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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공다리골(허공달골),지산대,두류암터,청이당터,산청(진주)독바위와불산(상내송),벽송사
    지리 산행기 2020. 8. 6. 14:43

     

    # 언제: 2020년 08월 04일 화요일

    # 산행지: 지리 허공다리골,청이당터,진주(산청)독바위,새봉,벽송능선,산행

    # 산행거리: 14.26Km 10시간05

    # 산행코스: 광점동주차장 - 강아리수퍼 - 갈림길 - 다리 - 절터 - 지산대 - 독가촌(어름터) - 품개동

    허공다리골 - 의병장석상용묘소 - 두류암터 - 청이당고개(쑥밭재) - 청이당터 - 선불능선

    진주(산천)독바위 - 새봉 - 사립재 - 삼거리갈림길 - 와불산(상내봉) - 벽송사능선 - 벽송사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꺼비-

     

     

     허공다리골(허공달골)폭포-1

     

     

    허공다리골(허공달골)폭포-2

     

    허공다리골(허공달골)폭포-3

     

    허공다리골(허공달골)폭포-4

     

     

    산청(진주)독바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광점동 주차장(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서 바라본 벽송사,(상내봉)능선...

     

     

    허공다리골(허공달골)과 사립재골이 만나면서 어름터골을 이룬다지만, 공식적인 지명은 의탄천으로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광점동 고개를 지나 어름터(독가촌)방향으로 걷는다...

     

     

     

     

     

     

     

    광점동고개 양 방향으로 즐비한 펜션 들...

     

     

     

     

     

     

     

     

     

     

    이지점이 어름터(독가촌)방향이다...정현님 즐거운 표정을 지은다...

     

     

     

     

     

     

     

     

     

    어름터골 철다리

    2011년 8월 지리산 일대를 휩쓴 태풍 무이파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데, 통행에 별 지장이 없어서 그런지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그전엔 두 가닥의 비상활주로용 철판(동그랗게 구멍난 철판, 아나방)이 설치되어 수십 년 동안 다리 역할을 했다는데, 허공다리골이라 부르기도 하는 허공달골, 골짜기가 넓어 허공에 걸린 달이 아름답게 보이는 골, 이라 허공달골이라 하다, 허방다리(구멍난 다리)가 생기면서 허공다리골과 허공달골로 뒤섞어 부르지 않았을까...?

     

     

    다리를 지나며 바라본 허공다리골(허공달골)...

     

     

     

     

    방치되어 있는 범종...

     

     

     

     

     

     

     

    아마 절을 지을려고 터를 닦았는데, 절은 짓지 못한것같다...

     

     

     

     

    우측 계곡에 멋진 정자 하나...

     

     

     

     

    그리고 폭포...

     

     

     

     

    여기서 쉬었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현 이 위치를 다들 지산대로 알고 있다...아닙니다...공부를 하고 이 지점에 대해 올리겠습니다...지산대 는 이 지점에서 5-10분 거리 지점에 있습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바위 틈의 글...꼭 공부를 해야겠다...

     

     

     

     

     

     

     

    지산대,芝山臺    지리 10대는 아니지만 지리 50대엔 그 이름을 올렸다...!

     

     

     

     

     

     

     

     

     

     

     

     

     

     

     

     

    아침 산행에 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힘...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

     

     

     

     

     

     

     

     

     

     

     

     

     

     

     

     

     

     

     

    여기가 어름터(독가촌)방향...

     

     

     

     

     

     

     

     

     

     

    유명한 어름터(독가촌)

     

     

     

     

     

     

     

     

     

     

     

     

     

     

     

     

     

     

     

     

     

     

     

     

     

     

     

    독가앞 계곡을 건너서 계곡 안으로 접어들며 갈림길이 있는 합수부로 향한다. 독가에서 합수부까지는 40여분 소요된다. 등로는 계곡 우측을 걷다가 다시 좌측으로 건너서 이어지고, 다시 계곡 우측으로 건너서 합수부까지 이어진다.

    합수부, 우측에서 흘러드는 우골을 건너 우측으로 사면을 오르면 진주독바위 쪽과 청이당고개 쪽으로 등로가 분기된다.

