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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공다리골,두류암터,향운대,벌떡선골,국골
    지리 산행기 2021. 1. 26. 09:31

    # 언제: 2021년 01월 24일 일요일

    # 산행지: 허공다리골(빙폭),향운대(香雲臺),벌떡선골,국골, 지리,智異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12.6Km 11시간 31

    # 산행코스: 광점동 - 어름터(독가촌) - 품개동 - 허공다리골 - 의병장석상용묘소 - 두류암터 - 허공다리골(빙폭) - 

                    향운대 - 두류능선 - 벌떡선골 - 국골사거리,벌떡선골,(날끝산막골)갈림지점 - 국골사면길  - 추성주차장 

     

    # 언젠가는 함께 해야지 하며 마음속에 담아두고 긴 시간 지난 후 함께 하게된 전주 지리99 산우님, 뵙고 싶었던 천년송 대장님 지리 산행 함께 함에 행복만땅, 또 한분 대구 이슬님도 뵙고 방가웠다, 목포 날개, 인디안님 매주 지리 산행 함께하는 사천에 배완식 동생, 좋은 산우님 들과 함께한 지리 산행 행복만땅, 그리고 진주 지리99 카페 10주년 축하 드립니다. 

     

    # 오늘 산행 루트에서 두류암터에 또 공부를 못한게 마음 구석에 남는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자

    내 할 일도 바쁘다

     

    안되는 일 붙잡고 시간 낭비하지 말자

    되는 일에 몰두하고 열정을 쏟자

     

    누굴 탓하는 버릇을 버리자

    모두 내 판단에 의한 것

    내 탓이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

     

    복잡하게 살지 말자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다 머리 쥐난다

     

    누군가와 오해가 생기면

    그 자리서 풀려고 하지마라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다

     

    살다 보면 내 맘대로 안되는 거 투성이다

    그때마다 절망하면 세상 살맛 안 난다

    자기만의 극복 방법을 정해놓으면

    쉽게 이겨낼 수 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광점동 주차장(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서 바라본 벽송사,(상내봉)능선

     

     

    어름터골 철다리

    2011년 8월 지리산 일대를 휩쓴 태풍 무이파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데, 통행에 별 지장이 없어서 그런지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그전엔 두 가닥의 비상활주로용 철판(동그랗게 구멍난 철판, 아나방)이 설치되어 수십 년 동안 다리 역할을 했다는데, 허공다리골이라 부르기도 하는 허공달골, 골짜기가 넓어 허공에 걸린 달이 아름답게 보이는 골, 이라 허공달골이라 하다, 허방다리(구멍난 다리)가 생기면서 허공다리골과 허공달골로 뒤섞어 부르지 않았을까...?

     

     

    다리를 지나며 바라본 허공다리골(허공달골), 앞 주 날씨에는 꽁꽁 얼어 있었을 것인데

     

     

    오늘 산행 루트 초행인 구례 산유마을 마을 거주 하시는 민병초님 방치된 법종 보신다.

     

     

    방치되어 있는 범종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 물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폭포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 1구 맨 끝자 +은 자전에 없어 느슨할 단, 계속될 선(다른 표현: 띠 늘어질 천)으로 보았고 ()이 아니고 : 찧을용이 맞음,

     

     

    頭流庵(두류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두류암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두류암터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없다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두류암 관련 자료를 읽고 지리 99에서 발표한 쑥밭재 아래 '두류암 승탑'을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에 부합(符合)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을 좇아 용류담에서 마적동-송대-장구목-두류암 코스를 답사하게 되었고, 승탑 연구가 임병기(善果님) 선생님의 답사 자료(*)를 읽어보고 임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니, 부도의 형태는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어떤 유람록에도 부도에 대한 기록이 없고, 승탑이 있는 곳은 유람록에 나오는 두류암 터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곳이 두류암 터는 아니다. 부도가 있지만 화전민터로 본다.'라고 하였다.

