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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골,목통골(흰듬등,불무장등,통꼭지봉),칠불사,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지리 산행기 2021. 3. 2. 06:00
# 언제: 2021년 02월 28일 일요일
# 산행지: 연동골,목통골(흰듬등,불무장등,통꼭지봉),칠불사,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13.97Km 08시간 22분
# 산행코스: 칠불사 - 칠불사사면길 - 연동골(목통골) - 흰듬등 - 불무장등 - 불무장등능선길 - 통꼭지봉 - 뒷당재 -
바깥당치골 - 목통교 - 목통마을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칠불사(七佛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소재한 칠불사는 지리산(智異山) 토끼봉 남쪽 기슭 아래 해발 830m의 산등성이, 사방으로 치솟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옛날에는 나는 새가 아니면 찾아 들 수 없었던 곳에 자리잡은 이곳은 창건 설화(創建 說話)에 의하면 수로왕(首露王) 56년인 서기 97년, 가야(伽倻)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옥(許黃玉)사이에 태여난 왕자 10명 중에서 일곱 왕자(王子)가 외삼촌(外三寸)인 보옥 선사(寶玉 禪師)를 따라 출가하여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한후 3년간 수도하다가 수로왕(首露王) 60년(101)에 이곳으로 옮겨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참선을 계속했으며, 마침내 수로왕(首露王) 62년(103 : 신라(新羅) 파사왕(破娑王) 24년) 팔월 보름날 성불(成佛)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하자 이를 기뻐한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절을 크게 짓고"칠불암(七佛庵)"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이 위치한 "범왕리(凡王里)"의"범왕(凡王)"이란 말은 일곱 왕자(王子)가 수도를 할 때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찾아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붙은"범왕(梵王)"이 변한 이름으로 지금의 목통 마을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허황옥(許黃玉:왕비)이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 : 지금의 정금리 대비(大比)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통광스님의 천일기도와 칠불사 복원
여순 병란 사건과 6.25 전쟁으로 이어진 지리산 공비토벌의 참화로 1951년 1월에 칠불암의 전 가람이 모두 불타 버리고 폐허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20여 년간 방치된 칠불성지에(七佛聖地)에 1963년 제월 통광(霽月通光)선사가 운수행각(雲水行脚)차 이 곳을 지나가다가 천고의 성가람(聖伽藍)이 찬 재속에 묻혀 있는 것을 통탄하고 반드시 옛 절을 복원하리라는 서원(誓願)을 세워 산죽과 억새풀로 작은 초막을 짓고 관음보살(觀音菩薩)께 천일(千日)기도를 봉행하였다.
통광스님은 천일기도를 봉행하던 중 칠불암 터를 방문하신 경봉스님으로부터 칠불암 복원에 관한 격려를 받으시고 또한 관세음보살로부터 열쇠꾸러미를 받는 현몽을 꾸었다. 스님은 천일기도를 회향한 후 칠불암과 오대산 적멸보궁 남해 보리암 운허스님이 주석하시던 서울 봉은사 동국역경원 탄허스님 문하의 오대산 월정사 등을 오가며 수행정진 하시다가 1978년부터 문수전(文殊殿)을 시작으로 대웅전(大雄殿), 설선당(說禪堂), 요사체 등을 차례로 복원하고, 1983년 지방 문화재 144호로 지정된 아자방(亞字房)을 복원, 그 후 보설루(普說樓), 종각(鐘閣), 조사전(祖師殿), 공양간을 차례로 준공, 대웅전 내에 목각으로 삼존불상, 후불탱화, 신장탱화, 칠불영각 등을 새로 조성하고 허북대에서 식수원을 찾아 칠불사에 이르는 상수도 설치, 범왕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경내 진입로 확장, 사찰주변 임야 50만평 매입, 1989년 운상선원 복원에 이어 아자방을 제외한, 전 가람을 동기와로 번와하고 연동에서 칠불사까지 5km에 이르는 수도 공사, 식당, 요사체 건축, 초의선사 다신탑비, 칠불사 복원사적비 건립에 이어 일주문을 건립, 조경을 마무리하여 20여년에 걸친 칠불성지 복원 대작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였다.
이 후에 초의선사의 '동다송'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칠불사를 비롯한 화개골 관련내용을 근거로 초의스님을 기리는 선다원(禪茶院)을 짓고 지리산 깊숙한 곳, 오랜 역사와 문화가 숨을 쉬는 유서깊은 칠불사에 재가불자와 일반인을 위한 템플 스테이 건물도 건립하여 완벽한 수행 공간을 확립하였다.여순 병란 사건과 6.25 전쟁으로 이어진 지리산 공비토벌의 참화로 1951년 1월에 칠불암의 전 가람이 모두 불타 버리고 폐허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20여 년간 방치된 칠불성지에(七佛聖地)에 1963년 제월 통광(霽月通光)선사가 운수행각(雲水行脚)차 이 곳을 지나가다가 천고의 성가람(聖伽藍)이 찬 재속에 묻혀 있는 것을 통탄하고 반드시 옛 절을 복원하리라는 서원(誓願)을 세워 산죽과 억새풀로 작은 초막을 짓고 관음보살(觀音菩薩)께 천일(千日)기도를 봉행하였다.