     

     

    어름터 골짝 주변 지형에서는 특히 계곡을 건너는 횟수가 중요한데, 첫번째 건너면 향운대 가는 길이 우측으로 갈리고, 두번째 건너면 바로 넘어 대판골이 있고, 세번째 건너면 쑥밭재 올라가는 두 산길이 있고, 네섯번째 건너면 사립재골…



     

     

     

    우측방향 향운대 오르내리는 갈림길...

     

     

     

     

     

     

     

    오미자...따 먹었는데...맛있다...

     

     

     

     

     

     

     

    품개동 마을터 - 이 곳 주위에는 곳곳에 대숲과 화전밭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석축들이 산재해 있으며 규모도 상당히 넓고 크다.

     

     



     

     

     

     

     

     

     

     

     

     

     

     

     

     

    우골은 허골다리골,허공달골의 연속이며 청이당 방면으로 물길이 이어진다. 허골다리골,허공달골을 건너 두 계곡 사이의 능선을 바로 오르면 능선길과 허공달골 사면길의 두 갈래 길이 놓여져 있다. 능선길은 새봉에서 청이당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 태극길이고, 우측 길은 청이당으로 달려가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 사면길이며 보통은 이 길을 자주 이용할것같다.

     

     

     

     

    허공다리골,허공달골 아름답고, 멋진폭포...

     

     

     

     

     

     

     

     

     

     

     

     

     

     

     

     

     

     

     

     

     

     

     

     

     

     

     

     

    멋진 폭포 구경, 눈 호강 하고 좌측방향의 등산로 진입...

     

     

     

     

     

     

     

     

     

     

     

     

     

     

     

     

     

     

     

    한말 의병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장군 묘

     

    산소의 위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광점동에서 2시간 가량 올라가면 등산로 옆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초라하나 후손들이 관리를 한 것 같다. 비를 세운 것은 1983년(辛酉) 정월 초10일 세웠다고 되어 있네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태생의 한말 의병장으로,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 고제량(高濟亮), 문태수(文太洙) 등과 제휴하여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별명은 비호장군으로, 일본군마저 공포에 떨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실상사전투와 지리산 쑥밭재, 벽소령 및 삼성재전투 등이 있다.

     

     

     

    실상사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석상용은 190842950여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습격하였다가 접전 끝에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1일 마천면 도마리 서당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려 하였으나, 면장 노지현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석상용 의병부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1912년 석상용이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이 일로 석상용은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 병마에 시달리다 192010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1921 - 前面長盧公址鉉永思碑, 1983.

     

    김상수, 함양금석문총람, 함양문화원, 2004, 242-244쪽 - 김성진·추경화,함양항일투사록, 함양문화원, 2007, 129-135쪽 - 조동걸명나라 후예 석상룡의병장의 지리산 전적지, 우사 조동걸 전집, 역사공간, 2011.조용욱, 명나라 후예 석상룡의 지리산 의병부대, 우리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지리산편, 역사공간, 2004.

     

     

     

    석상용선생 집터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 현재 주소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313

     

    위치 고증 -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전면장노공지현영사비,에 석상용의 의병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집터와 관련해서는 석상용의 손부 이방강(1942년생)의 자문을 받았다. -퍼 온 글-

     

     

     

     

     

     

     

    의병장 석상룡 선생(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석상룡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성삼재, 벽소령, 쑥밭재 전투 등을 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5년 간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생의 13대 조부가 석성石星이라는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이여송의 군대가 조선을 지원토록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결국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으로 처형되고 그의 자손들 또한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맏아들 담潭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조선에서 살게 하였는데 이 석상룡 대장이 바로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역사의 인물의병장 석상룡 선생 묘소가 관리도 되지않고 방치되어 있는지 의문이다...국립공원 관리공단 생각이 너무 부족하지않는가...?

     

     

     

    석장군묘를 내려와 편한 길을 잠깐 걸으면 큰 바위가 길을 막는다. 이 지점 큰 바위 부터 두류암지 인것 같다.

