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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流山記 南臺寺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1. 15:08
오두인(吳斗寅) 1624년(인조 2)~1689년(숙종 15)
陽谷集卷之三 / 記 / 頭流山記
余自南來之後。嘗欲一見雙溪。以快平生願遊之志而不可得也。適審災傷。廵歷右道。會于晉陽。田政旣訖。顧謂主牧曰玆行也。出入四十餘郡。覽盡嶺南山川。間或乘戰艦。泛於南海巨濟之間。可謂極山海之大觀。而只以跡阻頭流爲恨耳。今吾與子盍往觀諸。李侯曰此余之願也。今幸有同志。時不可失。乃以十一月初吉乙亥。與主牧遂作雙溪之行。召村督郵金公。亦偕往焉。自本州西行四十里。過鳳溪院。至外家先塋掃拜。仍秣馬于山下。向夕而發。踰黃峴行三十里。投宿于玉溪寺。河東太守李公。亦來會焉。以其地主也。昆陽召募將金緝者。亦追後而至。皆曾與同遊南海者也。初二日丙子。偕晉陽,河東兩太守及金督郵。早發玉溪。踰三牙峴。行四十里。朝飯于岳陽。岳陽卽晉之屬縣也。天開大野。村落瀟灑。太山西峙。帶以長江。江自求禮境出。過于雙溪之下。此爲蟾江之上流。而湖嶺之界也。沿江而上。則猗猗綠竹。夾岸成林。淸光秀色。十里相映。淇澳之興。自不能已也。轉至十里。有大川出自山谷間。流入于江者。花開峽也。由花開峽。過法華灘。渡擧石橋。則洞天深嚴淸絶。入山未半。自不覺胸次之爽然。上七里而到沙門。則嵬然兩巖。並立路左右。皆石刻大書。右曰雙溪。左曰石門。世傳崔孤雲之筆。而字畫甚奇古。僧徒數十。出迎於此。乃下馬而坐。周覽溪山。溪有二源。自神興凝神洞而來者爲右溪。自佛日靑鶴洞而來者爲左溪。二水合流于此。而寺在其間。名以雙溪者此也。舍馬肩輿而上。至雙溪寺。則十尺古碑。立於梵宮之前。盖爲法僧眞鑑銘之。而此亦孤雲所寫者。故世以學士碑稱之。龍蛇筆跡。尙今宛然。眞可謂不朽也。是夕止宿寂默堂。此法寺之右廂。而前有八詠樓。東有學士堂。皆孤雲跡也。初三日丁丑。早食後携同遊數君子。皆乘籃輿。北至數十步。有一古刹。扁以金堂。而西則方丈閣。東則瀛洲閣也。自是而東。直向靑鶴洞。吹笛者一人。吹洞簫者一人。抱琵琶者一人。歌妓一人隨焉。前唱後和。魚貫而上。遠而聽之。怳若上雲樂也。行六七里。有巨石立於路傍。面刻李彥憬洪淵己卯秋八字。登一峻嶺。望一小菴寄在懸崖之間。下臨不測之洞。所謂靑鶴洞也。佛日菴也。緣崖而行。至於菴前。丹崖翠屛。壁立千仞。雙峰秀出。相對左右。在東曰香爐峰。在西曰靑鶴峰。峰之腰。層巖甚奇。俗傳靑鶴常棲於此間。其得名有以也。香爐峰北。有數十丈瀑布。而但見層氷屈曲。水聲轉壑。宛如玉龍上天。殷雷在山。眞奇覿也。日菴之畔。有石臺。臺之石。刻翫瀑臺三字。若使日照生煙之時。坐此而翫。則李謫仙銀河之句。可重詠也。由瀑流而爲鶴淵於兩峰之南。此雙溪左流之源也。還踰靑鶴峰。至峰之南麓。則數三小菴。或存或廢。玉簫靈臺其號也。成佛深院其基也。佛日則一僧棲焉。玉簫則三僧處焉。皆絶粒之流也。下至靑鶴洞下流。則水石轉奇。倍覺神爽。徘徊溪邊。忽見一詩在巖間。其詩曰靑鶴峰前路。澄潭影翠杉。羽仙探勝處。仍號狀元巖。此乃季父手寫詩。而羽仙卽先人號也。先人曾在崇禎辛未。按節于南。嘗遊于此。而季父又於丙戌。以新恩狀元郞。歷觀而去。故其見於詩者如此。今余幸忝魁科。又過于此。不可謂無宿緣也。遂和其詩。以示同遊。竟日忘歸。乘夕而來。是夜仍宿于寂默堂。初四日戊寅平明。出石門。還渡擧石橋。泝流而上。此爲雙溪之右。而來自神興洞者。山回路轉。下臨淸流。或滀而爲潭。或激而爲瀑。境界淸奇。十倍於花開洞。行十五里許。至紅流橋。橋邊之石。刻以三神洞。盖神興,義神,靈神三寺。皆在此流之上云。一溪自西洞。一溪自東谷。西則七佛菴洞口也。東則神興寺沙門也。過橋一里。有巨刹遺基。石砌荒凉。古木成林。僧言此乃神興寺而廢自甲子云。先考遺集中。有神興寺贈太能老師五言近體一首。其詩曰眞鑑傳衣地。孤雲去幾春。客懷添物色。詩句得精神。水石渾依舊。林花自在新。深知第一義。端坐洗根塵。玆歲戊午也。今三十餘年。而昔之儼然壯麗者。變爲狐兎之墟。誠可謂三十年一大變也。彷徨俯仰之間。感愴繼之矣。寺前溪石。甲於山中。閣曰凌波。臺曰洗耳。寺砌之左。有一銅佛立於荊棘之間。其左亦有此象。盖昔時雙立於寺之左右者也。左轉而上後岡。路益險山益奇。由獅子谷。行十里許。巨壑噴流。成一深淵。名曰妓潭。掃石而坐。命妓歌焉。