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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터,관음암불상터,(초정골,보살나무골,안장당골,바깥장당골),내원사,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지리 산행기 2021. 2. 23. 07:39
# 언제: 2021년 02월 21일 일요일
# 산행지: 석남사터,관음암불상터,(초정골,보살나무골,안장당골,바깥장당골),내원사,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15.31Km 09시간 06분
# 산행코스: 큰바구계곡가든 - 초정골 - 초정골능선 - 헬기장 - 안장바위 - 관음암불상터 - 당산나무 - 석남사터 -
보살나무골 - 안장당골 - (우)들개골갈림길 - (좌)연시골 - 동백골갈림길 - 슬뱅골갈림길 - 장당보호소
앵골,물가름골(갈림길) - 바깥장당골 - 내원사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산행시작 큰바우 계곡가든
오늘 초장골, 안장바위, 관음암불상터, 석남사터, 보살나무골, 장당보호소, 등 함께 산행할 산우님 목포에서 오신(인디안,날개)님 진주에서(쉬블링,배완식), 그리고 광주 팀,...ㅎㅎㅎ
산행전 여유있게 준비 운동도 하고...ㅎㅎㅎ
대원산방 가는 다리 건너고
초장골 가기전 국보급 쌍용 코란도...ㅎㅎㅎ
초장골
산죽사이로 진입하여 능선으로 진행
초정골을 통해 치밭목능선 가기전 지리 산죽길 힘들다. 능선길은 잡목이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뚜렷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산죽이 지천으로 깔린 치밭목능선 자락, 의외로 산죽없는 편안한 능선을 타고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어느새 좌전방으로 치밭목능선 안부가 보인다. 좌우골 합수부에서 1시간 10여분, 줄곧 능선으로 오르다가 마지막에 능선 좌측사면으로 형성된 산죽지대를 뚫고 빠져나와 안장바위가 있는 치밭목능선 안부에 이른다.
안장바위 사거리 - 지리 산꾼 - 불매골 멋진 산우님 만남 - 함께 단체사진 남기고 - 난 지리 공부 일부분을 불매골팀으로 부터 만은 도움을 받는다.
불매골 산우님 만나뵈어 너무 방가웠습니다...ㅎㅎㅎ
경남 사천 지리 산꾼 배완식님
인장바위에서
존경하는 지리 산꾼 불매골 산우님 함께 담소 나누고 방가웠습니다.
안장바위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 에서 상봉, 중봉, 조망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 -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던 자리
큰 암사면위에 자리잡은 관음암 불상터, 단숨에 탄성이 나온다. 정면 우방향으로 천왕봉이 조망된다. 지능선의 끝머리, 불상터가 위치하고 있다. 한 눈에 굉장한 명당임이 느껴진다. 터는 서너평 가량의 아주 좁은 공간이다. 자료에는 관음암(觀音巖)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암자 암(庵 )을 사용하지않고 바위 암(巖)을 쓴것은 암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천에 불상만 안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석불자리에는 작은 돌이 꽂혀있다. 치밭목 능선자락 해발 850m, 양지 바른곳,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 천왕봉을 마주보며,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66년), 지금부터 1250년전, 그들은 이곳에 불상을 세웠다. 불상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1947년 이씨 형제가 발견할 때까지 1181년간 이곳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휑한 터만 남았다.
이곳에 있던 불상은 이제 내원사에 있다. 오랜 세월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팽개쳐 있다가 국보로 지정된 사리함의 연계가 확인되면서, 한순간 그 가치를 인정받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후 26년이 지난 올해 초(2016.1.8) 국보로 승격되었다, 국보 제233-1호, 정식 명칭은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다.
