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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의 각자 일월대(日月臺)에 대하여
    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8. 08:51

    일월대(日月臺)의 개요.

    일월대는 한자문화에 살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어낸 지리산 천왕봉의 별칭이다.

    조선시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수많은 선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개 천왕봉의 일출과 일몰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선비들은 몇 날을 걸려서 지리산에 오른 후에는 소위 양반의 지체로 천왕봉에서 풍찬노숙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염원인 지리산의 일출과 일몰을 마음껏 감상하고서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일찌감치 500년도 훨씬 전부터 그들은 광대무변의 지리산에서 해돋이와 달뜨기의 최고 명소는 오직 천왕봉이라고 기록을 통해 인구에 회자를 시키고서는

    이름조차 일월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선비들이 남긴 천왕봉의 일출과 일몰을 찬탄한 기록들은 오랜 세월을 이어져 오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빌미가 되어주었다.

     

    천왕봉 일출과 일몰을 전하는 선비들의 기록들은 지극히 리얼하고 다양하다.

    1464(세조 9) 천왕봉을 오른 이륙은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에서 이르기를

    "해가 막 솟을 때는 금물결이 눈에서 튀어 올라 파도가 이 때문에 겹겹이 출렁이는 듯하다." 고했다.

     

    1807(순조 7)

    천왕봉을 올랐던 함안((咸安)의 선비 안치권은 일월대에서 목격한 천왕일출을 두고

    "동쪽 하늘이 붉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고 자주색 구름이 푸른 바다를 삥 둘러 감싸고 있을 즈음에 화륜(火輪: 해를 상징)이 막 솟아오른다.

    동반(銅盤: 구리 쟁반) 같고, 우약(竽籥: 악기의 일종) 같고, 신기루 같았다. 가라앉는 듯 떠오르는 듯을 세 번 한 후에 하늘 끝으로 솟아올랐다.

    구름도 점차로 옅어지고 붉은 빛도 조금씩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날이 밝았다."고 하면서 과연 한평생의 일대장관이라고 적었다.

     

    또 한 그들은 일월대에서 일출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장관인 일몰의 황홀한 풍경과 지리산의 밤하늘에 떠 오른 달빛의 운치도 놓치지 않았다.

    1643(인조 21) 지금의 백무동기점의 하동바위코스로 해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 박장원은 일월대에서 본 일몰의 풍경을 두고

    "잠시 둥근 해가 바다에 지는 것을 보니, 괴기한 자색과 붉은 색의 온갖 형상이 뒤섞여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면서 저 경이로운 색상이 무엇이냐. 저 장관이 무엇이기에 나로 하여금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인가하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조선시대 지리산 산행의 장을 열었던 김종직은 1472(성종3)8월에 천왕봉에서 노숙의 밤을 보내면서,

    중추의 밤하늘에 달이 떠오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했다.

     

    이토록 그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석양낙조 및 아침일출의 풍경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지리산의 운치를 마음껏 취했던 것이다.

     

    일월대에 앉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만끽한 선비들의 소감은 시대를 초월하여서 한 결 같이 자연의 존엄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지리산 천왕봉이 태양의 탄생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하나의 전망대였던 것이다.

    하여서 그들은 지리산의 최고 정점에 굳이 일월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서는 서쪽의 한 누운 바위에 日月臺 라는 각자를 대서특필로 새겨두었다.

     

    일월대의 명칭 등장과 각자(刻字)의 등장 시기.

    선인들의 지리산유산기 즉 일명 유두류록은 국역이 되어서 전하는 작품이 대개 100여 편이다.

    당시 지리산 유람에서의 등산 코스는 천왕봉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 경우와 청학동 등 신선 세계 유람을 목표로 한 지금의 쌍계사~불일암코스 두가지 코스로 정해져 있었다.

    노고단 반야봉 코스 및 기타 지능선 코스를 등정한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십여편 이내이다.

    그 중 천왕봉을 등정한 기록이 40여 편으로서 일월대를 언급한 작품은 기행시 형식의 기록을 포함하여 약 20여 편에 이른다.

     

    천왕봉을 일월대라고 부른 시기는 대개 17세기 중반 이후 부터이다.

    1464년에 기록된 이륙의 지리산록을 시작으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 김일손의 속두류록(1489)” 남효온의 지리산일과(1487)”.박여량의 두류산일록(1610)”. 유몽인의 유두류산록(1611)”에 이어지는 15세기와 17세기 중엽 이전의 두류록 들에서는 일월대라는 지명 언급이 없다.

    이후 17세기 중엽, 박장원의 지리산기(1643)”에서 부터 일월대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이후 일월대 각자(刻字)의 등장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일제강점기의 작품과 1960년대의 지리산 산행 기록들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근세의 기록들을 옮겨본다.

    1924 강계형.두류록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1934김택술.두류산유록 하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라고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후로 유람하러 온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쓰여져 있다.

    혹은 부자가 이름을 함께 적었으며 심지어는 사대(四代)가 이름을 나란히 쓴 것도 있다. 족보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일 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치다.

     

    1940 정덕영.방장산유행기

    조금 있으니 해가 지면서 저물려 하였다. 봉우리 아래에는 큰 바위가 옆으로 서 있고,

    일월대(日月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또 그 옆에는 판잣집이 있지만 이미 무너져서 묵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급하게 법계암을 향해 내려갔다.

     

    1964 하종락.두류산동유록

    바위의 남쪽 면에는 일월대(日月臺)’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함양(咸陽)의 정() 아무개가 새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햇수가 아직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주지(州誌)>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고 실려 있지만, 살필 수가 없었다.

     

    일월대 각자는 언제 누가 새겼나?

    앞서 언급한 근세의 작품인 <강계형>의 기록과 <하종락>의 기록에서 각자를 쓴 사람은,

    해서()체의 글씨로 새긴 日月臺각자 좌측에 나란히 있는 鄭泰鉉 書의 주인공인 정태현(1858~1919)임을 알 수 있다.

     

    강계형의 기록,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에서의 정죽헌(鄭竹軒)은 정태현(鄭泰鉉)의 호()이다.

     

    하종락은 일월대 각자는 함양(咸陽)의 정() 아무개가 새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햇수가 아직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고 정태현이 함양사람임을 알리고 있다.

     

     

    정태현(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9세손)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 로서,

    그가 남긴 문집 죽헌집을 살펴 보건대, 일월대 각자를 새긴 시점은 대개 지금으로부터 일백여년 쯤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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