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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일협곡
    지리 산행기 2023. 3. 27. 11:48

    # 언제: 2023년 03월 26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산 봄이 오는 풍경소리 찾아 하동 십리벚꽃 길, 불일협곡, 지리의 폼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07시간 28분   12.65km

    # 산행루트: 쌍계교(주차장) - 내원골 - 묵자바위 - 합수부 - 불일협곡 - 옥천대 - 용추폭포[겹용소]-

                       불일암 - 불일폭포 - 청학봉 - 대은암터 - 내원수행촌 - 불출암터 - 쌍계사 - 하동 십리벚꽃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은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 해서 일명 ‘혼례길’이라고도 불리며, 분홍빛으로 물든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꽃비가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봄이 오는 풍경소리 찾아 하동 십리벚꽃길 꽃비 길 걸으며, 불일협곡 용추폭포[겹용소], 최치원 비밀통로를 찾아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쌍계사에서 철조망을처 어렵게 우회하니, 아니 또 철조망이 길을 막아 선다.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붙잡지 않는다는 절집인심이 무색하드라. 사람이 있어야 스님도 있다, 쌍계사 너무한다.

     

    화개면 운수리, 용강리, 조망

     

    내원골

     

    내원골 모습

     

     

    내원수행촌 가는 길의 묵자바위

     

     

    묵자바위도 살펴본다. '묵'자는 보이지도 않고...

     

     

    나무나 돌에 새겼으면 ‘각자(刻字)’라 칭하는데 먹으로 썼으니‘묵(墨)자’라 한다지요.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100여 년 전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청학동에서 신흥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흔적이라 하는데 많은 부분이 세월따라 퇴색되어 지워져 그 의미는 알 수 없다내요.

     

     

    묵자바위 지점에서, 쉬어간다

     

     

    소은산막 최선생의 흔적...

    소은산막 가는 길 바닦 바위에는 격자무늬가 있는데, 노부인께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세긴 방지장치로 부인을 향한 지극한 순애보를 엿 볼 수 있죠.

     

     

    내원골 모습

     

     

    불일협곡과 내원골 합수부

     

     

    불일협곡

     

     

    불일협곡 초입의 무명폭포

    불일협곡을 지키는 수문장 폭포답게 통과하는게 좀 까다롭다.

    좌측사면으로 기어올라 폭포지대를 통과한다.

     

     

    불일협곡의 최대 난코스, 우측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로프를 이용하여 협곡탈출

     

     

    난코스 통과, 올라서서 오른 곳을 뒤돌아 본다.

    협곡이란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불일협곡이다.

    계곡 양쪽 절벽 암사면이 까마득하다.

     

     

    봄 봄 봄 

     

     

    옥천대 옆으로도 폭포

     

     

    옥천대(玉泉臺)

     

    (*)옥천대(玉泉臺) :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이 깊은 불일협곡으로 들어가 천연 암굴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한 끝에 신선이 되어 영생의 천수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바로 최치원이 공부했다는 천연 암굴이다.

    [출처] 불일협곡 명당 옥천대(玉泉臺)|작성자 최화수

     

    천년송 대장님께 빌린사진

    옥천대는 신라 최고의 지성 최치원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바위 밑 암굴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천장이 높아 허리를 펴고 서도 될 정도다. 그리고 안쪽에 내실이 하나 더 있다. 좁지만 평평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바위 밑에 구들을 놓아 온돌방으로 이용한 흔적도 있다. 근래까지도 수도하는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복잡한 세상과 단절된 별세계다. 최치원은 쌍계사에 기거하며 일대를 돌아보다가 깊은 협곡 내 이곳을 발견하고 자신의 수행처로 삼았다. 그리고 쌍계사 창건 당시 이름인 옥천사(玉泉寺) 이름을 따 옥천대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옥천대 좌측 의 큰 암석

     

     

    용추폭포[겹용소] 아래있는 무명폭포

     

     

    용추폭포[겹용소]

     

     

    폭포 아래는 용이 살던 소가 두개다. 안쪽, 바깥쪽...

    그래서 겹용소라고 부른다.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하며 꼬리를 쳐서

    협곡 좌우의 백학봉과 청학봉, 그리고 그사이 불일폭포를 만들었다고...

