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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동릉,천왕굴,상봉,문창대,세존능선지리 산행기 2020. 8. 17. 21:29
# 언제: 2020년 08월 15일 토요일
# 산행지: 지리 천왕동릉,천왕굴,문창대,세존능선. 추억만들기 산행
# 산행거리: 13.12Km 09시간44분
# 산행코스: 순두류주차장 - 중봉골 - 천왕동릉 - 천주암터 - 천왕봉 - 천왕굴 - 천왕봉 - 천왕샘 - 개선문
법계사 - 로타리대피소 - 문창대 - 세존봉 - 세존능선 - 순두류주차장
지리산(智異山) 높이1,915.4m.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동경 127°27′∼127°49′, 북위 35°13′∼35°27′에 위치한 거대한 이 산은 총면적이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山水考)』,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
천왕봉(天王峰, 1,915m)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天柱)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정상에는 청석표주(靑石標柱)와 지리산 산신령을 봉안하는 성모사(聖母詞)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성모 숭상의 유적인 천왕성모의 석상과 마야부인상이 그 옛날 모셔 있었다 하며 토속적 산신 신앙의 거룩한 대상이 되었다 한다.
동서 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거칠 것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조의 기관(奇觀)도 좋거니와, 새벽 동녘 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 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관으로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
그러나 높은 천왕봉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쾌청한 날을 만나보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삼대적선을 한 사람이라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학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월대,日月臺 -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1643년-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로 나와 앉아 피리 연주를 들으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천왕봉 천주,天柱
천주는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같다하여 새겨졌으며 부근에 예전에 일월대와 천주각자 부근에 성모신당이 위치하고 있었다하며, 천왕성모상은 현재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왕 굴
천왕굴은 천왕봉 정상에서 중봉방향으로 바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길이 있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위치한 곳으로 천왕성모와 관련이 이다는 설이 있지만 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이 훼손ㅇㄹ 하여 꼴불견이다.법계사,法界寺 위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208
법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연기(緣起) 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 본 후 천하의 승지(勝地)가 이곳이라 하여 천왕봉에서 약 4㎞ 떨어진 현재의 터에 법계사를 창건 하였다 한다. 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는 좌우로 급박하게 짜여 져서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여 있으니 동틈과 함께 지기와 천기가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는 곳이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소실된 법계사는 조선 시대 태종 즉위 5년인 1405년에 정심(正心) 선사가 중창했으나,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다 1981년 겨우 절다운 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높이 1,40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로서 544년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창건하였다. 1405년에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한 뒤 수도처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6·25 때 불탄 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이 준공되어 절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다.
법계사,삼층석탑
이 석탑은 부처님 진신 사리가 봉안된 탑으로 이 탑과 적멸보궁 앞쪽에 있는 산의 커다란 바위는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배치를 고증이라도 하듯 일본과의 미묘한 관계가 구전되고 있다.
예로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고 하여 여러 차례 왜적이 법계사를 침범 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 왜적 아지발도(阿只拔屠)가 이 절에 불을 지르고 운봉 전쟁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일화는 바로 구전이 허위만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문창대,文窓臺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는 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이곳을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하였다가,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한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문창대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기록은 유람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문창대'라는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그는 일흔이 넘은 1617년에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겼는데,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며 문창대를 언급했다.
이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조선 선비들이 문창대를 유람록에 기록하면서 문창대는 이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성여신보다 앞선 시기인 1489년 김일손도 문창대를 다녀갔다. 그러나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세존암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임을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巘崿)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라고 했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길이 차츰 평탄해졌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에 이르렀는데,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이제 막 파릇파릇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문창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람록으로는 1902년 2월부터 3월까지 40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김회석(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과 송병순(1839~1912)의 <유방장록>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유람록에서 문창대의 험함과 돌우물의 기이함, 최치원의 활쏘기 행적 등을 묘사했다. 그중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을 보자.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
김회석의 글처럼 예전에는 문창대를 최치원이 활을 쏘았다고 해서 '시궁대'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고운대'로 불렀다가 나중에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문창대 바위 위의 돌우물에는 '감로수' 외에도 '세심천', '천년석천' 등의 다양한 이름과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이곳에 부정한 자가 오르면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날이 가물면 이 물을 퍼 나르는데 그러면 곧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서 이 돌우물은 끝내 마르지 않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문창대는 현재 법계사 남쪽 500미터쯤에 있는 세존봉으로 불리는 1368봉이다. 한때 문창대는 법계사 서북쪽 30m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의 답사에서 <진양지>의 '문에서 서쪽으로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으니 최 고운이 놀던 곳이요.'라는 기록과 '고운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 杖屨之所,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라고 새겨진 바위 각자 등을 근거로 그렇게 확정했다.
그러나 <진양지>가 증보 과정에서 실증 없이 보강된 점, 바위 각자 또한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문헌들에서 문창대는 법계사 가기 전의 산봉우리인 지금의 세존봉에 있던 바위로 기록되고 있는 점 등을 살펴보면 지금의 세존봉에 문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병순도 <유방장록>에서 벽계암(법계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저 앞의 봉우리 정상이 바로 문창대입니다. 그런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어 법계사 앞 봉우리 정상이 문장대임을 말하고 있다.석천
중대라고도 일컫는 반석지대에는 석천이라고 부르는 물이 고여 있는 장정 무릎높이의 돌 구덩이 두 곳이 있으며, 주변에는 5-6개의 작은 구덩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구덩이는 오랜 세월 동안 풍우로 인해서 자연적으로 생긴 일종의 바위의 혈(穴)인 것 같은데, 구전에 의하면 이 우물은 7년 대한(大旱)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령스런 샘물이라 하며, 만일 이 샘물을 퍼서 마르게 하면 3일 내에 소나기가 내려 석천의 물이 채워진다는 설이 있어서, 가뭄이 계속되면 이곳에 올라 설천의 물을 퍼 없애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한다.
세존봉능선 문창대 - 작성자 머하유- -빌려온글-
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정해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니 너무 정해진 것들이 많아
일정한 틀을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꼭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게 아닌데
사람들은 이 길을 가야만이
인생이 성공하는 것처럼 말한다.
사랑도 인생도 모든 게 틀이 있는 것은 아닌데
마치 짜 맞추기 시합이라도 벌이는 듯 하나를 향하여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 같다.
인생은 퍼즐과도 같은데 순간 순간이 소중한 퍼즐 한 조각인데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퍼즐은 미완성이 되고 말지만
꼭 인생이 완성되어야 할 퍼즐게임도 있지 않는가?
시간과 경주를 벌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진다.
인생은 그게 아닌데...
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가다가 들꽃 향기도 맡아보고
가다가 파아란 하늘에 양떼구름도 보고 서녘바람 냄새도 맡아보는 거지.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가다가 들꽃 향기도 맡아보고
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가다가 파아란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보고
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산들바람 냄새도 맡아 보는게 어떨까
조금 늦게 가면 어떠랴...
쉬엄 쉬엄 쉬며 가자...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산행 아침식사 장소 산청 덕산시장 건너편 덕천강 이다...산청군 남영로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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