그것보다 앞서 석불좌대에서 나온 사리함은 1986년에 국보(제233호)로지정된 바 있다. 사리함(납석사리호)은 1947년 함께 도굴되었다가 진주의 골동품상을 거쳐 부산시립박물관으로 넘어갔다. 현재 부산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함 명문에는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66년)에 불상을 안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두와 한자로 적힌 내용에는 '법승과 법연이라는 두 승려가 죽은 "두온애랑"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불상을 조성하고 무구정광다리니경과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두온애랑은 신라화랑으로 수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지리산에서 훈련중에 죽었을까. 그래서 부모나 국가에서 죽은 화랑의 영혼을 달래려 조성토록 하였을까.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만 있고 이제 내원사에 있는 관음암(觀音巖)불상, 석조비로자나불상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에서 조망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 -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던 자리
관음암 불상터, 아주 협소한 공간이지만 지능선이 불툭 혹처럼 튀어나온 곳, 기운 한곳에 모인 곳. 척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불교신문 자료발췌
1250년 전에 ‘태어나’, 어느 순간 인간들의 눈에서 사라졌다가 70년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마을로 내려와 참화는 피했지만 본체와 안에 들어있던 사리함과 받치고 있던 좌대가 서로 흩어져 본래 하나였음이 밝혀지기까지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몸통에 조성연대가 새겨진 사리함인 항아리가 먼저 국보로 지정됐다. 국보 제233호 납석제호(蠟石製壺)다. 그리고 사리함을 품고 있던 불상이 지난 1월8일 국보로 지정됐다. 국보 제233-1호 ‘석남암 사지(石南巖寺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명명됐다. 보물 제1021호가 국보로 승격된 것이다. 이 불상을 봉안하고 있는 산청 내원사는 오는 4월9일 비로자나불 국보 승격 봉축기념법회를 봉행한다. 원래 이 절에서 열던 지리산 성모제를 겸한 행사다. 내원사 산신각에는 천왕보살상이 모셔져 있어 마야성모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 불상 덕분에 산청군도 국보를 소장한 고장이 됐다. 내원사가 석조비로자나불 국보 지정을 지역민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봉축하는 이유는 단지 문화적 역사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이 불상이 1000여 년 만에 다시 사람들 눈에 나타나고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인연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신라 혜공왕 2년 766년에 조성한 석조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상이다. 지권인을 한 이 불상의 발견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은 8세기에 비로자나불이 조성됐음이 밝혀졌다. 신라시대에 들어온 화엄은 지금까지 1000년 넘게 한국불교 중심 사상, 신앙을 이루고 있다. 철제비로자나불로 인해 신라 하대 선종과 함께 비로자나불이 이 땅에 풍미한 줄로 알았다가 이 불상의 발견으로 그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다.이 불상은 경주 불국사가 창건되던 시기 만들어졌다. 불국사의 조성 주체가 지체 높은 관료인 재가자인 반면, 수도 경주에서 떨어진 산청의 비로자나불은 스님이 조성자다. 이 역시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사리함은 불상 몸통이 아니라 좌대에서 나왔다. 복장을 사람 몸으로 인식하는 중국과 다른 신앙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견이다.
이처럼 1000년 전 이 땅의 불교와 문화 예술 시대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를 담은 석조비로자나불은 어느 순간 사찰과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지리산이 현대사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터로 전락하기 직전 마을에 살던 이 씨 형제가 산에나무하던 중 1000미터 높이 산봉우리에 있던 불상을 발견하고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그런데 사찰에 있던 불상이 민가로 가자 그 집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가 앓고 노모가 몸져 눕는 불운이 겹쳤다. 불상이 있던 곳은 사찰이었다. 불상은노천 석불이었을 것이다. 닳아 작아진 코, 형체만 남은 얼굴 등이 1000년간의 풍상(風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리산에 전쟁의 여진이 남아있던 1953년 원경스님이 내원사로 와서 기도 정진한다. 불상이 발견된 곳과 10km 가량 떨어진 내원사는 태종 무열왕대에 조성한 유서 깊은 사찰로 무염국사가 한 때 주석했던 덕산사 터다. 형제는 불상을 내원사에 모셨다.