     

     

    학연과 학담은 불일폭포와 용추폭포 사이에 있고 수심이 깊은 곳은 2.5m 이른다.
    남명조식 선생이 말한 삼선동 석각이 그곳에 있지않을까 생각된다.
    협곡이라 접근이 힘들지만 불일폭포에서 진입하면 학담 윗쪽은 볼수있다

    불일협곡은 쌍계사 입구에서 내원골을 따라 2km쯤 올라가면 내원수행촌 못미쳐 좌측으로 분기되는 계곡이다.초입부터 양쪽 모두 탈출로 없는 직벽이고 하늘도 한뼘 정도만 열려있다. 큰 비가오면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점점 깊게만 패이고 폭포와 거친 계곡들로 용추폭포까지 2.2km가량 트래킹이 가능하다. 용추폭포 위로 깊이가 2m가 넘는 용연이 있는데 그곳을 답사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곳을 넘으면 불일폭포 아래까지 갈수있다.
    협곡 중간쯤 최치원 선생이 공부를 했다는 옥천대가 있는데 옥천은 쌍계사의 옛이름이다. 그곳에 작은 폭포 옆 큰바위 아래에 두개의 공간을 나누워져 있고 앞쪽 바위에 "李"각자 있도 있다

    이륙_유지리산록 1463년

    불일암(佛日菴)은 서쪽으로 쌍계사와 십여 리 떨어져 있는데 벼랑과 골짜기가 매우 험준해서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고 다닐 수 있는 길도 없다. 절벽의 허리를 뚫어 가르고 있는데 위아래로 모두 수백 길이나 되고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다. 절벽을 뚫을 수 없는 곳에는 나무를 가로놓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지나다니는 자들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털이 곤두서지 않는 이가 없다.

    불일암도 아래로 백여 길이나 되는 절벽에 맞닿아 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이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학연(鶴淵)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이곳에서 독서할 적에 신룡이 때때로 못에서 나와 듣고 학도 그를 위해 너울거리며 날아다니면 공이 가끔 허공에 글자 한 자를 써 다리를 만들어 서로 왕래했다.”
    라고 한다. 또 절벽의 바위에 난 작은 구멍으로 구릿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곳 승려들은 최공이 이곳에 구리붓을 감추어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명 조식_유두류록 1558년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쏟아져 내리다가 합쳐지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왕래할 수 없었으며,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할 수 없는 약수(弱水)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 소리가 서로 얽혀, 천지가 개벽하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어, 겨우 그 초입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낀 돌에는 ‘삼선동(三仙洞)’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616년, 성여신_방장산선유일기
    피리 부는 두종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갔다.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비로봉(毘盧峰) 북쪽에 도착하였다. 학암(鶴巖)이 남쪽에 있고 잔도(棧道)가 그 동쪽에 가로놓여 있었다. 남여를 두고 걸어갔다. 이곳은 부사옹이 갑인년(1614) 가을 꿈속에 찾아왔던 곳이다. 꿈 이야기는 나의 서술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바위 허리로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벌려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1백 척(尺)이나 되는 낭떠러지 위에 있고, 동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실같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나무를 부여잡고 곧장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석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몸이 날렵하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함께한 산우님

     

     

    기도 터

     

     

    불일폭포(佛日瀑布)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고 높이는 60m이며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하자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이 지눌이 머물던 암자에 ‘불일(佛日)’이라는 시호를 내려 암자 이름을 불일암(佛日庵)이라 하였는데, 그 가까이 있는 폭포이므로 불일폭포라 했다내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진감국사가 창건한 암자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부속암자이다. 신라 말에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고 수도 도량으로 삼은 뒤 불일암이라 하였다.

    그 뒤 폐허화된 것을 1911년에 쌍계사 승려 양용은(梁龍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로는 인법당(人法堂)이 있고, 중요한 문화재는 없으나 주위의 경치가 절경이다.

    암자 옆에는 지리산 제1폭포라는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있으며, 암자 뒤쪽으로는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이 있다. 이 암자에는 350년 전까지만 하여도 청학 한 쌍이 살았는데 어느 날 사냥꾼이 돌을 던져 날개가 상하자 날아가 버렸다 한다.
    출처:네이버

     

     

    청학봉 오르며

     

     

    청학봉에서 조망되는 불일암

     

     

    대은암터 석축

     

     

    내원수행촌 위 집, 고봉스님께서 홀로 수행중

     

     

    내원수행촌

     

     

    불출암터

     

     

    불출암터 석축

     

     

    깨진 기왓장, 금복주 대두병

     

     

    쌍계사(雙磎寺)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0년(163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다.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지리산 쌍계사 대웅전 앞에 오래된 비가 있다.
    887년에 세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국보 제47호)이다.

