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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녀굴,노장대(독녀암)
    지리 산행기 2023. 2. 19. 15:27

    # 언제: 2023년 02월 18일 토요일

    # 산행지: 선녀굴.함양독바위(노장대.독녀암),은병암터,의논대,외 지리의 역사 찾아...

    # 산행거리: 7.36km   04시간 55분

    # 산행루트: 송대마을 - 은병암터 - 선녀굴 - 의논대 - 신열암터 - 함양독바위(노장대.독녀암) - 안락문 - 고열암터

                        미타봉 - 벽송능선 - 송대마을

     

    송대마을

    지리산 약 560m~700m 고지에 위치한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 이었음

     

    은병암(隱者) 족자(子 1130 1200)의 이름을 희(), 자는 원회(元g), 호는 회암(時雨)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이무이구곡 (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尾품)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고 체지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안현에 있다.

    강시영(時永, 1788년(정조 (12)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지는 여량(里, 或로) 1819년 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 光)과 부사 한게우(한
    者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성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進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 철종 5) 대사연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 배지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품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間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집필(1996년) 오성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시영 (품時)]

     

    선녀굴

    선녀굴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던 전설이 있으나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해발 약 1000m에 위치한 선녀굴은 마지막 여성 빨치산이었던 망실공비 3인 부대인 정순덕, 이홍이, 이은조 3인방이 10여년 동안 은거해 있었던 곳이며 여기서 정순덕과 함께 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은조(45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가  2월 토벌대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963년 11월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증언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선녀굴 암자터 ;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였던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추성의 석덕완 할아버지부터 1962년 지리산 선녀굴에서의 마지막 빨치산 사건(정순덕, 이홍이, 이은조)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그것을 정리해 둔 적이 있습니다. 석덕완 할아버지께서는 선녀굴에서 문영만으로부터 이은조가 사살당하고 그 다음날 마천 방위대의 일원으로 선녀굴 부근을 직접 수색했던 장본인으로서 자세한 내막을 알고 계시더군요...”
    이은조의 사망 년도가 왜 다를까 ???

     

    의논대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 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신열암터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

    독바위 앞에 함양,산청,하동을 붙였길래 모두 항아리를 닮았는줄 알았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엔 부인로 홀로 기도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니 독녀암으로 부르거나 바위 아래 계곡에 노장대동 마을이 있었으니 노장대가 더 어울린다.
    금서면 화계에선 상투바위라 부른다.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신열암)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산청 쪽의 화개 사람들은 상투를 닮았다고 상투바우라 하고, 함양의 휴천 사람들은 독아지를 닮았다고 장독바우라 부른다. 또 한 마천 쪽 사람들은 筆鋒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마천의 60번 도로 위에서 확인해 보니 붓끝을 닮기도 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상은 유림 쪽에서 본 상투 모양의 독바위 모습이다.
     
    예전에 함양군에서 운암마을에서 노장동을 거쳐 이곳 독녀암 까지를 빨치산 탐방루트로 지정을 해서 함양 독바위를 “노장대” 라고 하였으나 한국전쟁까지 노장동에서 5대를 살았다는 <손종만>씨 외 여러 지역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장대는 토착민들이 부르는 노장동 마을의 별칭이며 함양독바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노장대는 노장동 마을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강점초기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행정표기상 노장대 마을이 노장동으로 바뀐 듯하다. 독바위는 그 예전부터 독바위라고 불렀다고 문헌에도 나와 있다.

     

    안락문

     

    고열암터

     

    미타봉(彌陀峯) & 소림선방(少林禪房)

    소림선방(少林禪房)은 김종직 선생이 지은 의론대 시어에 나오는 곳으로 참선하기 좋은 석굴로 이해한다.

    견불동에서 바라보면 앞산이 와불로 보이는데 미타봉(와불산)은 부처님 얼굴에 해당되고 그 부처님 얼굴 주변으로 잡인의 출입을 막는 석축이 설치되어 있으며 입속에 바람도 쉬어가는 큰 석굴이 있다.

    소림선방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면 선녀굴골 건너편으로 의론대가 잘보인다.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
    (김종직 선생이 의론대에 올라 "향로봉, 미타봉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고 한건 아마도 용유담에서 설명을 듣고 올라왔기에 그렇게 쓴것이라 생각된다. 용유담에서 보면 향로봉과 미타봉이 부처님의 다리 아래에 있는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론대에선 다리와 얼굴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議論臺(의논대)_김종직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출처:도솔산 연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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