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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곡골, 은정대, 양진암, 단천독바위
    지리 산행기 2022. 11. 14. 11:22

    # 언제: 2022년 11월 12일 토요일

    # 산행지: 수곡골, 은정대, 양진암, 단천독바위,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42km  06시간41분 

    # 산행루트: 의신마을 - 대성주막 - 수곡골 - 은정대 - 양진암 - 단천지능 - 단천독바위 - 단천지능옆사면길 -

                       수곡옛길 - 대성1교

     

    수곡골 : 지리산 남부능선 약1,240m 주변에서 발원되며 대성주막 주변에 합수됨. 계곡에 양진암이 있음

     

    # 산행지도

     

    # 산행사진

    하동범왕리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을 내어 자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며 나도 살아 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세이암(洗耳岩)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洗耳岩) 전설(傳說)

    「세이암 전설」은,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의 의신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을 따라가면 절벽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라 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여기서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의신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에는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洗耳岩)이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

     

    석각 조성 시기는 1903년으로 추정(계묘 중추)

     

    前判書 崔益鉉
             成彛永
             崔鎭晏
             李圭在
             崔柄采
    司果   崔廷鉉
             崔柄訓
             崔鎭璿
             郭漢紹
             崔尙鉉

     

    ☞ 면암선생문집 부록

     

    이해(1902년) 봄에 하동(河東)에 있는 종인(宗人) 최정현(崔廷鉉)이 횡천(橫川)에 문창후의 사당을 다시 설립하고 전에는 금천(琴川)에서 제향하였는데 이번에 옮겨 세웠다. 봉안(奉安)하는 날짜를 통고하면서 선생에게 참석하기를 굳이 청했다. 마침 문인 유기석(柳淇錫)ㆍ신종식(愼宗軾)과 종인 최기호(崔基鎬)가 와서 뵙고, 두류산을 관람하기에는 이번이 알맞은 시기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로 인해서 길을 떠났는데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모시고 따랐다.

    출처 : http://blog.daum.net/jirisanlove/7682947

     

    ○임인년(1902, 광무 6) 선생 70세 4월

    청양(정산)-공주 공암-옥천-연재(淵齋 송공 덕유산)-안의(수승대)-함양(남게서원/학사루)-단성(신안정사)-적벽강-진양청수-하동횡천(문창후사당)-벽계암(碧溪巖)ㆍ문창대(文昌臺)를 거쳐, 천왕봉(天王峰)-산천재-삼가(三嘉) 향옥재(香玉齋)-합천 가야산(伽倻山)-해인사(海印寺)-진주 촉석루-악양정(岳陽亭)-쌍계사(雙溪寺)-구례 화엄사(華嚴寺)-남원 천은사(泉隱寺)-8월 10일경 청양(정산)

     

    崔益鉉[1833(순조 33)~1907] 경기 포천 출생 본관 경주(慶州) 호 면암(勉菴)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 본관은 경주, 아명은 기남, 자는 찬경, 호는 면암으로 1855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

     

    成彛永
    崔鎭:華西→崔益鉉門人,乙巳生,字致伯,號石堂,慶州人(최익현 선생 문인록) 
    李圭在
    崔柄采
    司果 崔廷鉉 : 이해 봄에 하동(河東)에 있는 종인(宗人) 최정현(崔廷鉉)이 횡천(橫川)에 문창후의 사당을 다시 설립하고 전에는 금천(琴川)에서 제향하였는데 이번에 옮겨 세웠다. 봉안(奉安)하는 날짜를 통고하면서 선생에게 참석하기를 굳이 청했다. 출처 : 면암선생문집 부록
    崔柄:華西→崔益鉉門人,壬戌生,字道翼,號松隱,慶州人(최익현 선생 문인록)
    崔鎭璿
    郭漢紹(1882~1927) : 면암 최익현의 문인 『敬菴集』 충남 연기군 남면, 독립운동가

                                관련자료 : http://blog.daum.net/sonatine-007/10
    崔尙鉉

     

    ☞ 관련자료 면암(崔益鉉)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 http://blog.daum.net/jirisanlove/7682947

     