同遊諸人。隨後畢至。相與一?。又轉而上十里。中火于能仁寺。有僧徒數十。而其中號性天者。殊非俗僧也。問答之間。歷誦諸君子遊山之詩。而又言昔在壬申先考之遊此山也。幸而陪隨焉。逮乎丁亥季父之到此寺也。亦能前路焉。而渠實未知余是一家人也。余曰季父之遊去壬申十六年。余之來去丁亥亦五年。而爾以浮雲之跡。皆能作主人。安知非有數存於其間耶。渠亦驚歎。縷縷酬答。皆感舊懷也。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隱井臺也。菴在絶頂。去塵寰最遠。經僧淡煕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隱井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金釘,李尙逸,李震馝,吳斗寅,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初五日己卯。朝發隱井。又東而上。將踰水國峴。石路崎崟。層氷塞川。十步九休。披荊緣崖而行行。見三菴廢在道傍。問諸僧則答以上中下水國寺云。由此而直上東嶺。此所謂水國峴者。登玆北望。則有一玉峰高揷天中。氣象凝嚴。俯臨諸壑者。天王峰也。卽頭流之第一峰。余以今年重陽。自山陰由君子寺。直上天王峰。仍宿其上。看日出於東海。到今指點雲間。還如夢中事也。徘徊嶺上。極目四方。江海縈回。點點羣山。不能殫記。踰嶺而下。石路之崎嶇。山川之奇勝。無異於內山。行役之苦愈甚。而探勝之興。尙未艾也。德山寺僧數十人。替迎而來下未半。有冠松蘿者。來候於溪邊。問其所居則南臺寺也。越溪而西。遂往其寺。午飯而下七八里。有一大溪來自天王峰下。溪與洞皆以新溪名之。下五里許。有新溪村。日已夕矣。止宿于此。四日勝賞之餘。始宿村家。一日之間。仙凡懸殊。回首雲山。不能無悵然之懷。固知世間事無不如是也。初六日庚辰。朝發新溪村。行十五里。則太山之下。深谷逶迤。川流平遠。正是壺中天也。瞻望祠宇隱映於溪邊。此乃南冥曺先生尊享之所。而號以德山書院。實智異南麓也。院門之前。有一間茅屋下臨澄潭者。洗心亭也。亭之傍。又有畵閣枕流者。醉醒亭也。下馬坐于醉醒亭。院儒十餘人見焉。朝飯訖。由時靜門。登敬義堂。具冠帶展謁。而退坐洗心亭。院儒輩設小酌而罷。自院而東行過一村。松栢蒼鬱。此卽先生之故里。而後岡乃衣冠所藏也。式閭而過六七里。路傍有石臺。磨其東崖。刻入德門三字。是爲院之洞門也。又三十餘里。至召南江邊。晉之人來候焉。中火後乘舟而渡。行至龍山。列火而歸。還到晉陽舘。夜已二更矣。仍與同遊僧德俊者。屈指行程。則往還凡六箇日。而自本州至鳳溪院四十里。自鳳溪至玉溪寺三十里。自玉溪至岳陽縣三十里。自岳陽至花開峽三十里。自花開至雙溪寺十里。自雙溪至靑鶴洞十里。又自雙溪至神興寺十五里。自神興至能仁寺十五里。自能仁至隱井臺十里。自隱井至水國峴十里。自水國至南臺寺二十里。自南臺至新溪里十五里。自新溪至書院十五里。自書院至召南三十里。自召南還本州四十里。合三百二十餘里也。
:-♡♡ 지리 ~ 역사 문화방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도솔산인 추천 0 조회 31 20.03.04 09:4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본관이 海州, 호는 陽谷,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父는 이조판서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1648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1651년 공무로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11월 1일~11월 6일까지 5박 6일 동안 경상우도의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의 유람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1년 오두인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 오숙(吳䎘)이 화개동천과 불일암을 유람하였고, 1647년 계부(季父:막내숙부) 오핵(吳翮)이 다녀갔다. 