통광스님은 천일기도를 봉행하던 중 칠불암 터를 방문하신 경봉스님으로부터 칠불암 복원에 관한 격려를 받으시고 또한 관세음보살로부터 열쇠꾸러미를 받는 현몽을 꾸었다. 스님은 천일기도를 회향한 후 칠불암과 오대산 적멸보궁 남해 보리암 운허스님이 주석하시던 서울 봉은사 동국역경원 탄허스님 문하의 오대산 월정사 등을 오가며 수행정진 하시다가 1978년부터 문수전(文殊殿)을 시작으로 대웅전(大雄殿), 설선당(說禪堂), 요사체 등을 차례로 복원하고, 1983년 지방 문화재 144호로 지정된 아자방(亞字房)을 복원, 그 후 보설루(普說樓), 종각(鐘閣), 조사전(祖師殿), 공양간을 차례로 준공, 대웅전 내에 목각으로 삼존불상, 후불탱화, 신장탱화, 칠불영각 등을 새로 조성하고 허북대에서 식수원을 찾아 칠불사에 이르는 상수도 설치, 범왕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경내 진입로 확장, 사찰주변 임야 50만평 매입, 1989년 운상선원 복원에 이어 아자방을 제외한, 전 가람을 동기와로 번와하고 연동에서 칠불사까지 5km에 이르는 수도 공사, 식당, 요사체 건축, 초의선사 다신탑비, 칠불사 복원사적비 건립에 이어 일주문을 건립, 조경을 마무리하여 20여년에 걸친 칠불성지 복원 대작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였다.
이 후에 초의선사의 '동다송'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칠불사를 비롯한 화개골 관련내용을 근거로 초의스님을 기리는 선다원(禪茶院)을 짓고 지리산 깊숙한 곳, 오랜 역사와 문화가 숨을 쉬는 유서깊은 칠불사에 재가불자와 일반인을 위한 템플 스테이 건물도 건립하여 완벽한 수행 공간을 확립하였다.
불타기 전의 칠불사 모습 (김경렬 저 ' 다큐멘타리 지리산 2' 에서 )
1930년대의 칠불사
공비토벌을 이유로 아군에 의해 사찰이 전소(全燒)가 되고 폐허가 된 옛 칠불사 터
폐허의 칠불사 터에 간소하게 들어선 건물들 (1960년대 사진)
영지(影池)
칠불사라는 명칭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라는 설화에서 비롯된다. 출가한 자식들을 보기 위해 수로왕과 부인 허황후가 직접 행차했지만 수도하는 스님을 방해할 수 없어 사찰 입구에 연못을 파 그곳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다. 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쳤다는 영지(影池)에는 지금 주위의 나무와 하늘이 담긴다. 맑은 날이면 하늘을 나는 물고기를 볼 수 있다 빛깔 고운 잉어가 유영하는 모습이 일곱 왕자가 환생한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몽환적이다. 왕과 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각각 범왕마을과 대비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ㅋㅋㅋ - 우린 금줄을 접수한다.
인허당탑
운상선원(雲上禪院) - 동국제일 선원 칠불사 운상선원 입니다. 지리산 깊고 깊은 반야봉 및 산자락에 위치한 칠불사 해발 800미터 이상에 위치하여 운해가 드리울때면 구름위에 있는 선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운상선원입니다.
부휴대사선수탑
부휴선수 浮休善修(朝鮮) 1543-1615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김씨. 호는 부휴(浮休). 남원출신. 아버지는 적산(積 山),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 몽을 꾸었으며,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에 부모의 허락 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 뒤 부용(芙蓉) 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그 뒤 덕유산․가야산․속리산․금 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 愼)의 장서를 7년 동안 읽었다. 그의 필법은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당(四 溟堂 )과 함께 당대의 2난(二難)이라 불렸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 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 수십명을 만났다. 차수(叉手)를 하고 선 그 의 앞에서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그가 태연부동하게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대기(大奇)하여 절한 뒤 물러갔다.