이 씨 형제와 함께 갔던 같은 마을 조 씨는 나무로 된 좌대를 열고 중대 안에 있던 곱돌 항아리를 꺼내 10만원에 팔았다.
항아리는 진주의 박 씨 성을 가진 골동품 행상에게 넘어갔다. 박 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박경원 부산시립박물관 관장에게가져가서 보였다. 1981년이었다. 박 관장은 항아리 겉면에 ‘영태 2년’이라 새긴 글을 보고 한 눈에 보통 유물이 아니란 것을알았다. 영태 2년은 당나라 연호로서 신라 혜공왕 2년 766년이다. 항아리의 몸통에는 조성연대가 적힌 조상기가 음각돼 있고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밑바닥에는 4줄 22자 이두문이 초서로 음각돼 있었다. ‘영태 2년 법승·법연 두 승려가
돌아가신 두온애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로자나불 불상을 만들어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적힌 귀중한 유물이었다. 1986년 곱돌 항아리 즉 납석제호(蠟石製壺)는 국보 제233호로 지정됐다. 이 항아리가 내원사 비로자나불상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90년 내원사 비로자나불도 보물로 승격됐다.
마을 주민들이 무거워 가져오지 못한 좌대와 광배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헬기를 동원해 옮겨 불상을 복원하고 4년 뒤 보물로 지정했다. 영산스님은 “내원사 인근 수십 리에 암자가 12곳이고 보물 석탑이 다수 현존하는 화장세계와 다름없는 도량이었다”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1250제자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1250년 만에 불상이 국보로 지정된 것이 예사로운 인연이 아닌 것으로 여겨 이곳 산청과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법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납석제호 바닥에 적힌 글귀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로자나부처님 은혜가 항상 머물러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모든 재앙이 소멸하며 병이 없어지고 삼악도가 없어지리니.’ 스님은 “비로자나불을 친견하는 모든 인연들은 그 같은 가피를 입을 것”이라고 축원했다. [불교신문3185호/2016년3월16일자]
석남사터 가는 가는 지능선의 당산나무
석남사터 주변 - 돌탑지, 무너진 돌탑들
돌탑 지나 석남사지 하단, 중단, 상단, 터 가는 중
석남사터 하단터 - 하단터가 가장 넓다. 석축도 길고
배완식 님
꺼비...ㅎㅎㅎ
하단 샘터 - 아마 지리에 있는 폐사지에서 최고 큰 샘터 인듯?
중단 석축
석남사터 중단에 기와파편
상단터의 위쪽에 탑이 위치한 듯 탑 부자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계사 탑을 닮은 삼층석탑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파괴되어 나뒹굴고 있다. 1300여년전 신라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탑 받침석과 탑신을 만져본다.
장당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잊혀진 역사와 문화, 아무리 비법정이지만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상단터의 석탑자재들
역사적 문화 현장이 너무 손실되어 있고 방치되어 있어 마음 아프다.
아무리 비법정이지만?
석남사터 중단 샘터
석남사터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시간...ㅎㅎㅎ
목포 인디안님 준비한 고갈비
김치 딹, 볶음
짱둥어 탕
매생이 떡국
석남사터에서 맛있는 점심식사 후 보살나무골 지능길 걷는다
보살나무골 지능길에서 조망되는 상봉, 중봉
석남사터 들머리 이정표 역할하는 우량기 - 좌측으로 내원사, 바깥장당골, 우측으로 안장당골, 보살나무골, 들개골, 연시골, 동백골, 슬뱅이골, 장당보호소, 앵골, 조래산막골, 물가름골, 바람골, 등 갈림길
산막터
슬뱅이골 갈림길
장당보호소 가기전 계곡 건너
장당보호소 - 장당보호소는 경상대학교 연습림 관리 산막이다. 장당골 출입이 통제되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폐허처럼 보이지만 가끔씩 야영 캠프로 이용되고 있다.
