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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신계곡, 연하선경, 상봉(천왕봉), 지리,智異 품속에서 놀다.
    지리 산행기 2021. 1. 18. 14:32

    # 언제: 2021년 01월 17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智異 한신계곡,연하선경,상봉(천왕봉)눈꽃산행 지리,智異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19.17Km 09시간 48

    # 산행코스: 백무동주차장 - 한신계곡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연하선경 - 연하봉 - 장터목 - 제석봉 - 상봉(천왕봉)

                    제석봉옛길  - 소지봉 - 창암능선갈림길 - 참샘 - 하동바위 - 백무동주차장(원점회귀산행)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자

    내 할 일도 바쁘다

     

    안되는 일 붙잡고 시간 낭비하지 말자

    되는 일에 몰두하고 열정을 쏟자

     

    누굴 탓하는 버릇을 버리자

    모두 내 판단에 의한 것

    내 탓이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

     

    복잡하게 살지 말자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다 머리 쥐난다

     

    누군가와 오해가 생기면

    그 자리서 풀려고 하지마라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다

     

    살다 보면 내 맘대로 안되는 거 투성이다

    그때마다 절망하면 세상 살맛 안 난다

    자기만의 극복 방법을 정해놓으면

    쉽게 이겨낼 수 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백무교를 지나 백무동 탐방지원센터

    백무동의 유래 - 백무동은 옛날부터 <지리산의 지혜로운 기운을 받기 위해 백 명이 넘는 무당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백무동(百巫洞)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안개가 늘 자욱하게 끼어있는 곳' 이라고 하여 백무동(白霧洞)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무사(화랑)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하여 백무동(白武洞)이라고 합니다. 이곳 백무동에서는 세석평전 꼭대기에서 시작된 10km의 '한신계곡'이 흐르고 있습니다. 명승 제72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는 한신계곡은 칠선계곡, 뱀사골계곡과 함께 지리산의 3대 계곡입니다.

     

     

    꽁꽁 얼어 있는 한신계곡 - 한신계곡은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끼는 계곡’이라는 의미에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한신지계곡 방향

     

     

    가내소 폭포 - 먼 옛날 한 도인이 12년 수행의 마지막 시험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채 건너가고 있었다. 이를 본 지리산 마고할멈의 셋째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해 물에 빠뜨렸다. 이에 도인은 “에이~나의 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하고 탄식하며 떠났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이곳을 가내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신폭포 꽁공 얼어있다

     

     

    세석대피소 오름에 눈꽃

     

     

    오도재, 오도봉, 삼봉산, 백운산, 금대산, 조망

     

     

    아름다운 눈꽃

     

     

    광양 백운산, 억불봉, 조망

     

     

    촛대봉 오름에 세석대피소 운장바위 조망

     

     

     

    촛대봉 - 이 촛대봉을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하였음은 이미 얘기했습니다.

     

    수리봉 소고(小考)

    “형.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ㅅ'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와 같이 이 산은 떡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봉 혹은 시루봉이 아니라, 이 '수리'가 '시루'로 변한 것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효온이 이곳을 계족봉이라고 부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족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입니다. 그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도솔산인님의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같은 뚯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상봉(천왕봉)조망

     

     

    한신바위, 운장바위, 반야봉, 노고단, 조망

     

     

    촉대봉(燭臺峰/1,703m)