    면암(崔益鉉)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면암선생문집 제 2권 ○두류산(頭流山)에 오르다 칠십에 방장산 오를 약속은 / 稀年方丈約 오직 그대들 있는 까닭일세 / 賴有二三公 원컨대 추진의 힘 더하여 / 願借推移力 최상봉 오르길 약속

    jirisanmasil.tistory.com

     세이암바위

     

     세이암바위

     

     세이암바위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洗耳岩)이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대성리의 중심 마을로 화개에서도 사찰이 가장 많았던 불교의 요람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의신사, 의신 암자에서 도를 닦은 의신조사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신 윗마을 삼정은 삼각등, 말안장터 등 세 곳의 길지가 있어 이곳에 묘를 쓰면 세 사람의 정승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삼정 혹은 삼점이 되었다 한다.

     

    산행들머리

     

    홍시

    나이를 먹으며 익어간다는 것

    마음을 안으로 삭히는 것

    살아가면서 만나는

    기쁨과 슬픔과 애처로움 같은 것들을

    한데 버무리고 뭉쳐서 단맛을 내는 것

    연륜이 쌓일수록

    얼굴이 벌게지며 부끄러워할 줄 알고

    어떤 세파에도 물렁물렁하게 대처하게 된다는 것

    지상에 마지막 남은 등불처럼

    오래 세상을 깜박인다는 것

     

    의신마을 조망

     

    남부쪽 조망

     

    멀리 광양 백운산을 보고

    화개동천에 맞대어

    좌론 그 악명높은 지네능선이

    우론,

    멀리 불무장등이 화개장터에 닺는

    황장산 끄트머리가

    앞으론 범왕능선이 치달아 내리고

     

    소나무 연리지

     

    능인사터(470m)

     

    능인사터 석축

     

    대성주막 가기전 언제나 그자리 지키고 잇는 소나무

     

    대성주막

     

    수곡능선 초입에서 조망되는 대성주막

     

    수곡폭포

     

    수곡골은 지리산 영신봉과 삼신봉 사이의 남부능선

    깊고 깊은 험지에 자리하고 있는 계곡이며

    대성골의 지류이다.

    왼쪽으로는 대성골 상류가,

    오른쪽으로는 단천지능과 능선 넘어 단천골이 흐르며

    그 천상은 삼신봉의 장엄한 기운이 두루두루 주위를 감싸 안는다.

    불과 20-3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하동과 산청의 생활의 통로이자 삶의 무대이기도 했다.

    1952년 백야전사령부(군경합동)의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일명 토끼몰이)으로

    대성골에서 수많은 젊은 넋들이

    하얀 설원 위에 선혈을 낭자하게 뿌리며 죽어 갔고,

    일부는 수곡골로 올라

    자빠진골을 거쳐 거림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근현대사의 가슴아픔 사연을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더 마음을 움직이며

    지리산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원시림,

    수곡폭포, 수골마을터, 단천독바위 등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수곡마을터

     

    수곡마을터 돌확

     

    은정대(隱井臺) - (778m)

     

    옛적, 이곳에는 은정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람에 나선 오두인 일행이 하루밤 머물기고 했고...?

     

    오두인(1624~1689)은 조선조, 인조에서 숙종조에 걸쳐 고위 벼슬을 한 선비로 사헌부 지평을 거쳐 경기도관찰사와 공조,형조판서를 지내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자료에 의하면, 그가 젊은 시절인 1651년 11월1일부터 11월6일까지 5박 6일간, 지리산 유람을 하고 산행기인 '두류산기(頭流山記)'를 남겼다. 두류산기는 그의 저서 양곡집(陽谷集)에 실려 있다. 그는 경상우도 지역, 재해 시찰을 마치고, 진주목사와 하동태수 등을 대동하고 평소 꿈꾸던 지리산 산행에 나섰다. 진주관아를 출발하여, 하동을 거쳐 쌍계사,불일폭포 일대를 돌아보고 대성계곡, 수곡골을 통해 남부능선을 넘었다. 그리고, 자빠진골을 통해 거림,내대로 하산, 덕산을 거쳐 진주관아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들이 은정대에 하루 묵으며 암자 뒤 바위에 일행들의 이름을 나이 순으로 새겼는데...

     

    김정, 이상일, 이진필, 오두인, 김집 등 이다. 당시 일행들의 면면은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사헌부 지평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 이었다.

