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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화암사숲길과 신선대(성인대)전국 산행기 2024. 10. 10. 08:27
# 언제: 2024년 10월 08일 화요일
# 산행지: 강원도 고성 화암사 금강산 신선대(성인대) 가을여행 우중산행
# 산행거리: 5.31km 02시간 53분
# 산행루트: 화암사 - 소나무매바위쉼터 - 신선대 - 신선암 - 낙타바위 - 고래등바위 - 시루떡바위 - 수바위 - 화암사
금강산 신선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동요 ‘금강산’의 노랫말처럼 고운 옷을 계절별로 갈아입어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나뭇잎이 지면서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이 뒤덮이므로 금강산(金剛山)이라 한다던데, 이 계절 봄에 금강산의 남쪽 끝자락에 맨발나그네 되어 안겨 본다.
금강산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그리고 통천군 의 일부에 걸쳐 있으며, 남북의 길이가 60km이며 동서로 40km 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금강산이 일만이천 봉인지는 모르 겠으나 설악산과 금강산을 구분 짓는 미시령을 경계로 금강산의 첫 봉우리인 신선봉을 비롯하여 향로봉, 칠전봉, 마산봉, 상봉이 남한 쪽에 있어 금강산의 품에 못 안기는 아쉬움을 조금은 풀 수 있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쉽게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금강산 신선대!
금강산 화암사 는 고성군에 속하지만, 속초와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고, 주변에 한화리조트, 델피노 리조트 등이 있다.
사찰은 설악산 자락에 있는데 설악산 화암사가 아니고 금강산 화암사 이다. 신라 혜공왕 때 금강산에 불국토를 이루려는 진표율사가 금강산의 동, 서, 남, 북에 각각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남쪽에 창건한 사찰이 화암사이다. 그래서 금강산 화암사!
지금은 갈 수 없는 금강산이지만 금강산 화암사에 가면 천 년 전의 금강산에 발을 디딜 수 있고, 장엄한 울산바위와 마주하며 가슴 떨리는 환희에 취할 수 있다.
화암사 숲길은 마냥 쉬운 산책길이 아니다. 시루떡 바위에서 신선대까지 1km는 경사가 급한 산길이다.
추운 날씨라면 몰라도 땀도 나고 힘들어서 불평이 나올 수 있다. 등산화 필수!
신선대는 아주 넓다. 신선들이 많이 내려와서 충분히 놀 수 있을 만큼.
신선대 왼쪽으로는 속초시와 동해 바다가 보인다.
옛날에는 화암사가 있는 지역의 신선봉(1,207m)은 금강산 최남단의 금강산 제1봉으로 금강산 1만 2천 봉의 1번째 봉우리로 금강산 영역이었으나 2003년 설악산 국립공원에 편입되어 지금은 북설악이라 부른다.화암사는 금강산의 1만 2천 봉 8만 9 암자 중 1번째 되는 암자로 화암사 일주문 에는 금강산 화암사로 되어있다.
수 바위(쌀바위)는 화암사 앞에 우뚝 솟은 왕관 모양의 우람한 바위로 쌀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옛날에 시주가 어려운 산속 사찰 화암사 스님들이 수바위 구멍에서 지팡이를 3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화암사를 찾아온 객승이 욕심을 내 지팡이를 6번 흔들어 쌀 대신 피가 나왔고 그 후로 수 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욕심을 내지 말라는 전설이다.
수 바위를 지나면서 완만하게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간다. 시루떡 바위는 그 모양이 마치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아 올린 떡 모양으로 생긴 바위이다. 화암사 지역은 쌀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신선대(성인대)는 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신선바위(성인 바위)이다.
신선대는 신선(성인)이 거북이와 함께 미시령 쪽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선대(성인대) 삼거리에서 신선암, 고래등 바위까지 이어진 길로 50분 정도 걸려 갔다 올 수 있다.
신선암은 수백 명이 앉아도 될 정도로 크고 넓은 바위로 전방으로 울산바위가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울산바위는 대자연의 기암절벽 위용을 보여준다.
고래등 바위에서 신선암 쪽을 바라보면 마치 중세 성벽처럼 보인다.
신성대, 성인대, 금강산 화암사 645m
신선대는 설악산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하며 금강산 일만 이천봉 의 첫 봉우리라는 신선봉 아래에 자리 잡고있는 해발 645m의 봉우리입니다. 신선대는 북설악 일대의 장쾌하게 펼쳐지는 전경과 동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며 특히 울산바위를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낙타 바위와 함께 버섯바위, 마당바위, 수 바위, 시루떡 바위, 해골 바위,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눈요기, 거리를 제공해 줍니다.화암사(禾巖寺)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토성면 화암사길 100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 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국가유산은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수바위
“수바위“ 신라36대 혜공왕(惠恭王) 5년 진표율사가 769년에 창건한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위치한 수바위는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 절의 역대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계란모양의 바탕위에 왕관모양의 또다른 바위가 놓여있는데 윗면에는 길이가 1m 둘레가 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바위 이름의“수”자를 수(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 수(秀)자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바위의 전설을 보면 화암사는 민가와 달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절에 사는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말하였다, 잠에서 깬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을 생각하며 노인이 시킨대로 했더니 두 사람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없이 편안하게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객승(客僧)한 사람이 찿아와 이 절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고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객승은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 이라는 어뚱한 생각을 하고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탓에 산신(山神)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 후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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