     

     

     

    유몽인(柳夢寅)지리산 산행록(遊頭流山錄 1611) 어르신이 400년전 서술해 놓으신 두류암지 대에서 바라본 산행기 기록에서 두류암지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 보면...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함양 휴천면 송전리 마적동에 있던 암자)을 지났다. 나뭇가지와 넝쿨을 잡고 겨우 올라가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지며 힘들게 오르락내리락 하니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강제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아무리 꾸짖어 금하더라도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길을 가거나 모여 앉아 쉴때는 떠들고 웃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어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지 않겠는가?

     

     

     

    드디어 두류암(頭流菴,유몽인일행의 코스로 볼때 두류봉 근처 향운대는 아닌듯)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듯 하여 저녁 내내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어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禪房)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최화수님은 지리산 1994(최화수기자 대하르포) - 하동코스 중..지계곡을 건너면 바로 비탈길을 만난다. 이 비탈길을 한동안 오르면 등산로는 남쪽(좀 전의 지계곡과 같은 방향)으로 꺽어진다. 중략''' 갈림길과 마주치면 무조건 오른편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꺽으면 불과 20여m 지점에 40~50명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에 안성마춤인 넓은 반석이 있다. `전망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휴식을 하면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것도 독특한 맛이있어 좋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 뿐인데 가을철에는 현란한 단풍의 색체가 눈부신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최화수님께서 25년전 1995년에 서술하신 내용이다. [빌려온 글]

     

    - 아마 함께 하신 산우님 들께서는 위치를 알것이다 -

     

    산행 과 탐구를 하시며, 위 사진 속에 있는 분들의 느끼는 마음을 보자면 두류암지, 그리고 두류암에서 생활하신 스님들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다는 것이다.[사진 속에 있는 분들 존경 스럽다]

     

    - 답 두류암지 산행에서는 시간 좀 가지고 공부를 해야겠다 -

     

     

     

    우리의 지리산은 어떠했을까, 죽어 천년이라는 제석봉 고사목도 인간의 인생사인 오십년을 못 넘긴다. 사백년전의 폐사지를 탐구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례를 생각한다. 두류암은 지리산의 명칭을 가진 암자였다. 기록에는 남아있는 암자였지만 세월은 두류암을지워 버렸다.

     

     

    지리산 속에서 만나는 석축은 구분이 간다. 화전민이 일구운 석축은 절터에서 만나는 석축과 비교해 허술하다. 폐사지의 탐구에 있어 제일 기본적 탐구는 지형과 주추돌과 기와장이다. 일단 절터라는 곳은 추성 마을민의 구전에도 전해지고 다수의 기와장 발견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석축은 높이 20m의 등고선 안에 4단으로 쌓여져 있고 가장 넓은 중앙의 터를 본당위치로 짐착한다. [두류암지 사진 과 글은 공부를 하기위해 빌려왔습니다.]

     

     

     

    우린 이번 산행에 알고는 있었지만 지나쳐 버려 아 쉬었는데, 담 기회 에서는 꼭 눈으로 확인 해야겠다...

     

     

    온전한 돌확은 세개를 확인했고...[빌려온 사진 글]...[감합니다.]

     

     

     

     

    구들장 같은 평평한 돌도 끄집어 낸다...[빌려온 사진 글]...[감사합니다.]

     

     

     

     

    전망대 아래 부터 펼쳐진 기와 파편은 길이 100m안에 널브러져 있다...[빌려온 사진과 글]...[감사합니다.]

     

     

     

    본당 마당 위 습지에는 샘터라 짐착대는 축대밑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있다. 축대와 축대(석축) 사이로 오르내리는 길이 돌사이에 놓여있고 작은 공터들은 위아래 옆으로 이어져 있다...[빌려온 사진과 글]...[감사합니다.]

     

     

    잘 다듬어진 돌확은 모양이 선명하게 시간을 담고 있다. 깨어진 돌확 하나는 촬영이 안됐다...[감사합니다.]

     

     

    석축 아래 물길(배수구)로 짐작되는 시설이 남아있다. 주추돌을 찾으러 심층탐구를 했지만 세월의 깊이에 파 묻혀 발견 못했다. 길을 이으며 부도탑에 올라간다...[빌려온 사진과 글]...[감사합니다.]

     

     

     

     

    최화수님은 지리산 1994(최화수기자 대하르포) - 하동코스 중...전망대에서 연전히 평탄한 오솔길을 잠시 돌아가면 절터를 만난다, 추성동의 한 불자가 사찰 복구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잡초만 무성하다,

     

     

     

    지리산365일에 소개된 부도탑이다. 그때는 넘어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이 조립해 놓았다 신다.

