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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4년 04월 23일 화요일
# 산행지: 경북 구미 금오산(현월봉)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이 조화되어 경관, 조망 산행
# 산행거리: 10.27km 04시간57분
# 산행루트: 금오산주차장 - 도선굴 - 대혜폭포 - 할딱고개 - 오형석탑 - 마애여래입상 - 약사암
금오산(현월봉) - 금오산성 - 주차장
금오산(현월봉)
금오산(金烏山)의 높이는 976.5m로, 기암 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이 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하였다.
금오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금오산의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자처럼 생긴 것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인데,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도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려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구미시의 성장과 함께 관광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좁고 긴 계곡 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가 있으며 구미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계곡 안에는 고려 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세운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일명 '금오서원(金烏書院)'이라고도 한다.
케이블카가 닿는 중턱에는 대혜폭포[大惠瀑布, 이칭: 명금폭포(鳴金瀑布)]가 있다.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고 새겨진 27m 높이의 작은 폭포이나,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폭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앞에는 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는 도선굴(道詵窟)이 있고 해운사(海雲寺)와 약사암(藥師庵)의 절도 있다.
정상의 암벽에는 1968년 보물로 지정된 4m 높이의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말기에 쌓았다는 석성인 금오산성은 북쪽만 트인 천험의 요새로 ‘성안마을’이 있다. 이 산은 1970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운사,海雲寺 해운암(海雲庵)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고, 1925년 중창하여 해운암(海雲庵)이라 하였으며, 1956년 3월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고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後佛幀畵)·칠성탱화(七星幀畵)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만든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이 있는데, 이를 석조수행대사입상(石造修行大師立像)이라고도 부른다. 또,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명금폭포(鳴金瀑布)가 있고, 뒤쪽 산에는 도선굴(道詵窟)이 있다. 도선굴은 도선국사가 머물렀고, 길재(吉再)가 세속을 피하여 은거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도선굴
도선굴은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도선 대사가 도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통일신라의 승려인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처음 도입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도선굴은 고려의 대각국사와 야은 길재 등이 찾아와 은거할 만큼 절경이지만, 오랜 세월 오르는 길이 없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37년에서야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구미 면장과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통로를 내고 동굴 입구 벽에 기록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금오산 도립공원에서 출발해 50분 남짓이면 도선굴에 이를 수 있는데,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워 주의가 필요하다. 도선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구미공단과 낙동강, 해평면 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굴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28m 높이의 대혜 폭포가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쏟아낸다.
대혜폭포
대혜폭포[大惠瀑布, 이칭: 명금폭포(鳴金瀑布)]가 있다.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고 새겨진 27m 높이의 작은 폭포이나,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폭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오형석탑
오형석탑은 손자의 병이 하루 빨리 나을것을 바라는 마음에 석탑을 시작하셨는데,
석탑을 쌓는 도중에 손자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하니...?
마애여래입상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龜尾 金烏山 磨崖如來立像)은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 입상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보물 제490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金烏山 磨崖菩薩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보살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다. 상(像)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상으로 처리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진 상가의와 그 아래로 내려진 “U”형의 상의(尙儀), 양팔에서 내려진 옷자락 등 모두 묵직하게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두광, 신광 모두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신광은 보주형(寶珠形)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입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 부각(浮刻)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55m, 몸 높이는 4.175m, 대석이 5m의 크기이다. 입상 전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주초(柱礎)도 있고 기와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에도 목조가구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약사암
약사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구미 금오산(金烏山) 정상(977m)의 약사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창건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618년(광해군 10) 간행된 『일선지(一善誌)』와 1799년(정조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이 고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95년(고종 21)의 『영남진지(嶺南鎭誌)』에는 약사암에 관해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藥師庵重修記)」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이안하고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修道庵)과 황악산 삼성암(三省庵)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적고 있다. 약사암의 약사전 내부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 있다. 불상 뒤편에는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약사암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1968년 지정)이 조각되어 있다.
금오산성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km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성을 쓸쓸이 지키고 있다.
#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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