     

    두류암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은 1580년 변사정(邊士貞)의 유두류록, 1611 유몽인(柳夢寅)의 두류산록, 1867년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1871년 배찬(裴瓚)의 유두류록 등이 있는데, 1656년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1888년 간행)에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 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871년 이후와 1888년 이전의 시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두류암지에 대한 나의 견해는 선답자들과는 달라서, 지산대 아래 정자와 석축이 있는 부근을 두류암터로 추정하고 있다.

     

    감수재가 두류산일록에 云『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남에게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다.(凡天下之物。有欲者無不見制於人)』라고 하였다. 선답자들이 지리산 인문학을 先占(선점)한 공로(功勞)는 있지만, 지리 99가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성급하게 즉흥적으로 발표한 세석산장 앞 습지의 영신사지와 가짜 청학연못이 국회 전자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영구 보존된 박사 학위 논문[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 (The)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in Mt. Jiri documented in the Joseon era travelling records / 이창훈 이용률 높음]에도 버젓이 실려있으니,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문제의 파급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끝.

     

    * 옛 숨결 그정취를 찾아(함양...지리산 두류암지 부도) : http://blog.daum.net/12977705/8725603

     

    1. 1580邊士貞의 유두류록

    [원문]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 4月 初七日, 아침에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晨朝促喫. 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 四月 初八日.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 1611년 柳夢寅의 두류산록

    [원문]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 43,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어름터(독가촌)

     

     

    독가앞 계곡을 건너서 계곡 안으로 접어들며 갈림길이 있는 합수부로 향한다. 독가에서 합수부까지는 40여분 소요된다. 등로는 계곡 우측을 걷다가 다시 좌측으로 건너서 이어지고, 다시 계곡 우측으로 건너서 합수부까지 이어진다.

    합수부, 우측에서 흘러드는 우골을 건너 우측으로 사면을 오르면 진주독바위 쪽과 청이당고개 쪽으로 등로가 분기된다.

     

    어름터 골짝 주변 지형에서는 특히 계곡을 건너는 횟수가 중요한데, 첫번째 건너면 향운대 가는 길이 우측으로 갈리고, 두번째 건너면 바로 넘어 대판골이 있고, 세번째 건너면 쑥밭재 올라가는 두 산길이 있고, 네섯번째 건너면 사립재골.

     

     

    우측방향 향운대 오르내리는 갈림길...오늘 지리산행 루트 한 지점...우린 하공다리골 직진한다...

     

     

    품개동 마을터 - 이 곳 주위에는 곳곳에 대숲과 화전밭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석축들이 산재해 있으며 규모도 상당히 넓고 크다.

     

     

    한말 의병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장군 묘

    산소의 위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광점동에서 2시간 가량 올라가면 등산로 옆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초라하나 후손들이 관리를 한 것 같다. 비를 세운 것은 1983년(辛酉) 정월 초10일 세웠다고 되어 있네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태생의 한말 의병장으로,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 고제량(高濟亮), 문태수(文太洙) 등과 제휴하여 함양, 산청,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별명은 비호장군으로, 일본군마저 공포에 떨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실상사전투와 지리산 쑥밭재, 벽소령 및 삼성재전투 등이 있다.

     

    실상사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석상용은 190842950여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습격하였다가 접전 끝에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1일 마천면 도마리 서당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려 하였으나, 면장 노지현의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석상용 의병부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지만, 1912년 석상용이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이 일로 석상용은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 병마에 시달리다 192010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1921 - 前面長盧公址鉉永思碑, 1983.

    김상수, 함양금석문총람, 함양문화원, 2004, 242-244쪽 - 김성진·추경화,함양항일투사록, 함양문화원, 2007, 129-135쪽 - 조동걸명나라 후예 석상룡의병장의 지리산 전적지, 우사 조동걸 전집, 역사공간, 2011.조용욱, 명나라 후예 석상룡의 지리산 의병부대, 우리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지리산편, 역사공간, 2004.