    귀부와 이수는 완전히 남아 있고, 왼쪽 윗부분에 조금 깨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비신도 대부분이 남아 있으나 그 스스로는 서있기가 힘들어 보조 금속틀에 의지하고 있다. 비의 전체 높이는 363cm이다.


    글과 글씨, 제액을 모두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짓고 쓴 비로 그가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이다.

    사산비명이란 이 진감선사비를 비롯하여 보령 만수산 성주사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운선생 뿐 아니라 신라 말기 불교와 역사, 사상 경향 등을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특히 진감선사비는 최치원이 손수 글씨를 쓴 작품으로 사산비명 중에서도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 혜소慧昭(774~850)가 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각지를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830년 신라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서문에 유교와 불교사상이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하고, 본 내용에서도 노장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를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최치원의 사상적 입장과 신라 말 지식인들의 사상 경향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쌍계사 구층석탑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로 썼다는 쌍계(雙磎)와 석문(石門) 각자

     

    쌍계사 석문(雙磎寺石門)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857~?]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말한다.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3) 의상(義湘)[625~702]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은 절 문 앞으로 흐르는 쌍계에서 비롯하였으며, 이로부터 쌍계사 석문이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립 경위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 최치원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위치
    쌍계사 석문은 쌍계사의 입구에 해당한다. 현재 쌍계사 석문에서 쌍계사 일주문(雙磎寺一柱門)까지의 거리는 대략 400m 정도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1487년(성종 18) 10월 9일 쌍계사에 들렀는데, 쌍계사 석문 안쪽으로 1~2리쯤에 쌍계사가 있다고 하였다.

    형태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편의 타원형 자연 바위에 ‘쌍계’ 2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왼편의 마름모꼴 자연 바위에 ‘석문’ 2자가 음각되어 있다. 두 자연 바위는 5m쯤 떨어져 수문장처럼 서 있다. 옛날에는 법계(法界)와 속계(俗界)를 경계 지었을 것이다.

    ‘쌍계석문’ 4자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보면 고졸(古拙)한 맛이 난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최치원의 필적으로 알려진 하동군 화개의 ‘쌍계석문’과 단성의 ‘광제암문(廣濟嵒門)’을 보고 난 후 전자를 유치한 수준의 것으로 본 데 비하여 후자를 잘 쓴 글씨로 보았다. ‘광제암문’은 필세(筆勢)가 경고(硬古)하여 쌍계사의 ‘쌍계석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최치원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조선 시대 유자(儒者)나 승려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1487년 10월 9일] 진주의 화개동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이라는 4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 최치원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고 하여 ‘쌍계석문’을 최치원의 필적으로 보았다.

    조선 중기 고승인 소요(逍遙) 태능(太能)[1562~1649]은 1647년(인조 25) 9월 쌍계석문을 보고 나서 「제쌍계사최고운석문필적(題雙溪寺崔孤雲石門筆迹)」이라는 시를 한 수 읊었는데, 풀이하면 「쌍계사 최고운의 석문 필적에 제하다」이다. 그 내용은 “두류산과 방장산은 참으로 선계로다[頭流方丈眞仙界]/ 기쁘게 읊으면서 석문에 새겼으니[鼓翼淸吟付石門]/ 석문의 필적은 인간의 보배가 되었는데[石門筆迹人間寶]/ 신선이 노닌다며 흰 구름이 가로막네[遊戱金壇銷白雲]”이다. 이렇듯 최치원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후대인에게 시상(詩想)의 소재가 되었다.

     

     

     

    하동 십리 벚꽃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아래까지 약 십리에 이르는 이 벚꽃길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주민들이 직접심어 조성하였다. 지역의 유지들이 자금을 갹출하여 복숭아(홍도화) 200그루, 벚나무 1,200그루를 심어 지금의 벚꽃길이 형성된 것이다. 화개 십리벚꽃길은 흔히 ‘혼례길’이라고 부른다. 벚꽃이 화사하게 핀 봄날 남녀가 꽃비를 맞으며 이 길을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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