 변한 지리산을 오르다 보면
당신의 사랑도 하얀 면사포로 춤을 출겁니다
지리산은 어머니 품속 같은 곳
언제나 반겨 줄겁니다지리산
천왕봉 그 道學의 原頭를 찾아서
조 종 명
가난함을 편히 여기고
상제와 마주하듯 도를 즐기면
편안하고 즐겁단다지리산을 바라보는 사람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하늘의 길을 아는가옛적 환갑이 되어 찾아온 선비
지리산을 찾아와 산이 된 사람 있었다
원천이 흘러 강이 된 벼랑 입덕문에서
창랑의 물에 갓끈 씻으며
이 강의 근원을 생각하네
산천재에서 그 원두를 생각하네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한시
地異風雲堂鴻洞 지리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 벌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一念向時非祖國 일념향시비조국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有血 흉유만갑심유혈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 이현상이 사살되었을 때 품속에서 나온 한시
수곡옛길 석축
수곡옛길 경작지
수곡옛길 숯가마터
달라발골 갈림길
백야전 전투사령부 사령관 백선엽의 시
현대사의 아픔을 품에 안고 침묵하는 산.
지리산에는 녹음처럼 짙고 생생한
우리들의 비극이 있다.
한 맺힌 슬픔이 있다.
빨치산과 토벌대가 벌인 혈전과 학살의 보복!
장대한 지리산에 아로새겨진 현대사의 상처.
혁명의 이름 아래 험산을 넘나들던 빨치산!
구국의 충정으로 눈보라를 가르던 토벌대원!
지리산 곡(哭)/ 지리산 진혼곡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 문화지도원 최순희 작사,작곡
철쭉이 피고지던 반야봉 기슭엔
오늘도 옛같이 안개 만이 서렸구나
피아골 바람 속에 연하천 가슴 속에
아직도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어 헤맸나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반야봉엔 궂은 비만 내린다.
써래봉 달빛 속에 치밭목 산죽 속에
눈을 든 채 묻혀져간 잊지 못할 동무들아
시루봉 바라보며 누워있는 쑥밭재야
잊었느냐 피의 노래, 통곡하던 물소리를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써래봉엔 단풍잎만 휘날린다.
추성동 감도는 칠선의 여울 속에
굽이굽이 서린 한이 깊이도 잠겼구나
거림아 대성골아 잔돌의 넓은들아
너는 알지 눈보라가 울부짖는 그 밤들을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님아
오늘도 천왕봉엔 하염없는 눈이 내린다
박장원(1612~1672)의 시
지리산박장원(朴長遠, 1612~1672)은 163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불행히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9년에는 선조실록의 수정본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말년에 개성유슈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등진 인물이다.
<박장원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지은 시>
천왕봉 꼭대기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닿아 있어
머리 위의 별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네
두 눈으로 아무리 보아도 막히는 데 없으니
어느 곳이 곤륜산인지 알지 못하겠네
<박장원이 지리산 등반 중 남긴 시>남악 지리산의 이름을 방장산이라 하니
다른 산과 전혀 같지 않네
지리는 험하고도 웅장하니
기색은 하늘에 가까이 있네
땅은 모두 벼 심기에 알맞고
샘의 근원에 고기가 살고 있네
어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움막 짓고 살지 않는 것인가이색(1328~1396)의 지리산 시
이색은 이성계의 유혹을 뿌리치고 은둔한 뒤 어는 때인지 모르나 지리산에 오른 일이
있었는데, 지리산에 도인과 승려들이 많다고 하면서 이같은 시를 섰다.
두류산이 가장 크도다
頭流山最大
신선이 표피자리 펼쳐 놓았네
羽客豹皮茵
나무 끝에 두 다리가 솟고
木末飛雙脚
구름 속에 몸 반쪽만 내놓았네
雲間出半身
어떤 이는 삼무에게 곤란당했음을 기록하고
人識困三武
혹은 진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惑說避孤秦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豈乏幽樓地
세상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風塵白髮新
이첨(李詹, 고려시대 1345~1405)의 시
고려 말엽에 조정의 간신을 소탕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순천에 가서 귀양살이 하면서 쓴 시 일부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 때는 대언이란 벼슬을 지내기도
했는데, 당식 박식하기로 유명했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이 높았다.