     

    석상용선생 집터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 현재 주소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313

    위치 고증 -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전면장노공지현영사비,에 석상용의 의병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집터와 관련해서는 석상용의 손부 이방강(1942년생)의 자문을 받았다. -퍼 온 글-

     

     

    의병장 석상룡 선생(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석상룡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성삼재, 벽소령, 쑥밭재 전투 등을 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5년 간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생의 13대 조부가 석성石星이라는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이여송의 군대가 조선을 지원토록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결국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으로 처형되고 그의 자손들 또한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맏아들 담潭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조선에서 살게 하였는데 이 석상룡 대장이 바로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역사의 인물 의병장 석상룡 선생 묘소가 관리도 되지않고 방치되어 있는지 의문이다...국립공원 관리공단 생각이 너무 부족하지 않는가...?

     

     

    석장군묘를 내려와 편한 길을 잠깐 걸으면 큰 바위가 길을 막는다. 이 지점 큰 바위 부터 두류암지 인것 같다.

     

    유몽인(柳夢寅)지리산 산행록(遊頭流山錄 1611) 어르신이 400년전 서술해 놓으신 두류암지 대에서 바라본 산행기 기록에서 두류암지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 보면...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함양 휴천면 송전리 마적동에 있던 암자)을 지났다. 나뭇가지와 넝쿨을 잡고 겨우 올라가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지며 힘들게 오르락내리락 하니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강제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아무리 꾸짖어 금하더라도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길을 가거나 모여 앉아 쉴때는 떠들고 웃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어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지 않겠는가?

     

    드디어 두류암(頭流菴,유몽인일행의 코스로 볼때 두류봉 근처 향운대는 아닌듯)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듯 하여 저녁 내내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어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禪房)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퍼온글-

     

     

    최화수님은 지리산 1994(최화수기자 대하르포) - 하동코스 중..지계곡을 건너면 바로 비탈길을 만난다. 이 비탈길을 한동안 오르면 등산로는 남쪽(좀 전의 지계곡과 같은 방향)으로 꺽어진다. 중략''' 갈림길과 마주치면 무조건 오른편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꺽으면 불과 20여m 지점에 40~50명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에 안성마춤인 넓은 반석이 있다. `전망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휴식을 하면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것도 독특한 맛이있어 좋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 뿐인데 가을철에는 현란한 단풍의 색체가 눈부신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최화수님께서 25년전 1995년에 서술하신 내용이다. [빌려온 글]

     

     

    잘 다듬어진 돌확은 모양이 선명하게 시간을 담고 있다.

     

     

    # 문헌에서의 두류암

     

    # 천령지(天嶺誌) 鄭秀民 編

    정수민(鄭秀民)이 효종 7(1656)에 편찬한 함양(咸陽) 지역의 읍지(邑誌)로써,저자 정수민이 평생동안 직접 답사하고 수집한 것을 작고 2년 전에 쓴 함양군의 옛날 군지이다. 편자 정수민(鄭秀民, 15771658)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일두 정여창의 증손이다.

     

    [기록내용 및 해제]

    두류암 군자사동쪽 30리 지점에 있다.동쪽에 송대가 있는데,운치가 그윽하고 한적하다.지금은 없다.[頭流庵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 幽閑(今無)]

     

    두류암의 폐사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써, 이후 역대로 간행 된 함양군지에서는 두류암의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참고로 천령지 이후 역대 함양군지 발간 역사는 1788년 경.1956.1981.1995.2012년 5차례 정도이었다.

     

    # 함양군사(咸陽郡史)

    2012년 함양군이 주관하고 함양군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함양의 역사.문화.인물등의 향토지로써,역대에 발간된 함양군지(咸陽郡誌)들을 저본으로 하였다.

     

    [기록내용]

    郡史 3권 문화 편의 없어진 절(弊寺) 편에서 두류암 추성(頭流庵.楸城)”이 폐사지 목록에 있다.