     

    369년 전의 오두인(吳斗寅), 흔적을 찾아 수곡골 은정대(隱井臺)에 찾아 오르다. 오전 겨울비, 그리고 약간의 눈, 산행에 지장 없길 바라며, 목적지인 의신마을 출발, 고속도로 달리는 동안에도, 비,눈 내린다. 그런데 산행 시작 목적지인 의신마을 도착 전혀다른 날씨다. 화개동천의 끝 마을 의신, 아침 공기부터 다르다. 냉기 속에 청량함이 묻어난다.

    오늘은 조선중기의 선비, 오두인(1624~1689)이 올랐던 수곡골과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은정대(隱井臺)를 찾아 떠나본다.

     

    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頭流山記 南臺寺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본관이 海州, 호는 陽谷,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父는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648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1651년 공무로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11월 1일~11월 6일까지 5박 6일 동안 경상우도의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의 유람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1년 오두인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 오숙(吳䎘)이 화개동천과 불일암을 유람하였고, 1647년 계부(季父:막내숙부) 오핵(吳翮)이 다녀갔다. 이 세 사람은 특이하게 불일암에서 옥소암과 영대암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왔다. 1647년 이곳을 유람한 계부(季父) 오핵(吳翮)은 불출암과 쌍계사 사이 계곡 바위에 장원암이라는 시를 묵서(墨書)로 남겼는데, 5년 후 오두인이 이 묵서를 발견하고 화답 시를 읊었다고 한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의 앞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청학봉은 비로봉(백학봉)을 가리킴. 우선(羽仙) : 오숙(吳䎘,1592~1634)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유람 일정은 1651년 11월 1일 진주 관아를 출발하여 옥계사에서 자고, 11월 2일 악양을 거쳐 쌍계사에 도착, 11월 3일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원을 둘러보고 쌍계사 적묵당에서 자고, 11월 4일 아침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거석교 -홍류교(삼신동 각자)-신흥사터-능파각(세이대)-사자곡을 지나 기담(妓潭)에서 쉰 후, 능인사(能仁寺)에서 점심을 먹는다. 저녁 무렵에 능인사(能仁寺)를 출발하여 은정대(隱井臺)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11월 5일 은정대(隱井臺)를 출발하여 수국현(水國峴)넘어서 거림으로 내려가 남대사를 거쳐 신계촌에서 유숙하고, 11월 6일 신계를 출발하여 덕천서원에 들렀다가 진주 관아로 돌아갔다. 이때 오두인과 동유(同遊)한 일행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의 이름을 은정대(隱井臺)  은정(隱井)의 바위벽에 새겼다. 이 성명의 석각이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 의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 관련 발췌

    1651년 11월 4일 <중략>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學僧) 담희(淡熙)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隱井臺也。菴在絶頂。去塵宸最遠。經僧淡熙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 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     -빌려온글-

     

    1651년 오두인(1624~1689) 선생은 당시 28세에 관찰사로 내려와 18년전에 아버지 오숙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기(頭流山記)’에 기록한 오두인의 석각(石刻)이 옛수곡마을터에서 368년만에 발견되었다.
     
    <오두인_두류산기(頭流山記)_1651년>
    1651년 11월 4일(음력)
     
    (전략)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도착하였는데 은정대(隱井臺)이다. 암자는 꼭대기에 있는데 인간 세상과는 가장 멀리 있었다. 경승(經僧 : 경전에 정통한 스님)인 담희(淡熙)가 머물고 있었으며, 자기를 따라와 공부하는 사람이 1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 은정대 뒤에는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서 샘이 솟아 나왔는데 소위 은정(隱井)은 반드시 이곳일 것이다. 바위에 같이 놀러 온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새겨 두기로 하였다.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이다. 첫 번째가 독우 김정, 둘째가 진주목사 이상일, 셋째가 하동수령 이진필이다. 내가 넷째를 차지하였는데 나이대로 순서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돌에 새기라고 명령하여 훗날의 표식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 날은 은정대에서 잤다.
     