내 들으니, 백두산은
吾聞白頭山
남으로 뻗어 바다에 닿아 뿌리를 서리었다네
南來抵海根盤盤
멀리 멀리 삼천 리에 묏부리가 이어졌는데
??連?三千里
험한 곳은 모두 우리나라 관문으로 되었네
險處皆爲東國關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고
??氣積突然起
하늘 궁궐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天宮在頂享祭祀
하늘 궁궐이 하늘과 한 자도 안되는 거리여서
天宮去天不盈尺
뭇 산을 잡아당기고 뭇 물을 삼키네
平把?山呑衆水
문득 신선이 사는 곳을 찾아 옥피리 부니
却尋仙府吹玉笙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然宛似鳳凰鳴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끊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빨치산과 지리산을 생각하며 김지하 시인이 쓴 '지리산'시다.
1만 수천여 명에 이르는 빨치산과 죄없는 군경, 그리고 단순히
지리산에 산 죄로 학살된 수천 명의 산청·함양 양민들이 지리산에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왜 우리는 눈 쌓인 지리산을 보면 피가 끊는 것인가.
의신마을.
행정구역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다. 덕평봉 남쪽 자락에 아늑하게 앉아 있다. 일제 강점기, 6.25동란 전후 상처가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평온한 마을이다. 또한 화개천 도로를 따라 벽소령 쪽으로 오르는 노선버스가 마지막으로 멎는 곳이다.
마을 뒤편으로 패인 골짝은 빗점골이다. 이 골짝은 의신마을 아래서 대성골과 합해져 화개천이 된다. 또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오리정골, 천내골, 절골, 산태골, 왼골 등의 지류를 받아들이는데 이 지류는 주능선 토끼봉과 덕평봉 사이에서 흘러내린다.
의신(義神), 신흥(神興), 영신(靈神)을 일컬어 삼신동(三神洞)이라고 한다. 현재 의신은 의신, 대성마을을 포함한 대성리, 신흥은 신흥, 목통마을을 포함한 범왕리, 영신은 덕평봉 일원과 대성골 상류를 말한다. 한일합병 이래 의병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되자 이름을 바꾸었는데, 의신은 의신(義信)으로, 신흥은 신흥(新興)으로, 영신은 덕평(德平)으로 귀신 신(神)자를 없애거나 아에 고쳐썼다.
의신마을은 하늘아래 첫 마을로 잘 알려진 곳으로, 지라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남해와 섬진강을, 북동쪽으로는 삼남지방을 연결하던 벽소령이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은, 마을의 역사를 이상향임과 동시에 전란의 땅으로 만든 배경이 되었다. 의신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승되는 믿음 중에 하나로 “전란의 마지막 끝맺음은 의신마을에서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정작 전란의 사상자가 나지 않은 것은 이곳이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의신마을에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인 임진왜란 이후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이후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생활상이 피폐해지면서 민중들이 지리산을 피난처로 인식하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18세기 이후 지리산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 청학동이라는 장소에 대한 지리 정보와 장소 이미지는 지리산 유민(流民)들에게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때를 같이하여 도참사상이 유행으로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소문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를 명당, 길지의 승지이자 “많은 사람이 살 만하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萬人可活 三災不入]” 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하였다.
화개동 골짜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의신마을이 명당, 길지의 청학동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에게까지 유지·존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의신마을이 청학동의 실제이고, 마을 터는 ‘선학포란(仙鶴抱卵)’의 명당, 길지라는 주민들의 믿음이다. 의신마을은 동학 농민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은 벽소령을 통해 하동과 함양, 남원 등지로 이어지는 고개 길목에 입지했기에 전란 시에는 혁명과 의병 활동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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