     

    역대 발간된 함양군지에서는 보이지 않음에도 여기서는 간략하게나마 언급을 해 둔 것을 보면 천령지두류암부분을 참고한 듯 하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1582~1610년에 걸친 일기형식의 기록.

    내용 - 15971124/정유년 만력 25, 선조 30(1597)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선인들의 유산기 기록(이하 인용한 유산기 문장들은 옛 산행기방에서 본문보기가 가능하기에 관련 문단만 제시한다.

     

    # 변사정 유두류록.1580(선조 13) 4.5~11.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1610(광해 2) 92~ 98.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 몽인 두류산록. 1611(광해 3) 329~ 48.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 김영조 유두류록. 1867(고종 4) 826~829.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 배찬裴瓚 유두류록. 1871(고종 8) 94~98.

    비현(扉峴)*[현 사립재]을 넘으며 굽어보니 두류암(頭流庵), 벽송암(碧松庵)인데 이는 함양(咸陽)의 경계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에 이르렀는데...

     

    # 권도용 방장산부. 1922(일제강점기) 422~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 폐사지의 형승

    대략 천 여평이 훨씬 넘을 듯 한 사지의 군데 군데 기와파편이 너부러져 있으며,계단식으로 층층히 쌓은 축대들과 샘터의 흔적은 물론 배수구의 모습도 완연하게 남아있다.생활도구로 활용했던 돌 절구며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멧돌등의 석조물도 보인다.

     

    본당 터 추정지 북쪽에는 의탄천(일명 허공다리골)의 계곡미를 완상할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조망대가 있기도 하다. 이부분은 유몽인이 언급한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문장과 일치한다. 한편 본당터의 남쪽에는 석종형 부도 1기가 있어 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해 주기도한다.

     

    # 절집의 창건연대 및 폐사연대 추정.

    절집이 남긴 관련 문서가 극히 미비하기에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대개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했던 석종형 부도와 진한 흑갈색을 띄는 기와파편등을 참조하면 고려말 혹은 조선초기에 창건된 절집으로 추정이 되며,폐사시기는 1656년 정수민의 천령지에 지금은 없다의 기록과 변사정.유몽인의 유산기를 참고해 보면 조선중기대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유몽인이 다녀온 1611년 이후 약 20~30년 간에 폐사가된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다.

     

    # 두류암 폐사이후 근대까지의 두류암지 현황

    두류암 사하촌 마을 광점동 추성리 사람들은 두류암지 그곳을 두람동이라고 부른다.“두류암동의 줄임말로써 폐사이후 두류암은 일개의 부락명 두람동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두람동에는 근대 70년도 중반까지 사람이 거주했으며,당시 거주자 중의 한 분은 지금도 광점동에 살면서 두류암지 근대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유몽인 이후 250 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쓰여진 김영조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 기록에서 폐허의 절터에 산민들의 집단부락이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절 주변 척박한 골짜기의 환경을 보면 수 십호의 농가와 절집이 공존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하면, 김영조가 언급한 두류암은 당시 절을 명칭한 것이 아니고 일개의 부락명으로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조 4년 후, 배찬이 비현(사립재)에서 보고,하산중에 들러서 쉬었다는 두류암 역시 산간마을의 명칭 이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등은 두류암 지척 상내봉능선 너머의 절집들이다.천령지의 기록에는 이 들 절집들도 금무(今無) 즉 지금은 없다고 했다.

     

    추측컨대,지리적 요소로 인해 한 때는 천왕봉 등정 유생(儒生)들의 숙박장소가 되기도 했던 두류암을 비롯한 지리산 암자들이 배불정책의 조선의 역사에서 견딜 수 없어 사라졌다고 보아진다.