지리산 장당골 장당보호소 생태산행 - 내원사주차장-장당골-장당보호소(왕복/15km)
지리산 최후의 보루이며, 마지막까지 개방하지 않고 남겨 둘 곳으로 예상되는 장당골, 그래서 출입통제구역으로 묶인 지 오래다.
지리산에는 무수한 골이 있고 장당골 보다 더 원시적이고 아름다운 골도 많다. 그런데 왜 유독 장당골을 중요시할까. 아마도 입지조건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풍부한 생태환경을 갖추고 있더라도 접근이 어려우면, 식생의 조사,분석이 용이하지 않을테고, 예측과 대응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환경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모범적인 선도지역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선도지역으로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바로 장당골이다.
지리산 주능부에서 약간 변방으로 비켜 서 있고, 골의 삼면이 황금능선과 써리봉,치밭목능선으로 완전 둘러 싸여있다. 유일한 입구인 내원사쪽은 호리병 입구처럼 좁지만 골 내의 유역은 아주 넓다. 그래서 외기의 영향도 덜받아 생태계 보전에도 유리하다. 골의 길이도 엄청 길어 생물 다양성 확보에도 좋은 조건이다. 장당골은 써리봉 동쪽사면에서 비롯되어 무제치기 폭포를 거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까지 이어지며 그 길이가 장장 20km에 이른다.
그리고, 수많은 지류들을 품고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음지성과 양지성 골이 두루 분포하여 식생 또한 다양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골이 완만하고 옛 산판도로가 남아있는 등 접근성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여름이면 짙은 숲과 청류, 아름다운 와폭이 빛나고 가을이면 다양한 식생을 바탕으로 온 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비경을 연출하는 곳이 장당골이다. 이래저래 보배로운 장당골,
이런 장당골로 숲해설과정 동기생들과 생태탐방을 다녀온다. 코스를 안내하며, 코스는 내원사 주차장을 출발해 안장당의 경상대학교 학술림의 장당보호소까지 왕복하는 일정이다. 왕복거리는 15km. 일부에게는 부담되는 거리다.
만추의 장당골이 참 호젓하다. 산행목적이 생태탐방이니 나무에도 눈이 간다. 이나무 저나무 살펴보면 나름의 특색이 있다. 평소 몽땅거려 도매금으로 '잡목'이라 불려지던 나무들, 이들도 제 이름이 있고, 제 역할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 풍부한 식생과 다양한 생태환경, 이를 바탕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이 살아간다.
생태탐방길... 참 골이 길다. 오전내내 걸어도 바깥장당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민가 조금 못미친 계곡가에 자리를 잡고 소풍나온 아이들 처럼 들뜬 마음으로 도시락을 펼치고, 성찬을 즐긴다. 이번 참여자 거의 대부분 장당골이 처음이라 감흥도 커보인다. 청류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과 가을색으로 변한 숲 길이 끝도 없이 펼쳐지니...
오찬 후 1인 1가구의 민가를 지나 안장당으로 접어든다. 주변에는 농경지 흔적이 많다. 장당골에는 6. 25이전까지 5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전쟁 와중에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로 이용되자 소개령이 내려지고, 그들은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60년대에 일부 장당골에 들어와 정착했지만 세월속에 사라져 갔다.
심처로 들수록 길은 거칠어 진다. 예전의 산판도로는 군데군데 유실되고 흙은 쓸리고 돌멩이만 남았다.
내원사 주차장에서 장당보호소까지는 약 7.5km, 오후 2시경 장당보호소에 도착한다. 장당보호소 주변 일대가 경상대학교 학술림이다. 이 보호소가 학술림 연구조사의 베이스캠프 격인데, 개보수를 하지 않으니 거의 폐허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곳이 일본 큐슈대 연습림이었고 당시 잣나무 조림도 하였다고 한다.
장당보호소를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며 아름다운 장당골, 의미있는 생태탐방을 마무리한다.
-퍼온글- 꼭 공부 하고 싶은 지리 품속 이여 좋은 글 퍼 왔다.
