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백무동,한신계곡,운장바위골,운장바위,영신봉,좌고대,한신능선,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지리 산행기 2021. 2. 9. 08:23

    # 언제: 2021년 02월 07일 일요일

    # 산행지: 백무동,한신계곡,운장바위골,운장바위,영신봉,좌고대,한신능선,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13.57Km 11시간 17

    # 산행코스: 백무동 - 한신계곡 - 운장바위골 - 운장바위 - 영신봉 - 좌고대 - 한신능선 - 백무동(원점회귀산행)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시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백무동 지명의유래

    천황할머니는 지리산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어느 날, 지리산에 법우스님이 들어와 동굴에서 좌선 수도에 들어갔다. 열심히 수도에 정진하던 스님이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뺏긴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다 길을 잃고 말았다. 천황할머니가 아가씨의 모습으로 나타나 길을 안내해줬다. 그날부터 법우스님은 아가씨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천황할머니에게 결혼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결국 둘은 결혼했고, 여덟 딸을 두었다. 그들은 전국으로 보내져 유명한 무당이 되었다. 이후 이 마을을 무당 100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서 ‘백무((白武)마을’이라 불렸다.

     

     

     

    백무동은 무속인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반야봉이 문수보살이 자리한 불교의 성지라고 한다면 천왕봉은 그보다 먼저 자리잡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의 보고라 할까요, 지리의 산신령은 용유당부터 시작하였을 겁니다. 거기서 기돗발이 안 받을 경우 그들은 이 하당下堂인 이 백무동까지 올라옵니다. 조금 더 영험함을 받으려면 다시 중당中堂인 제석봉 까지 올라가고...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 (조구명 1724)

    거기서도 여의치 않을 경우 상당上堂인 천왕봉까지 올랐다고 하죠, 그러니 이 백무동은 그들의 베이스 켐프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들은 유교에 쩌들은 선비들에게는 음사淫祠였고 질시疾視의 대상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낯설기만 한 곳이 청계도인 양대박(1541~1592)에게는 삼가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첫나들이 폭포

     

     

    첫나들이 폭포 데크에서 완도 오르고 형님께서 준비 해온 자연산 돔, 간제미 회무침에 약주한잔...ㅎㅎㅎ

     

     

    바람폭포

     

     

    홍대폭포

     

     

    바람폭포 방향

     

     

    홍대폭포 방향

     

     

    한신지곡 방향

     

     

    가내소 폭포

     

     

    가내소 폭포 - 먼 옛날 한 도인이 12년 수행의 마지막 시험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채 건너가고 있었다. 이를 본 지리산 마고할멈의 셋째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해 물에 빠뜨렸다. 이에 도인은 “에이~나의 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하고 탄식하며 떠났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이곳을 가내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량측정시설 지점 - 이 시설물 뒷편 지류를 곧은재골이라 부르고 조금 더 위 지류가 안곧은재골이라고, 몇몇 산행기에서 이리 언급. 한신주곡과 큰새골을 가르는 능선을 바른재 큰새골과 작은새골을 가르는 능선이 곧은재가 맞다면 이곳은 바른재골, 안바른재골이라 불러야 위치상 맞지않을까 한다...

     

     

     

    좌 화랑골 지점 - 아래 우량측정시설로부터 약 500미터 위 진행방향 좌측 화랑골 들머리 꽁초바위(화장봉)와 연하봉 중간지점으로 오른다는 자그만 지류로 언젠간 한번은 가봐야할 미답의 화랑골 백무교 - 화랑골 들머리 다리, 약 4km 이곳에서 300여미 위 우측 운장바위골 들머리

     

     

    운장바위골 진입

     

     

    계곡 나뉨 - 좌골이 본골로 운장바위로, 우골은 바른재능선으로 

     

     

    운장바위골 빙폭 즐기며, 계곡치기

     

     

    길 없는 눈길 산행 이 지점까지 오르며, 힘들었다...ㅎㅎㅎ

     

     

    운장바위

     

     

    운장바위정상에서 포즈한번 취하고...ㅎㅎㅎ

     

