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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병암,선녀굴,미타봉지리 산행기 2025. 3. 2. 13:51
# 언제: 2025년 03월 01일 토요일
# 산행지: 은병암, 선녀굴, 미타봉 , 오후시간에 비온다해 짧은 루트의 지리의 품속으로 들어간다...ㅎㅎㅎ
# 산행거리: 6.03km 05시간20분
# 산행루트: 송대마을 - 은병암 - 선녀굴 - 직등(미타봉,상내봉) - 상내봉능선 - 송대마을
집터 뒤에 있는 은병암 강시영 석각
隱屛岩 姜時永(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은병암(隱屛岩)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岩)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년(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조방목(國朝榜目)
☞ 상기 은병암과 강시영 글은 <도솔산인>님 블로그에서 가져 옴
은병암 터에 새겨져 있는 대자 음각
지리산국립공원 내 '大'자 석각에 대하여
대학 연습림(국유림)과 사유지의 경계
20년 10월 04일 동부칠암자길 산행 하며 하산길 황새날등 '大'자 석각
선녀굴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 석굴이 있단다. ...<선녀굴 추정>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세 승려와 함께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득도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 이름이붙은 곳이라 한다.조금 뒤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말을 건다.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법공은 눈짓을 하여 말을 삼가하라 시늉하니,이를 눈치 챈 듯하납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위로하였다."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첫날이라 시험삼아20리 길을 걸었다. 피곤하여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깼다. 달빛이 산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기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선녀굴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던 전설이 있으나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해발 약 1000m에 위치한 선녀굴은 마지막 여성 빨치산이었던 망실공비 3인 부대인 정순덕, 이홍이, 이은조 3인방이 10여년 동안 은거해 있었던 곳이며 여기서 정순덕과 함께 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은조(45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가 2월 토벌대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963년 11월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증언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선녀굴 암자터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였던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미타봉(상내봉, 와불산)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
(김종직 선생이 의론대에 올라 "향로봉, 미타봉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고 한건 아마도 용유담에서 설명을 듣고 올라왔기에 그렇게 쓴것이라 생각된다. 용유담에서 보면 향로봉과 미타봉이 부처님의 다리 아래에 있는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론대에선 다리와 얼굴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산행지도
#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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