     

    두류암터 부도탑

     

    예전에 법성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이 두류암터에 수양처를 짓고 계셨다고 합니. 그러다가 수십 년전 가까이 있는 향운대(일명 영감절터 또는 춘삼이절터)로 거처를 옮겼다고 전해지나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그 향운대마저2000년대 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고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문화재청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그런데 지난 번 필자가 답사한 바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법성 스님 다음에 다른 분이 또 기거를 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그 분이 춘삼이 인지 혹은 영감 님인지...

     

     

     

    김영조(1842~1917)는 1867년 약관의 나이에 유두류록을 남겼습니다.("언덕을 넘어 두류암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라고 이 부근의 정경을 묘사했습니다.

     

    - 빌려온 글 -

     

     

     

    두류암지(頭流庵址)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6

     

    # 문헌에서의 두류암

     

     

    # 천령지(天嶺誌) 鄭秀民 編

    정수민(鄭秀民)이 효종 7(1656)에 편찬한 함양(咸陽) 지역의 읍지(邑誌)로써,저자 정수민이 평생동안 직접 답사하고 수집한 것을 작고 2년 전에 쓴 함양군의 옛날 군지이다. 편자 정수민(鄭秀民, 15771658)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일두 정여창의 증손이다.

     

    [기록내용 및 해제]

    두류암 군자사동쪽 30리 지점에 있다.동쪽에 송대가 있는데,운치가 그윽하고 한적하다.지금은 없다.[頭流庵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 幽閑(今無)]

     

    두류암의 폐사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써, 이후 역대로 간행 된 함양군지에서는 두류암의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참고로 천령지 이후 역대 함양군지 발간 역사는 1788년 경.1956.1981.1995.2012년 5차례 정도이었다.

     

    # 함양군사(咸陽郡史)

    2012년 함양군이 주관하고 함양군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함양의 역사.문화.인물등의 향토지로써,역대에 발간된 함양군지(咸陽郡誌)들을 저본으로 하였다.

     

    [기록내용]

    郡史 3권 문화 편의 없어진 절(弊寺) 편에서 두류암 추성(頭流庵.楸城)”이 폐사지 목록에 있다.

     

    역대 발간된 함양군지에서는 보이지 않음에도 여기서는 간략하게나마 언급을 해 둔 것을 보면 천령지두류암부분을 참고한 듯 하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1582~1610년에 걸친 일기형식의 기록.

    내용 - 15971124/정유년 만력 25, 선조 30(1597)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선인들의 유산기 기록(이하 인용한 유산기 문장들은 옛 산행기방에서 본문보기가 가능하기에 관련 문단만 제시한다.

     

    # 변사정 유두류록.1580(선조 13) 4.5~11.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1610(광해 2) 92~ 98.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 몽인 두류산록. 1611(광해 3) 329~ 48.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 김영조 유두류록. 1867(고종 4) 826~829.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 배찬裴瓚 유두류록. 1871(고종 8) 94~98.

    비현(扉峴)*[현 사립재]을 넘으며 굽어보니 두류암(頭流庵), 벽송암(碧松庵)인데 이는 함양(咸陽)의 경계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에 이르렀는데...

     

    # 권도용 방장산부. 1922(일제강점기) 422~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 폐사지의 형승

    대략 천 여평이 훨씬 넘을 듯 한 사지의 군데 군데 기와파편이 너부러져 있으며,계단식으로 층층히 쌓은 축대들과 샘터의 흔적은 물론 배수구의 모습도 완연하게 남아있다.생활도구로 활용했던 돌 절구며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멧돌등의 석조물도 보인다.

     

    본당 터 추정지 북쪽에는 의탄천(일명 허공다리골)의 계곡미를 완상할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조망대가 있기도 하다. 이부분은 유몽인이 언급한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문장과 일치한다. 한편 본당터의 남쪽에는 석종형 부도 1기가 있어 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해 주기도한다.

