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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최참판댁,정금정,세이암,칠불사,(수함요새민박)지리 산행기 2023. 7. 30. 09:52
운조루 -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雲鳥樓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운조루길 59)
전통 한옥 중 몇몇은 풍수만으로도 이름이 높다. 운조루도 여기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독창적인 공간 구조를 가진 운조루는 전통 한옥만으로도 이름을 얻을 만하다. 지역적으로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하여 영호남 건축의 장점이 모두 살아 있고, 집 안 곳곳 운조루를 지은 이의 건축가로서의 재능도 돋보인다. 봄기운이 가득한 사랑마당을 거닐며 남도의 고택을 감상해 보자. 노고단의 일몰, 섬진강의 풍광, 화개장터의 왁자지껄함. 구례는 여행지가 가져야 할 진수를 모두 가지고 있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 솟을대문의 호랑이 뼈
한발 앞서 봄을 맞은 남녘 들판.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봉산과 어우러진 들녘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기운에 취해 생명을 키운 들판에는 간간이 여인들이 모여 앉아 자연이 키워 낸 봄나물을 훔치고 있다. 지난 세월 저 들판은 끊임없이 곡식을 내서 마을을 길러 왔을 것이다. 풍수가들이 이곳을 생리(生利)의 명당으로 꼽는 까닭이다. '생리'는 경제적인 이로움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 땅이 그들을 부유하게 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아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었다. 운조루(雲鳥樓)의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들판에서 발을 빼 운조루로 가는 걸음이 가볍다.
기차 몇 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긴 행랑채는 운조루가 한때 거대한 장원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집 앞을 차지한 연못이 운조루의 분위기를 활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행랑채와 연못 사이로 난 고샅을 걸어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기분도 유쾌하다. 운조루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고 이제는 엉뚱한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 이 부분에서 호랑이 뼈다 아니다라며 종부인 할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 뼈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것이 조상의 용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후손들이 바친 훈장인 바에야. 호랑이 뼈의 주인공 유이주가 바로 이곳의 문화 유씨 입향조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눌러앉았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하지만 잠깐 만에 집을 받친 기단이 보기보다 매우 높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그렇다면 사랑채가 꽤 높은 건물인데,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마당의 넉넉함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는 사랑채의 관대함은 일정 부분 넓은 기단의 공으로 돌려도 좋을 것 같다. 기단 위에 늘어선 키 작은 나무들이 사랑채가 주는 수직적인 긴장감을 누그러뜨려 마당과 건물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 바로 이 지점이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이 운조루에서 만나는 부분이다. 기단에 꽃과 나무를 심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건축을 모른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이다. 여기에서 이 집을 경영한 유이주가 풍부한 건축 경험을 가진 건축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남한산성 같은 성곽이나 공공건물의 정원 공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기단 위에 만든 화단의 회양목, 밥티꽃, 싸리꽃, 동백꽃, 자목련으로 사랑마당을 풍요롭게 만든 건축적 접근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이곳으로 출발할 때 품었던 궁금증 하나를 털어 낸 셈이다. 출발 전 운조루에 전해 내려온 그림인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살펴보며 생긴 궁금증이다.
악양(岳陽)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악양으로 고쳐 하동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때 진주에 예속시켰고, 조선 중종 때 의창창(義昌倉)을 설치하였으며, 숙종 때 하동군에 이속시켰다.
이 지역은 지리산의 천왕봉(天王峰) 남쪽의 섬진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어 하동ㆍ구례ㆍ진주 등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하동이나 옛 지명인 소다사는 모두 ‘하천의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중국의 악양루(岳陽樓)와 관계있는 봉황대(鳳凰臺)ㆍ고소성(姑蘇城)ㆍ한산사(寒山寺) 등의 유적이 있었다. 지금의 악양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참판댁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초가집, 유물 등 드라마 '토지' 세트장도 조성되어 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평사리가 위치한 지명인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여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다.
위치 :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66-7에 있다.
정금정
하동범왕리,河東凡旺里 - 경상남도 기념물 제123호
하동범왕리 푸조나무는 높이 25m 둘레 6.25m로서 수령은 약 600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속세를 등지고 지리산에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에서 움이 터 자란 나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고운선생은 입살할 때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앞 개울가 바위에서 세상풍진에 대하여 더러워진 귀를 씻고 떠났다고 하여 후세사람들은 그 바위를 "세이암"이라 부른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의신 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에는 ‘세이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이며, 여기서 최치원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
수함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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