     

    상봉, 저멀리 중봉, 하봉, 영랑대까지 조망

     

     

    짝궁댕이 노고단 조망

     

     

    운장바위 정상에서 단체 사진

     

     

    촛대봉, 세석조망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은 세석평전에 대해 상대, 중대, 하대를 언급하고 있는데, 서불(徐市)에 관한 기록이 흥미를 끈다. 상대(上坮)는 영신, 중대(中坮)는 창불, 하대(下坮)는 음양수 샘 기도터로 추정한다. '상대(上坮)의 백척절벽 석면 위에 '徐市過此(서불과차_서복이가 지나감)'한 제명(題名)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서시,서복,서불는 같은 사람이며 서복이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방장산(方丈山, 지리산) 영주산(瀛洲山, 한라산)이고 신선들이 거처한다하여 그곳에 있는 불로장생초 찾아나섰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네이처에서 진시왕이 찾던 불로장생초는 황기라고 한다.

     

     

    한신계곡, 백무동, 마천면, 저 멀리 삼봉산, 오도재, 조망

     

     

    운장바위 굴

     

     

    점심은 맛 있게...ㅎㅎㅎ

     

     

    영신봉,靈神峰 - 지리산 영신봉은 높이 1,651.9m로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출발점이다. 서쪽으로 칠선봉[1,576m]·삼각고지[1,470m], 동쪽으로 촛대봉[1,703.7m]·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과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며, 남쪽 비탈면에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대성계곡, 북쪽 비탈면에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계곡이 있다.

     

     

     

    영신봉에서 조망 되는 촛대봉

     

     

    영신봉에서 상봉

     

     

    반야봉, 노고단, 덕평봉, 칠선봉, 덕평봉능선, 오토바이능선, 칠선남능, 오리정골 조망

     

     

    남부능선 조망

     

     

    비로봉 -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유몽인 유두류산록-

     

     

    추강 남효온이 오른 좌고대 옆 더 높은 추강암 뒷쪽바위

     

     

    추강암 - 추강 남효온이 오른 좌고대 옆 더 높은 바위

     

    1487년 10월 1일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綿竹〕를 뚫고 계족봉(雜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이르렀다. 그 아래에는 영신암(靈神庵)이, 암자 뒤에는 가섭전(伽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그곳을 자세히 보니 한 덩이의 돌이 완연히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빈발암으로 돌아 내려와 저녁밥을 먹었는데 마침 암자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해가 지자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도솔산인 선생님의 좌고대 관련자료

     

    1. 1463년 8월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2.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7일, 신사일<중략>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 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3.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 10월 정묘일 <중략>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4.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

    ○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5.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갑술일.<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한신능선(바른재능선)진입지점 에서 주변 조망  - 역사의 커다란 아픔을 간직한 대성골이 굽이굽이 펼쳐지고, 우측으로는 남부능선의 장대한 마루금이 힘차게 굽이쳐 흐르며 그 한가운데는 삼신봉이, 그리고 아득히 저 멀리 광양 백운산도 실루엣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전해오고, 하늘을 향하여 거침없이 솟아오른 이 장대하고 장엄한 우리 산하를 어떤 필설로 형용하리요. 발아래 눈부시게 펼쳐진 지리를 가슴에 차곡차곡 담으며 가슴 벅찬 희열과 열정에 온몸을 맡기고 끝없는 단꿈속으로 빠져들어본다.

     

     

    한신능선(바른재능선)으로 하산

     

     

    이 거목은 능선의 산증인이자 주인이다. 한신능선(바른재능선)은 주위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잡목과 수풀이 크게 우거지고 산죽도 상당하 구간에 분포되어 있다. 급경사의 험한 길과 지그재그로 내림등로가 많이 이어지며, 또한 능선 중간중간에 커다란 암석들이 박혀 있어 결코 쉬운 길만은 아니다.

     

     

    점필재가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

     

    점필재 선생이 기행시 제11수 '하산음'에서

    제11수 : 下山吟 [산에서 내려와 읊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제자)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우리가)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