     

    # 절집의 창건연대 및 폐사연대 추정.

    절집이 남긴 관련 문서가 극히 미비하기에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대개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했던 석종형 부도와 진한 흑갈색을 띄는 기와파편등을 참조하면 고려말 혹은 조선초기에 창건된 절집으로 추정이 되며,폐사시기는 1656년 정수민의 천령지에 지금은 없다의 기록과 변사정.유몽인의 유산기를 참고해 보면 조선중기대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유몽인이 다녀온 1611년 이후 약 20~30년 간에 폐사가된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다.

     

    # 두류암 폐사이후 근대까지의 두류암지 현황

    두류암 사하촌 마을 광점동 추성리 사람들은 두류암지 그곳을 두람동이라고 부른다.“두류암동의 줄임말로써 폐사이후 두류암은 일개의 부락명 두람동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두람동에는 근대 70년도 중반까지 사람이 거주했으며,당시 거주자 중의 한 분은 지금도 광점동에 살면서 두류암지 근대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유몽인 이후 250 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쓰여진 김영조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 기록에서 폐허의 절터에 산민들의 집단부락이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절 주변 척박한 골짜기의 환경을 보면 수 십호의 농가와 절집이 공존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하면, 김영조가 언급한 두류암은 당시 절을 명칭한 것이 아니고 일개의 부락명으로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조 4년 후, 배찬이 비현(사립재)에서 보고,하산중에 들러서 쉬었다는 두류암 역시 산간마을의 명칭 이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등은 두류암 지척 상내봉능선 너머의 절집들이다.천령지의 기록에는 이 들 절집들도 금무(今無) 즉 지금은 없다고 했다.

     

    추측컨대,지리적 요소로 인해 한 때는 천왕봉 등정 유생(儒生)들의 숙박장소가 되기도 했던 두류암을 비롯한 지리산 암자들이 배불정책의 조선의 역사에서 견딜 수 없어 사라졌다고 보아진다.

     

    조선 후기,진주민란 을미사변 등 나라의 어지러운 난세를 피해 대책없이 지리산으로 흘러 들었던 조선 유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곳이 두류암 사지이다. [빌려온 글]

     

     

     

     

     

    역시 지리산 하면 산죽 오늘 산행 길 에서도 죽여 주네요...ㅎㅎㅎ

     

     

     

     

     

     

     

    목청 도 눈에 들어와 사진 한장 담아봅니다...오랜시간 산행 하며 처음 보는 목청...

     

     

     

    청이당고개(쑥밭재) - 왜 청이당고개 인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삼장면을 잇는 가장 빠르고 편한 고갯길은 뭘까? 정답은 쑥밭재다. 그런데 쑥밭재의 위치를 물어보면, 날고 긴다하는 속칭 지리산 도사들도 제각각이다. 왜 그럴까?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형도가 문제의 발단이다.

     

    현재 5만분의1 지형도를 보면, 쑥밭재의 위치가 1,315m봉 가까운 남쪽 능선에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형도를 들고 현장에 가보면, 양쪽 어디로도 내려설 수 없는 가파른 능선 길임을 발견한다. 그래서 남쪽으로 훨씬 더 내려간, 독바위 아래 경사도가 제법 부드러운 곳에서 고개를 찾았다. 그것이 현재의 쑥밭재다.

     

    물론 이 고갯길이 옛길인지, 아니면 산악인들이 편의에 의해 만든 산행길인지 모르지만, 상당 기간 동안 양쪽을 잇는 고갯길로 이용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고갯길 역시 한숨을 돌리며 쉬어가기에는, 주변 공간이 부족한 곳임을 숨길 수 없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어떤 길을 이용했을까? 지역 주민들의 말을 따르면,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청이당 지역(산악인들 사이에 아래쑥밭재로 불리는 곳)이 그러한 조건을 다 갖춘 고갯길이라고 한다.