이 세 사람은 특이하게 불일암에서 옥소암과 영대암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왔다. 1647년 이곳을 유람한 계부(季父) 오핵(吳翮)은 불출암과 쌍계사 사이 계곡 바위에 장원암이라는 시를 묵서(墨書)로 남겼는데, 5년 후 오두인이 이 묵서를 발견하고 화답 시를 읊었다고 한다.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의 앞길을 따라서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연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청학봉은 비로봉(백학봉)을 가리킴. 우선(羽仙) : 오숙(吳䎘,1592~1634)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유람 일정은 1651년 11월 1일 진주 관아를 출발하여 옥계사에서 자고, 11월 2일 악양을 거쳐 쌍계사에 도착, 11월 3일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원을 둘러보고 쌍계사 적묵당에서 자고, 11월 4일 아침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거석교-홍류교(삼신동 각자)-신흥사터-능파각(세이대)-사자곡을 지나 기담(妓潭)에서 쉰 후, 능인사(能仁寺)에서 점심을 먹는다. 저녁 무렵에 능인사(能仁寺)를 출발하여 은정대(隱井臺)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11월 5일 은정대(隱井臺)를 출발하여 수국현(水國峴)넘어서 거림으로 내려가 남대사를 거쳐 신계촌에서 유숙하고, 11월 6일 신계를 출발하여 덕천서원에 들렀다가 진주 관아로 돌아갔다. 이때 오두인과 동유(同遊)한 일행인 진주 소촌 찰방 김정(金釘),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의 이름을 은정대(隱井臺) 뒤 은정(隱井)의 바위벽에 새겼다. 이 성명의 석각이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 의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암 관련 발췌
○ 1651년 11월 4일 <중략>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學僧) 담희(淡熙)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井)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隱井臺也。菴在絶頂。去塵宸最遠。經僧淡熙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隱井。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 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2권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p145~p146
1651년 오두인의 頭流山記에 나오는 은정암과 오두인 일행들의 성명 석각이 368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로부터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 辛卯 仲冬
隱井(은정)
* 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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