    촛대봉은 한 여인이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린 모습이라고 전한다. 경상남도 산청군의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주능선의 한 봉우리이다. 천왕봉에서 서쪽 노고단 방향으로 제석봉·연하봉을 거쳐 촛대봉에 이르며 다시 칠선봉과 덕평봉으로 향해 이어진다. 촛대봉의 남사면 계류는 거림계곡으로 모아지고, 북사면의 계류는 한신계곡으로 모인다. 봉우리의 모양이 촛대와 같이 뾰족하게 솟아있어 이름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촛대봉의 옛 이름은 촉봉(燭峰) 혹은 촉대봉(燭臺峰)이었다. 촉봉 혹은 촉대봉이 오늘날의 한글 명칭으로 촛대봉이 되었다. 1879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송병선(宋秉璿,1836~1905)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촉봉(燭峰)이 우뚝 솟아 있었다 1."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기(鄭琦,1879~1950)유방장산기 (遊方丈山記 )에는 촉대봉(燭臺峰)으로 나오는데, "운무를 헤치고 천왕봉을 향하는데 겨우 촉대봉(燭臺峰)에 이르렀다. 북풍에 비바람이 불고 운무가 날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천 와룡산, 사천 앞바다, 사량도가 보이고 그 우측 약간뒤로 수우도(은박산)가 보이네요.

     

     

    꽁초봉, 연하봉, 상봉(천왕봉)조망

     

     

    연하선경(烟霞仙境)은 지리10경 중의 하나이지만 어느 것 하나 서열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절경(絶景)이다. 연하봉을 지나는 구름이 그러하고 새싹과 꽃이 그러하고 살아있는 나무는 물론 죽어있는 나무도 그러하고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그러하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초월한 신선의 경지에 비유하여 연하선경(煙霞仙境)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연하봉에서 서쪽의 세석평전 방향으로는 삼신봉과 촛대봉으로 이어진다. 촛대봉에서 남쪽으로는 도장골로 이어지는데. 도장골에는 와룡폭포, 윗용소, 아랫용소, 밀금폭포가 소재하며 세석평전에서 내려오는 거림골과 합쳐진다.

     

     

    연하봉-지리산 삼신봉과 장터목산장 사이에 위치한 연하봉 주변은 온통 야생화, 기암괴석, 고사목 등이 어우러진 곳이다. 물론 겨울철에는 그렇지 않지만 촛대봉을 거쳐 삼신봉에서 장터목 쪽으로 조금 가면 이름 없는 바위가 있는데 조망권이 넓어 흔히 전망대바위라 일컫기도 한다. 잠시 여장을 풀고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연하봉까지의 등산로에는 온갖 야생화가 뒤덮고 있다. 특히 봄철에는 철쭉이 만발한다. 전망대바위에서 보는 일몰 역시 장관이다.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로 지는 해를 보기 위하여 일부러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연하봉에서 삼신봉 방향으로는 일출봉이 기다리고 있다. 일출봉 능선에서 보는 해 뜨는 광경은 천왕봉 못지않다. 정작 연하봉은 여러 봉우리로 이어지는데, 봉우리마다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주변에는 고사목이 즐비하다.

     

     

    지리 눈길 걷는다

     

     

    장터목대피소

    예전에는 매년 봄, 가을에 마천 사람들과 시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장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터목이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백무동, 좌측으로는 지난 구간 산행을 시작했던 중산리로 내려갈 수 있다.

     

     

    따뜻한 동태 국에 약주 한잔

     

     

    금강대 조망 - 금강대 -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아서 갔다. -김일손 두류산기행록에서-

     

     

    문창대 조망 - 문창대,文窓臺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는 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이곳을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하였다가,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한다.

     

     

    제석봉, 상봉(천왕봉), 오름 걷는다.

     

     

    사천 앞바다, 사천 와룡산, 등 조망

     

     

    제석봉 오름에 구상나무

     

     

    반야봉, 지리 주능 조망

     

     

    제석봉 이야기

    제석봉이라는 이 봉우리의 이름은 이곳에 있던 제석당(帝釋堂)에서 유래 하였다. 옛 지명은 중봉 이라고도 했다.

    함양이라 산청에서 올라오는이들이 볼때에는 천왕봉이 상봉이 되어 지금의 천왕봉-증봉-하봉 이겠지만 하동이나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이들에게는 제석봉이 중봉이고 천왕봉은 상봉 이였다 한다.