    1651년 11월 5일

    아침에 은정을 떠나 또 동쪽으로 올라가 수국현(水國峴)*[현 수곡재]을 넘어가려고 하였다. 돌 길이 험준하고, 냇물 가득히 얼음이 겹겹이 쌓였다. 열 걸음에 아홉은 쉬고 가시나무를 헤치면서 기슭을 따라 갔다. 가다가 보니 폐허가 된 암자 세 곳이 길가에 있었다. 스님에게 물으니 상수국사(上水國寺), 중수국사(中水國寺), 하수국사(下水國寺)라고 하였다.여기서부터 곧장 동쪽 고개로 올라갔는데, 여기가 소위 수국현이다. 수국현을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눈 덮인 산이 하나 있다. 하늘 한 가운데를 찌를 듯이 높고, 기상이 엄숙하며, 모든 계곡을 아래로 굽어보았는데 천왕봉이다. 즉 지리산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내가 금년 9월 9일 중양절에 산음(山陰)*[산청의 옛이름]에서부터 군자사(君子寺)*[현 마천면 군자리에 있었던 절]를 경유하여 곧장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 정상에서 잤으며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지금도 구름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볼 수 있으니 꿈속의 일만 같다.고개 위에서 배회하다가 눈길이 끝나는 곳까지 사방을 들러보니 강과 바다가 굽이굽이 둘러싸고 많은 산들이 점점이 있는데 모두 기록하지 못하겠다.

    고개를 넘어서 내려왔다. 구불구불한 돌길과 기이한 경치를 가진 산천은 내산(內山)과 차이가 없다. 여행의 괴로움은 더욱 심하지만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는 흥치를 여전히 그치지 못하였다. 덕산사(德山寺) 스님 10여명이 영접하였다. 반도 못 내려 왔는데 송락[松羅]을 쓴 사람이 계곡 가에서 인사를 하였다. 거처하는 곳을 물으니 남대사(南臺寺)이다.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대사로 갔다. 점심을 먹고 내려와 7, 8리를 가니 하나의 큰 계곡이 있는데 천왕봉에서 내려왔다. 계곡과 마을 이름을 모두 신계(新溪)라고 이름 붙였다. 5리 정도 내려오니 신계촌(新溪村)*[현 시천면 신천리로 추정]이 있다. 날이 어느덧 저녁이 되어 신계촌에서 머물러 숙박하였다. 4일 동안에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다가 처음으로 마을 집에서 잠을 잤다. 하루 사이에 선경(仙境)과 인간 세상을 오락가락하니 너무 차이가 난다. 구름 덮인 산으로 머리를 돌리니 아쉽다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도착하였는데 은정대(隱井臺)이다. 암자는 꼭대기에 있는데 인간 세상과는 가장 멀리 있었다. 경승(經僧 : 경전에 정통한 스님)인 담희(淡熙)가 머물고 있었으며, 자기를 따라와 공부하는 사람이 1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 은정대 뒤에는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서 샘이 솟아 나왔는데 소위 은정(隱井)은 반드시 이곳일 것이다. 바위에 같이 놀러 온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새겨 두기로 하였다.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이다. 첫 번째가 독우 김정, 둘째가 진주목사 이상일, 셋째가 하동수령 이진필이다. 내가 넷째를 차지하였는데 나이대로 순서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돌에 새기라고 명령하여 훗날의 표식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 날은 은정대에서 잤다.

     

    은정(隱井)샘

     

    은정대위에 은정암터 

     

    허릿길을 돌아 양진암 바로아래에 있는 하수국암터(800m)에 도착했다. 정성스레 쌓은 석축

     

    양진암(중수국암)

     

    함께한 산우님

    양진암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긴 석축이있다 상수국암터(840m)다.

     

    단천지능에서 조망되는 남부능선

     

    단천굴 암봉

     

    단천굴

     

    단천독바위

     

    단천독바위

    상단부 암봉군... 바로 앞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능선을 고집하고 진행할려고 하면 좀 위험하지만 독바위 왼쪽 방면으로 진행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바위 하단부의 (독바위굴)을 볼려고 할 경우엔 올라왔던 능선을  빠구해서 안부에서 안전하게 독바위 오른쪽 방면 아래로 우회해서 진행하다가 도중에 자연스럽게 <단천독바위굴>을 구경하는 것을 권장하는 바이다.

     

    단천독바위굴

     

    하산 길에 수곡옛길 의 경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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