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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부 7폐사지(암자탑방)
    지리 산행기 2022. 5. 3. 16:27

    # 언제: 2022년 05월 01일 일요일

    # 산행지: 동북부 7폐사지(암자탑방), 지리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0.25Km  06시간 36분

    # 산행루트: 적조암 - 노장동골 - 산죽비트 - 박쥐굴 - 헬기장 - 상대날등 - 금낭굴 - 선열암터 - 선열암사거리 -

                    상대굴 - 황새날등 -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 - 안락문 - 신열암터 - 고열암터 - 의론대 - 솔봉능선 -

                    선녀굴 - 유슬이굴 - 선열암사거리 - 배바위 - 환희대 - 노장대동 - 지장사터 - 적조암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엄천교

     

    花巖(巖:산봉우리암)은 꽃봉산을 가리킴(연꽃의 형상임)

     

    꽃봉산은 花巖이다. 花巖은 꽃봉산 아래 특정한 바위가 아니고 꽃봉산 이름이 花巖이다.

    巖은 바위라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의 뜻도 있다.

    花巖에서 巖은 바위가 아니고 峯을 뜻한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당산나무-점필재(김종직) 쉬어간 곳

     

    김종직(金宗直, 1431~1498)의 호는 점필재이고 본관은 선산이다.  그는 16 세에 과거에 낙방하고 29 세에 급제한 뒤 성종 때에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평소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고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 1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이들은 이른바 영남사림학파로서 훈구파와 대립, 수차에 걸친 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종직도 무오사화 때 그가 쓴 (조의제문) 파동으로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그의 나이 42살, 경상도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에 그의 제자 조위, 유호인, 한인효 등과 함께 8월 14일부터 19일(음력)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기행하였다.  그의 산행코스는 함양 - 중봉 - 천왕봉 - 세석고원 - 영신사 - 함양 마천이었다.  그는 지리산을 등반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그 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 대단한 만족감을 보였다.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화암(花巖) 아래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적조암

     

     

    산죽비트(노장대골) - 박쥐 굴 - 갈림길

     

     

    박쥐 굴 내부

     

     

    박쥐 굴

     

     

    헬기장

     

     

    금낭굴 주변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금낭굴

     

     

    금낭굴 내부

     

     

    금낭굴 내부에서  사진 한장

     

     

    선열암 가지전 지름 길

     

     

     

    선열암 오름에...ㅎㅎㅎ

     

     

    선열암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掩藤 : 등나무 扃 : 빗장경 닫을경. 矗矗 : 우뚝솟을 촉. 冷冷 : 맑고 시원하다. 結夏 : 하안거를 마침. 錫 : 錫杖, 禪杖 도사 승려가 짚는 지팡이 只 : 다만. 猿鶴 : '원숭이와 학'의 의미는 猿鶴沙蟲(원학사충)의 준말로 은거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 주목왕周穆王의 군대가 몰살되어 군자는 죽어서 원숭이나 학이되고 소인은 죽어 모래나 벌레가 된다는 고사.

     

     

    기와, 옹기그릇 파편

     

     

    선열암 촉촉수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운근(雲根)은 공기가 차가운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고 물방울이 맺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높은 곳에서 톡톡(촉촉 : 의성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데 절묘한 시어입니다.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퍼온글- -도솔산이님-

     

     

    상대굴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독녀암(노장대) - 독녀암(노장대)바위군(群), 또 다른 별세계 바위 숲, 거대한 암봉군의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 [옹암(甕巖),진주독바위], [하동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로 불린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으로 등장하는데, 한 여인이 이곳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득도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돌기둥이 숲을 이룬 듯 솟아있다.

     

     

    함양독바위의 지명을 고문헌에 근거하여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함양독바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인들이 함양 독바위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길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 또한 지명의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安樂門(안락문)'이라 쓰여진 큰 석문(石門), 전해지는 이야기는 빨치산들이 이곳을 들락거리며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하는데,安分樂道(안분낙도. 분수를 알고 도를 즐긴다)에서 온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락문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신열암

     

     

    신열암 샘

     

     

    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도솔산인님-

     

     

    기와, 옹기그릇 파편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金宗直, 佔畢齋)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고열암 샘

     

     

    의논대 조망 터

     

     

    벽송사 능선과 솔봉능선 사이에 송대마을 방향 - 저멀리 창암산

     

     

    법화산, 오도재, 오도봉, 삼봉산, 백운산, 금대산, 조망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 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 김종직의 議論臺(의논대) 詩에 나오는 소림 선방에 대하여

     

    미타봉(1164.9m) 뒤 송대 마을 쪽에 석굴이 있는데, 석실 내부에 바닥을 평탄(平坦)하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그리고 상 허리길이 고열암에서 미타봉으로 연결이 되는데, 삼열암의 승려들이 이 길로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의 지명은 암자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화암, 환희대, 의논대, 향로봉, 미타봉, 소림 선방 등 모두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환희대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10地) 중 첫 번째를 말한다.