     

    여기도 [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니 신당 혹은 제당과 관련이 있다. 박여랑의 두류산일록(1610년)에 의하면 이 제석당을 23-24자(6-7m) 크기의 세 칸인 판잣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보면 제석봉을 제석을 산봉우리와 동일시하여 일컫는 지명 일것인데, 제석,帝釋은 삼신제석, 천주제석, 제석천이라고도 하는 하늘 신이며, 도리천에서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이 제석봉 역시 제석당이 있으니 토속신앙인 천신 혹은 산신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것임을 이름만으로도 알수 있다.

     

    법계사 법당에서 본 바와 이동한의 방장유록(1790년)에 실린 그들의 무속행위를 정리해 보면...

    삼남 지역의 무당들이 봄, 가을이 되면 반드시 이 산에 들어와 먼저 용담의 사당에 빌고, 다음으로 백무당에 빌고 또 제석당에서 빌고 그러고는 상당까지 올라가 정성을 바쳐 영엄해지기를 빌었다.

     

    여기서 용담은 지난 편 살펴본 지금의 휴천면 남호리에 있던 용유당이고, 백무당은 백무동이며 제석당은 이곳 그리고 상당은 바로 천왕봉의 성모廟(祠)일 것이니 상-중-하당으로 위계를 이룬 민간신앙소의 면모도 파악 할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이 제석당이 김종직이 지날 때인 1470년 경이나 김일손이 지날 때인 1489년에는 없었는데, 박여량이 지날 때인 1611년에는 있는 것을 보면 그 사이인 16C 정도에 지어진 것 같다. 그리고 1752년 박래도 등이 지날 때에는 들보가 무너지고 서까래도 부서졌다. 는 대목에서 쇠락해져 가고 있는 제석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도 나오는 것과 같이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색장色掌의 전갈이 있어 몹시 근심 스럽고, 괴롭다는 제석당 주인인 노파의 하소연에 비추어 보면 정부에서는 이 푸닥거리를 하는 이 민간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던 것 같다.

     

    아마 혹세무민한다는 유생들의 질타가 있고, 또 신성한 지리산에 불법 건축물을 임의로 건축하였으니 건축법 위반도 되었을 것 같다.

     

     

    제석봉에서 상봉(천왕봉)조망

     

     

    호구당터

     

     

    바위 이름은 무엇일까

     

     

    통천문

    천왕봉으로 오르는 문은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 있으니 서문이라고도 불리는 통천문通天門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에 있으니 동문이라고도 불리는 개천문開天門이다.

     

    하늘에 오르려면 반드시 통천문을 통과해야

    통천문이라는 각자刻字 안으로 들어설라치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말 때문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 고은은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 만큼은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음산한 기운 속에 성모사에서 잠을 자던 점필재는 밤에 달이 환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고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로다.”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상봉(천왕봉)오르며 힘들다...ㅎ

     

     

    ㅎㅎㅎ

     

     

    바위 에 걸처 있는 상고대

     

     

    아름다운 풍광, 조망,

     

    상봉(천왕봉,天王峰, 1,915m)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天柱)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정상에는 청석표주(靑石標柱)와 지리산 산신령을 봉안하는 성모사(聖母詞)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성모 숭상의 유적인 천왕성모의 석상과 마야부인상이 그 옛날 모셔 있었다 하며 토속적 산신 신앙의 거룩한 대상이 되었다 한다. 동서 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거칠 것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조의 기관(奇觀)도 좋거니와, 새벽 동녘 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 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관으로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그러나 높은 천왕봉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쾌청한 날을 만나보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삼대적선을 한 사람이라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학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천왕봉 천주,天柱

    천주는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같다하여 새겨졌으며 부근에 예전에 일월대와 천주각자 부근에 성모신당이 위치하고 있었다하며, 천왕성모상은 현재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일월대,日月臺 -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1643년-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로 나와 앉아 피리 연주를 들으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제석봉 옛길에 있는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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