     

    현재의 쑥밭재는 산악인들이 임의로 만든 것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온 쑥밭재와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그 쑥밭재의 유래도 흔히 알고 있는 “쑥이 많이 나는 곳”이 아닌, “하룻밤을 쉬어가는 숙박(宿泊)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취재팀은 그들이 알려준 그 지역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제법 널찍한 공간과 물길을 발견했고, 옛 사람들의 생활용구도 몇 품 찾아냈다. 그 지역 지형적 구조를 잘 아는 전문 산악인들 역시, 옛사람들이 편안하게 쉬어 갈 만한 곳은 그 곳 밖에 없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이제 정리를 하자. 고유한 옛이름을 되찾고, 위치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처라고 생각된다. 우선 현재의 쑥밭재는 그대로 부르자. 대신 아래쑥밭재(옛쑥밭재)는 고유의 이름이 있는 청이당고개로 명명하자. 물론 이러한 제안들은 구속력이 없으며, 사실적 근거가 발견되기까지 한시적으로 사용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부산일보 진용성 기자(2004. 07.22. 09:25)

     

     

     

    청이당 고개(쑥밭재)에서 내려와 조개골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고...

     

     

     

     

    청이당터에서 가까 운 곳에 있는 비박터 - 자연적인 곳 쉬는 공간으로는 최고 인듯...

     

     

     

    청이담터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원문]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위에서) 차지하고 앉자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

     

     

    #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있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터)라고 하는 곳과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거리(약100m)가 있다. 특이한 것은 배찬 선생은 이곳을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 세석을 세적평전(細磧平田)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세석평전 또한 일제가 창지개명했다고 알려진 것도 사실이 아니다.

     

     

     

    세석평전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1...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綠) - 저여원[原]

    2....1545년 황준량의 금계집(錦溪集) - 저여원[沮原] 

    3...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遊頭流綠) - 세석평지(細石平地)

     

    4...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 적석평(積石坪) - [음양수샘 - 외적평(外積坪)]

     

    5...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遊頭流綠) - 세적평전(細磧平田)

    6...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頭流山記) - 세석평(細石坪) - [음양수샘 - 외세석(外細石)]

    7...1903년 안익제의 두류록(遊頭流綠) - 세적평전(細磧平田)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 빌려온 사진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 빌려온 사진

     

     

     

     

    청이담 석축 - 빌려온사진

     

     

     

     

    청이담 석축 - 빌려온 사진

     

     

     

     

    天禮碭(천례탕)추정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빌려온 지도 - 담 산행에는 꼭 공부해야 겠다...

     

     

     

     

     

     

    진주 독바위(산청독바위)

     

    조선시대엔 삼장면과 시천면이 진주군에 속해 있었으나, 1906년 행정구역 정비 때 산청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진주 독바위라고도 부르는 게 아닐까, 산청 독바위의 본디 이름은 옹암(甕巖)이라는데, 이는 독(독아지, 항아리)처럼 생겼다 하여 그렇게 부른 것으로, 함양 독바위 및 하동 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이기도 한데, 함양 독바위(노장대)는 독처럼 생겨서가 아닌 저 홀로 우뚝 솟은 독(獨)바위이며, 하동 독바위도&

     

     

     

     

     

     

     

     

     

     

     

     

     

    진주 독바위(산청 독바위) 오르기전 맛있는 점심 시간을 갖는다...

     

     

     

     

     

     

     

     

     

     

    독바위에 설치된 안전 로프를 이용해 정상으로 고고싱...

     

     

     

     

     

     

     

     

     

     

     

     

     

    자연적인 현상 인줄 알았던 태양무늬 - 누군가 새긴 거라고 함...

     

     

     

     

     

     

     

     

     

     

     

     

     

     

     

     

    진주독바위(산청독바위)위에서 바라본 바위 위 소나무 - 바위 위에서 생명력을 찾고 있다니 - 기가 막히다...

     

     

     

     

     

     

     

    영랑대와 동부능선...

     

     

     

     

     

     

     

     

     

     

     

     

     

     

     

     

     

     

     

    벽송사능선 뒤엔 금대산과 백운산, 삼봉산...

     

     

    두류능선 과 향운대...

     

     

     

     

     

     

     

     

     

     

     

     

     

     

     

     

     

     

     

     

     

     

     

     

     

     

     

     

     

     

     

     

     

     

     

     

     

     

    부부바위(형제바위)

     

     

     

     

     

     

     

     

     

    부부바위(형제바위)에서...

     

     

     

    지리산 최고의 통천문,아쉽다,지나쳐 버렸네,독바위에서 30m지점에 있는데...다음 산행에 공부...[빌려온 사진]

     

     

     

    동부능선과 상내봉으로 진입하는 새봉 능선분기점(1315m)에 도착...