     

    ☞ 환희지(歡喜地) :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 중 10지의 중 첫 번째를 말함.

     

    그렇다면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나오는 '소림 선방'은 어디인가? 그동안 막연하게 '바위 사이 한 곳'을 미타봉으로 생각지만, 이번에 직접 석굴 내부로 들아가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조망 바위에 올라가니, 의논대와 고열암이 코 앞에 들어왔다. 또한 암봉 서너 곳에 일부 남아있는 석축은 수행하는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담장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타봉은 마미타불의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미타봉의 석실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胡僧(참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소림 선방'의 시어로 나타나 있다. '소림 선방'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 수행을 했다는 소림굴(小林窟)을 말한다. 미타봉은 아미타불의 형상으로 붙여진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인도 꿋꿋따빠따기리(계족산)에 있는 가섭이 부처님 가사를 가지고 들어가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리며 선정에 들어간 석굴을, 영신봉(계족봉)의 가섭대에 옮겨다 놓은 것처럼, 달마 대사가 면벽수행했다는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소림굴(小林窟)을 지리산 미타봉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송대에 사는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미타봉 아래에 인공으로 조성된 석축과 자연 동굴이 여러 개 있다고 한다. 끝.

     

    *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 :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산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의어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출처 : 다음 백과

     

     

    선녀굴 암지

     

    선녀 샘 - 가뭄에도 물 마르지않음

     

     

    선녀굴암지 에서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 

    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

    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

    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

     

     

    선녀굴,솔봉,유슬이굴,의논대 - 갈림길

     

     

    유슬이굴 가는 길에

     

     

    유슬이굴

     

     

    유술이굴 주변 기와, 옹기그릇 파편

     

     

    선열암 사거리 

     

     

    환희대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3박4일)

     

    짚신을 신고 지장사를 떠나다


    이제부터는 김종직 선생 일행들의 행보가 지장사에서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까지
    절(寺)에서 절(寺)로, 절로절로 이어진다.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한차례 쉬고서
    [行至地藏寺 路崎 舍馬著芒鞋 策杖而登(행지지장사 기로 사마저망혜 책장이등....)

    “지장사에 당도한 일행은 이곳서부터는 길이 나누어져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유두류록>은 전한다

    지장사에서 함양독바위를 거쳐 천왕봉 가는 길은
    절 뒤 능선으로 해서 상대날등을 타고 가는 길과,
    절 아래 노장동 마을로 가는 길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

    지장사 이후에 지나간 환희대 및 선열암, 신열암 두절의 위치를 추정하여 가늠해 볼 때
    <김종직> 선생의 등로는 노장동 마을 방향이다.

     

     

    8 월 14 일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고 깊숙하여 벌써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1마장쯤 가니 환희대라는 바위가 있었다.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그 아래는 천길이나 되는데,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등 여러 절이 굽어보였다.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에 지었다.  그 아래로 맑은 샘 두 개가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르는데, 물방울이 오목하게 파인 납작한 바위 위로 떨어져 괴어 있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법종이 "한 비구승이 참선하면서 우란분盂蘭盆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돌 위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의 곡식을 찧을 만한 조그마한 절구통이 놓여 있을 뿐이다.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이 역시 치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었다.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법종이 한 말이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야 꼭대기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현 경남 산청군]을 오가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여러 산봉우리와 함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이 솟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와서 보니 몸이 오싹하고 황홀하여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 서쪽에는 의논대議論臺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뒤에 처졌다.  그래서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에 오르니 발 아래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탈한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이름이 붙은 것이다.

     

    조금 뒤에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하였다.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이를 눈치챈 하납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라 시험삼아 거의 20리 길을 걸었다.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잠을 깼다.  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환희대

     

     

    법화산, 삼봉산, 조망

     

     

    저장사 터 가기전 케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조(先祖)께서 1472년 지리산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점필재집에 수록되어 있는 기행기록이다.

     

    일시 : 1472년 8월14일 - 8월18일 (4박5일, 음력)

    8월 14일

    함양관아 출발 - 엄천사 - 화암(현 동강마을) - 운서마을 - 지장사 - 환희대 - 선열암 - 신열암 - 고열암(1박).

     

     

    지장터 기와 옹기그릇 파편

     

     

    노장대동 마을 뽕나무 지장터 가기전 갈림길에 있다

     

     

    노장대동 마을

     

    노장대동 마을 생활 도자기 파편

     

     

     

    노장대동 마을 의 역사를 말해주는 아름드리 돌배나무

     

    마을 터 중간으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면 운암마을에서 올라오는 함양군에서 지정한 탐방로인 함양 독바위(노장대)가는 일반등산로와 만난다.

    김종직 선생은 이곳을 지나면서 숲과 구릉이 깊고 벌써부터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나다. 1리쯤 가니 환희대가 있다.

     

     

    돌배나무(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산 1257번지 지목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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