장당골 상류부 앵골
김규철씨 농막과 폐가
바깥장당골 분위기
내원사 전경 - 내원사(內院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로,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원경(圓鏡)스님에 중건되어 내원사라고 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웅전 - 삼층석탑 옆에는 사찰의 중심건물로 금당격인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어,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익공계 팔작지붕인데, 전각의 규모에 비해 유독 지붕이 커보이며, 1960년대 지었다고 하니 원경(圓鏡)스님이 중창 하면서 세운듯 합니다.
지리산 내원사(內院寺)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와 내원리, 장당리의 경계에 있는 절로 1300여년전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無染 : 801~888)가 창건하고 절 이름을 덕산사(德山寺)라고 하였으며, 이 후 10여개의 암자를 거느닐 정도로 번창하였으나 500여년전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전소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을 방치되어 오다가 1959년 3월경 원경(圓鏡)스님이 절터를 찾아 복원한 절로 이 때 절 이름을 내원사로 변경하였다.
대웅전의 서편에는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내원사 삼층석탑(內院寺 三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4.8m의 크기이며, 석탑의 북쪽에는 법당터가 있었고, 주변에는 석등의 부재(部材)와 석탑의 상륜부(相輪部) 석재, 여러 석조물의 조각 등이 놓여 있어, 이곳의 사찰은 남향한 1탑 가람 배치를 하였던 양식으로 보여지며, 이 석탑은 9세기 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에 2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긴 것은, 지리산 주변 지역에 있는 석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웅전 윗쪽 서편에는 아담한 규모의 "비로전"이 자리하고 있어, 비로전에는 국보 제233호로 지정된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다.
내원사에 안치된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 서기 766년(혜공왕 2)에 제작된 전체 높이 117㎝, 불상 높이 108㎝의 불상으로,
원래 이 비로자나불상은 관음암(觀音巖, 865m)불상터있었는데 이곳에 흩어져 있던 석조대좌와 광배 조각도 이 불상과 한 조를 이루는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이곳 내원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원사에 들러 오늘의 주인공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알현한다. 귀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지리산중 대찰 석남사,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3층석탑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부서진 석탑 부재를 주워모아 그 자리에 복원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리산중, 버려진 대찰터와 1250년의 세월을 간직한 석불?
머리의 육계(肉髻)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 되었고, 머리칼은 소발(素髮)이며 머리 윤곽은 둥글고 완만한 편이며,
얼굴은 둥글고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신라 불상의 원만상(圓滿像)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팽창된 뺨의 부피감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얼굴의 원만상은 8세기 불상 가운데에도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이 불상은 당대의 뛰어난 명장(名匠)의 손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퍼온글-
불상의 상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 하였고, 오른손은 약간 들어 가슴 부근에 대어 주먹을 쥐었으며, 왼손은 무릎과 거의 수평이 되도록 내려 주먹을 쥐었는데, 두지(頭指: 집게손가락)만 곧게 세워 오른손 주먹 속으로 넣었습니다. 불의(佛衣)는 대의(大衣)를 통견으로 입어 전신을 감싸고 있는데 두께가 얇아 육체의 굴곡을 드러나게 하였으며, 옷주름 역시 가는 돋을띠 주름을 촘촘하고 유려하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 옷주름의 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퍼온글-
결가부좌한 하체의 너비는 비교적 넓은 편이나, 높이는 낮아서 높은 대좌 위에 앉아야 시각상 안정감을 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 졌는데, 8각의 하대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를 새겼고,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비바람에 의한 마멸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의 석불상(石佛像) 입니다.
-퍼온글-
"내원사 철광 연꽃돌" - 진주 쉬블링님 기 받고 있다
이곳의 "철광 연꽃돌"은 내원사 계곡에서 발견된 돌인데, 깨어진 부분이 연꽃모양과 닮아 있어 연꽃돌이라 하며,철광 연꽃돌은 좋은 기를 뿜어내고 있어, 5~10분정도 두손을 얹어 놓으면 좋은 기(氣)를 느낄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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