     

     

     

     

     

     

     

     

     

    상내봉 삼거리 조망을 확인 하고...고고싱

     

     

     

     

     

     

     

     

     

     

     

     

    삼내봉 삼거리에서 우측 편으로 조금 가면 오뚜기 바위가 있다 - 오뚜기 바위에서 오르고님...

     

     

     

     

     

     

     

     

     

     

     

     

     

     

     

     

     

     

     

     

     

     

     

     

     

     

     

     

     

     

     

     

     

     

     

     

     

     

     

     

     

     

     

     

     

     

     

     

    상내봉(와불산)을 오른다...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상내봉은 올라가지 않고 우회할 수도 있으며, 간 큰 이들은 바로 상내봉으로 올라가 그대로 내려온다. 함양군 마천면 일대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와불산(臥佛山) 또는 부처바위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함양군에서 세운 와불산(臥佛山)이란 정상석은 철거를 당했으며, 막걸리와 사과를 놓고 절을 하면서 소원성취를 기원하기도, 죄(罪)는 지은 대로 가고, 공(功은 닦은 대로 간다던가...ㅎㅎㅎ

     

     

     

     

     

     

     

     

     

     

     

     

     

     

     

    함양독바위(노장대)와 길게 이어진 솔봉능선...

     

     

     

    상내봉(와불산)정상에서 꿀잠...정현님

     

     

     

    와불산 정상에서 꿀잠...오르고님

     

     

     

     

     

     

    상대봉(와불산)석축 기도처...인듯

     

     

     

    바위비트...

     

     

     

     

     

     

     

     

     

    벽송사능선을 빨치산 능선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능선에는 산죽비트,바위비트,낙엽비트등 비트들이 많습니다. 이 능선을 걷다 보면 동족상잔의 비극이 근 70년이란 세월이흐른 지금도 그때의 아픔이 전해 오는듯합니다. 역시 지리산을 논하면 빼놓고 말할수 없는것들 중에 하나인 게 분명 합니다.

     

     

     

     

     

     

    이위치 지나면 - 장구목이(옛고개), 어름터 독가 및 철다리 위 민가 부근으로 이어지는 갈림길로...

     

     

     

     

     

     

    벽송사와 모전마을(용유담)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안부 사거리, 광점동으로 이어지는 듯한 갈림길이 있으며, 금계 3.8km · 동강 8.9km를 가리키고 있네...

     

     

     

     

     

     

     

     

     

    벽송사 0.7km · 송대마을 2.8km를 가리키는 이정표

     

     

     

     

     

     

    벽송사 나무 장승(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

    원래는 절 아래 입구에 서 있던 것을 보존상의 문제로 이 곳으로 옮겼다. 왼쪽장승이 금호장군인데, 1969년 산불이 났을 때 머리 부분이 타 버려 참담한 꼴이 되어 버렸다. 여장승인데 하필이면... 오른쪽 장승은 남장승으로 호법대장군이다. 툭 튀어나온 눈과 뭉툭한 코, 입 아래 자세히 보면 수염이 있어 남장승임을 단박 알아차릴 수가 있다. 재질은 밤나무이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

    2기(基).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 사찰에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원 경내의 각종 규제와 풍수비보(風水裨補)를 지켜주는 수문(守門)과 호법(護法)의 신장상(神將像) 구실을 한다. 1910년대쯤에 세워졌다고 한다.

     

    재질은 밤나무인데, 왼쪽의 장승은 머리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왕방울눈도 하나만 남아 있으며 코도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입은 홀쭉하게 꼭 다물어 뺨이 움푹 패인 모습과 그 아래 짧은 수염의 형태가 남아 있다.

     

    몸통도 부패하여 반쯤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높이 180㎝에 둘레 125㎝로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고 새긴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오른쪽 장승은 둥근 짱구모양의 민대머리에 공을 박아놓은 듯한 왕눈, 그리고 주먹코의 모습이다.

     

    입모양은 역시 합죽하며 입 주위에 불꽃무늬 같은 수염이 표현되어 있고, 턱밑에도 수염이 있다. 이와 귀는 새기지 않았고, 높이 200㎝에 둘레 130㎝로 몸통에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고 새겨 있다.

