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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4년 08월 05일 월요일
# 산행지: 1박2일 행복한동행 식구들 과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00.00km
# 산행루트: 백무동 - 장터목 - 천왕봉
내려서면 더 그리운 지리산
돌아서면 더 그리운 지리산
골짜기마다 엄마 품 같은
짝째기 엄마 젖무덤 같은
지리산, 저 언저리에 살고 싶다.백무동 유래(百武洞 由來)
백무동은 무속인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반야봉이 문수보살이 자리한 불교의 성지라고 한다면 천왕봉은 그보다 먼저 자리잡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의 보고라 할까요, 지리의 산신령은 용유당부터 시작하였을 겁니다. 거기서 기돗발이 안 받을 경우 그들은 이 하당下堂인 이 백무동까지 올라옵니다. 조금 더 영험함을 받으려면 다시 중당中堂인 제석봉 까지 올라가고...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 (조구명 1724)
거기서도 여의치 않을 경우 상당上堂인 천왕봉까지 올랐다고 하죠, 그러니 이 백무동은 그들의 베이스 켐프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유교에 쩌들은 선비들에게는 음사淫祠였고 질시疾視의 대상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낯설기만 한 곳이 청계도인 양대박(1541~1592)에게는 삼가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참샘
1790년 <이동항>선생의 [방장유록]
(백무당을 지나)
참샘을 지나 15리를 걸어 고갯마루에 올랐다. 천왕봉을 둘러보니,아직도 하늘의 한복판에 있었다.
일행 모두 웃옷을 풀어헤치고 서늘한 바람을 쐬었다. 나는 피곤하여 풀 위에 누었다.
배도 고프고 몸도 아팠다. 결국 그릇들을 풀어 점심을 먹고 한잠씩 잤다.
잠을 깬 뒤 능선을 따라 걷다가 길을 바꿔 남쪽으로 걸어내려갔다.
길이 점점 평탄해지면서 편히 걸을 수 있었으나, 종종 길이 끊겨 매우 위험하였다.
그렇게 10리를 걸어 제석당에 이르렀다.
제석당 역시 판잣집이었다. 그곳에도 얼굴을 희게 칠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돌부인을 모셔놓고 있었다.
산세가 서북쪽을 향하여 얼굴을 드러내 놓고 이미 절반이 넘게 올라온 산높이였다.
그래서 호남과 호서지방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확 트여 있었다.
제석당 옆에 잇는 샘물에서는 찬 물이 돌 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물 성질이 매우 셌다.
그것을 그냥 마시면 금방 배가 아팠다. 그래서 솥을 걸고 물을 끓여서 각자 마른 목을 축였다.하동바위
제석봉으로부터 내려온 한 줄기 능선 끝에 위치한 이 바위는 높이 약13m, 둘레 약 15m의 크기를 보인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도 이 바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1610년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
일 시 : 1610년(광해 2) 09월 02일 ~ 09월 08일
9/4 : 4일(을사) - 군자사 - 백모당 - 하동암(우리동) - 옛제석당 - 제석당
말을 놓아두고 나막신을 신고서 따라온 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방곡(方谷)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비로소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올라 지나온 곳을 굽어보니 점점 높고 멀게 느껴져, 이른바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탈길을 따라가는데 해를 가린 나무들이 거의 수십 리나 늘어서 있었다. 바로 우리동(于里洞)이었다. 우리동 중간쯤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은 조금 움푹하였는데 ‘하동암(河東巖)’ 이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하동태수가 이곳에 이르러 지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바위 아래서 묵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1586년 양대박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일 시: 1586년(선조 19) 08월 02일 - 09월 12일
9/7 : 초7일(무술) - 천와봉 - 제석신당 - 하동바위 - 백문당 - 군자사
오후가 되어서야 구름이 조금 걷히고 비도 잠시 그쳤다. 산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햇빛이 구름장 사이로 비추었다. 이리저리 거닐다가 내가 먼저 산을 내려가니 이행이 모두 따라나섰다. 중간에 잠시 하동바위에서 쉬며 물을 마섰다. 백문당에 이르렀는데도 산상의 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장터목
장터목은 문자 그대로 장이 서는 고갯마루이다. 옛날에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물교환을 하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팔았다고 한다. 시천 또는 마천에서 최소한 다섯 시간 이상을 그것도 험하고 가파른 길을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장터까지 왕래했다고 하니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엄연히 장이 섰던 곳이다. 현재는 언덕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운영하는 대피소가 위치해 있다. 장터목대피소는 주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으로 특히 천왕봉 일출을 보러가기 위하여 하룻밤 묵는 곳이다.
장터목에서는 천왕봉 쪽으로 제석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함양 백무동 쪽으로는 내림폭포가, 노고단 쪽으로는 연하봉과 삼신봉이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또 산청 중산리 쪽으로도 갈 수 있다. 제석봉에는 원래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1960년대에 도벌과 산불로 황폐하였다. 그래서 고사목이 즐비하며, 장터목대피소 아래에 위치한 샘물이 마를 수도 있는 원인이 되었다.
장터목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말기에 왜적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는데, 조정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왜적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성장군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집하여 죽창, 농기구 등을 무기로 하여 장터목에 진을 치고 지키게 되었다. 왜적이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자 함양, 운봉, 인월 등지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패잔병들이 장터목 고개를 넘어 도망치던 중 장터목에 진을 치고 있던 성장군이 이들 패잔병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장터목 대피소(1,645m)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위치한 장터목 대피소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 교환과 물건을 사고팔던 장(場)이 섰다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1971년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지리산 산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 1997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장터목 대피소에서는 2005년 10월 18일 '한국의 명산 시리즈(두번째)'우표가 발행된 날부터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제공하고 산행의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로 현지에서 관광우편날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현지 날인 서비스를 시행하였으며, 이곳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은 장터목대피소 관광우편날짜 도장이 찍혀 산청 시천 우체국을 통해 전국으로 배달된단다. 대피소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20여 미터 내려가면 산희샘(장터목샘)이란 식수가 있다.# 산행영상
#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