그 뒤 가야산 해인사 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 )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며칠 동 안 옆에서 모셨다. 얼마 뒤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 (圓覺經)>을 위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 원각경>울 다 외운 다음 뱀에게 가서 한발로 그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의 설법의 힘을 입사 와 이미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는 두류산에 있 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가 판명되어,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한 다음 설법을 청하여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가사 한 벌과 푸른 비단장삼 한 벌, 푸른 비단바지 한 벌, 금강석 염주 하나와 진완 (珍玩)을 주었다.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齋)를 설하여 그를 증명으로 삼았 다. 1614년에는 조계산에서 방장산 칠불암(七佛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 음해 7월 제자 각성(覺性)에게 부법(付法)하였다. 그해 11월 1일 목욕을 한 다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나이 72세, 법랍 57세였다.
청굴
칠불사 사면길 숯가마 터
칠불사 사면길 걷다 큰 암 위에 있는 묘 - 그리고 주변 조망
날라리봉(삼도봉)조망
불무장등과 토끼봉능선 사이에 위치한 연동골(목통골), 지리주능선 남사면의 대표적인 명품계곡 중 하나이다. 잘 발달된 암반과 적당히 거친 형세로 소폭과 와폭, 소와 담이 즐비하다. 삼도봉과 화개재,토끼봉 남사면의 짙은 수림과 넓은 유역을 수원으로 하고 있어 항상 정정옥수가 넘쳐 흐르는 곳이다.
상부의 좌골은 삼도봉, 우골은 토끼봉에 뿌리를 두고 불무장등과 토끼봉능선, 양사면의 물을 모아 목통을 지나 신흥에서
화개천에 합류된다. 목통마을 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목통골이라 부르지만, 예전에 골안에 연동마을이 있었어 연동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연동골(목통골)
지리는 역시 지리다 아래는 따뜻한 날씨 - 위로 오름으로 녹지않는 눈 그리고 계곡에 얼음 길
약 고도 1200m에서 조망되는 토끼봉, 그리고 화계재
지리산행에 횡재 한날 노루둥댕버섯 채취...ㅎㅎㅎ
불무장등 능선 길
흰점등
흰점등에서 조망 화계재, 토끼봉,
불무장등
지리하면 역시 산죽길-ㅎㅎㅎ
불무장등 능선길 에서 멋진 조망 - 불무장등-통꼭지봉 사이 전망바위에서 바라본앞쪽 통꼭지봉과 잘록한 부위 안당재 그 넘어 황장산 촛대봉 좌측(맞은편 칠불사와 토끼봉(범왕)능선 및 뒷당재 또는 바깥당재 그 넘어 빗점골) 우측마을 농평마을 조망 - 멋진 그림이다.
지리 산죽 길-ㅎㅎㅎ
통꼭지봉 가기전 편안 길 걷다
통꼭지봉 정상kt 기지국
통꼭지봉에서
우린 또 금줄을 넘는다 - 정등로진입
농평마을이다
임도 - 당재 5분거리 못미쳐 구례 토지면 농평마을과 하동 화개면 목통마을 사이 임도
뒷(외 바깥)당재
지리산 당취(黨聚)
지리산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해발 750m의 칠불사는 반야봉 줄기 아래에 있는 고찰이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7왕자가 여기에서 도를 닦고 모두 부처가 됐다는 명당 절이다.
“정면에 보이는 허리가 잘록한 고개가 ‘당재’이고, 왼쪽으로 보이는 고개는 ‘내당재’라고 부릅니다.”
“당재는 무슨 뜻입니까?”
“당취들이 저 두 고개에서 지키고 있다가 검문검색을 했다는 것이죠. 지리산 일대에서 돌아다니던 불법 승려들을 검문검색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리산에 와서 당취들이 활동했던 지명 정보를 확실하게 듣게 된 것이다. 칠불사에서 당재를 넘어가면 피아골, 연곡사쪽이 나온다. 전남 구례(求禮)쪽과 경남 하동 화개(花開)계곡과의 연결통로가 당재였다. 칠불사쪽에서 당재를 넘어가보니 농평·당치 마을이 나온다. 농평에는 노호농골(狐骨·늙은 여우가 뼈다귀를 가지고 놀다)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진 곳이라서 옛날부터 <정감록>을 신봉한 비결파(秘訣派)들이 이 노호농골 터를 찾아 많이 모여들었다.퍼온글(조용헌 박사님)
뒷(외 바깥)당재
내(안)당재 뒤로 바른재 이건만 보이지 않는다
목통마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목통마을 목통교, 삼도봉과 토끼봉에서 흘러내린 목통골의 물이 화개천으로 흘러가는 곳으로, 그전엔 으름덩굴(木桶, 목통)이 많아 화개골 주민들은 (먹통밭)으로 불렀다는데, 으름을 이 고장 방언(사투리)으론 먹통이라 한다는, 언제부터인가 행정관서에서 (목통마을)이란 이름을 붙였다.
산행후 조촐한 파티를 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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