     

    이 장승은 그 기능에 따라 과장적이고 질박한 민속적 조각수법의 전형을 보이며, 장승을 절의 수문신장으로 세워 불교와 민속신앙의 습합양상을 드러내는 좋은 예의 하나이다.

     

     

     

     

     

     

     

     

     

    벽송사,碧松寺 위치: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

    대한불교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사적기(事蹟記)가 없어 창건연대 및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현 위치에서 50m 위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 절의 창건 역시 신라 말 내지 고려 초로 보고 있다.

     

    1520년(중종 15)에는 벽송(碧松)이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으며, 6·25 때 소실된 뒤 곧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앙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74호인 벽송사삼층석탑 1기가 있다.

     

    전래되는 설화로는 승려 서룡(瑞龍)의 이야기가 있다. 만년에 이 절에 머물렀던 서룡은 1890년(고종 27)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할 것을 고하였으나, 제자들은 그믐의 바쁜 일이 끝나거든 입적할 것을 청하였다. 정월 초이튿날 다시 입적하려고 하자 제자들은 불공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시 며칠을 미루도록 하였다. 4일에는 “이제 가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제자들을 불러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벽송대사는 정덕 경진1520년에 지리산에 들어와 초암을 지어 거처했다. 후세 사람들이 큰 사찰로 증축하여 벽송이라 했다. 함양군에 속한다. 벽송대사는 지리에 능통하여 수행을 도와줄 명당을 찾다가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어 마침내 법계를 열었다. 전후로 마음을 깨친 사람이 일곱 명이다.

     

    천왕봉의 한 산맥이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를 가서 역류하면서 형국을 맺었는데, 북동쪽으로 들어가 북북동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판천, 송대천은 승룡乘龍이 되고 금대수, 추성뢰는 창문이 되며 종고수, 용유담의 긴 연못은 몇 리나 둘러싸고 흐르면서 현무가 된다. 수효봉과 귀쌍봉이 오도산을 받치고 있어 그 안을 안락하고 밝게 하며 금대산이 화표가 된다. 막는 문과 조성한 터가 평평하고 바르며 온화하고 그윽하다. 지맥은 황토의 언덕이다. 절터 밖에는 모두 험준한 자갈밭이다.

     

    거주하는 승려들이 자연스레 담박해져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량은 청소를 안 하더라도 먼지가 생기지 않는다. 혹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당하니 이런 까닭으로 재물을 꾀하는 무리는 가지 않는다. 표주박을 찬 운수납자나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물녘에 나갈 뿐 암자를 지킬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벽송, 서산, 회당 세 분 조사와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 경암의 벽송암기 -

     

     

     

     

     

     

     

     

     

     

     

     

     

     

     

     

     

     

    미인송과 도인송

    절의 이름은 벽송(碧松) 지엄대사가 중건하여 지어졌다고 하나, 벽송이라는 말이 이 두 그루의 소나무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것이 미인송이고 어느 것이 도인송인지 인터넷이나 신문자료들 마다 달리 설명하고 있었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여서 함양군에 전화를 했다. 시원한 목소리의 여자 직원 분인데 "그게 소나무입니꺼?"하고 되려 나에게 물어 보는 게 아닌가.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소나무라고 설명을 해 드렸더니 "아무래도 벽송사에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네예" 하면서 친절히 벽송사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벽송사에 전화를 하니 여자 보살님이 전화를 받는다. "어느 것이 미인송인가요?"하니 "기울어져 있는 게 미인송입니더"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아하! 내가 왜 이리 바보스러운지... 자세히 보니 호리호리하게 요염한 자태를 하고 있는 것이 미인송(왼쪽)이고, 정자세로 수도하는 도인처럼 떡하니 서 있는 것이 도인송이 아니겠는가. 내친 김에 "이 두 소나무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나요? "하고 물어 보았다. "도인송은 옛날 어떤 스님이 이 소나무의 빼어난 자태가 도인의 풍모와 흡사하다 하여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미인송의 유래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하였다. 나중에 밤에 주지 스님한테 여쭈어 보면 더 소상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허기야 굳이 유래를 모른다고 하여도 소나무의 생김새만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인송

     

     

     

    도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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