     

    조선 후기,진주민란 을미사변 등 나라의 어지러운 난세를 피해 대책없이 지리산으로 흘러 들었던 조선 유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곳이 두류암 사지이다. [빌려온 글]

     

     

    두류암터 부도탑

    예전에 법성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이 두류암터에 수양처를 짓고 계셨다고 합니. 그러다가 수십 년전 가까이 있는 향운대(일명 영감절터 또는 춘삼이절터)로 거처를 옮겼다고 전해지나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그 향운대 마저 2000년대 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고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문화재청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그런데 지난 번 필자가 답사한 바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법성 스님 다음에 다른 분이 또 기거를 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그 분이 춘삼이 인지 혹은 영감 님인지...

     

    김영조(1842~1917)는 1867년 약관의 나이에 유두류록을 남겼습니다.("언덕을 넘어 두류암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라고 이 부근의 정경을 묘사했습니다.

    - 빌려온 글 -

     

    최화수님은 지리산 1994(최화수기자 대하르포) - 하동코스 중...전망대에서 연전히 평탄한 오솔길을 잠시 돌아가면 절터를 만난다, 추성동의 한 불자가 사찰 복구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잡초만 무성하다,

     

    지리산365일에 소개된 부도탑이다. 그때는 넘어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이 조립해 놓았다 신다.

     

     

    두류암터 둘러보고 허공다리골 진입

     

     

    산행 날씨 포근해 빙폭 계곡치기 생각지도 안했는데 - 허공다리골 빙폭 계곡치기 시작...ㅎㅎㅎ

     

     

    향운대 오르며,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초령(새봉)조망

     

     

     

    사태지역도 오른다...힘듬...ㅎㅎㅎ

     

     

    향운대(香雲臺1,348m)

    지리산에는 큰바위가 있는 곳을 신성시 여겨 기도처로 활용하는데 그런곳을 "대"라고 한다. "대"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전망이 좋고 풍수지리상으로는 명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향운대(香雲臺)는 구름향기란 뜻이니 즉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 이곳에는 미륵암이란 암자가 있었고, 암자에서 수행하였던 스님의 법명이 향운이었다는 설도 있다.


    “대(臺)”라 함은 작게는 산사에 모셔진 불상의 좌대에서부터 크게는 스님들이 산속에서 정진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서는 지리산의 만복대나 영신대, 종석대 그리고 오대산의 다섯 대처럼 그 산의 왕성한 기운이 응집하여 수행하기 좋은 장소 이거나 나아가서는 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의 기운이 깃든 곳들을 의미한다. (天上祿/두류산인)


    뒤에는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암벽이 있고 아래에는 석간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공통점인 것 같은데, 지리산에는 모두 33臺가 있으며 옛부터 이름난 수도처로 - 문수대(文殊臺). 종석대(鐘石臺). 묘향대(妙香臺). 서산대(西山臺). 무착대(無着臺).향운대(香雲臺). 문창대(文昌臺). 영신대(靈神臺). 향적대(香積臺). 금강대(金剛臺)의 10대(十臺)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향운대에서 맛있는 점심시간...전주 지리99카페 10주년 축하겸 무려 2시간 이상 즐거운 가짐

     

     

    전주 지리99 산우님께서 직접 만들어 오신 케익

     

     

    향운대에서 조망되는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향운대 상단

     

     

    향운대 샘

     

     

    향운대에서 지리 함께한 산우님 단체사진

     

     

    점심식사 후 두류능선으로 고고싱 - 멋진 눈꽃 조망된다

     

     

    국골4거리, 영랑대, 하봉, 중봉, 상봉, 조망

     

    벌떡선골 하산하며 말굽버석

     

    벌떡선골 힘들다...ㅎㅎㅎ

     

     

    영룡봉에서 추성리로 조금 내려선 두류능선(1440m)으로 이어진다는 벌떡선골, 바로 위 나무가 드러누운 곳에서 벌떡선골을 건너 지능선으로 붙으면, 얼마 안 가 오른쪽 사면으로 난 길을 따라 국골 사거리로 이어진다.

     

     

    날끝산막골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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