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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롱(九隴)길(아홉모랭이길)지리 산행기 2022. 10. 2. 16:29
# 언제: 2022년 10월 01일 토요일
# 산행지: 아홉모랭이-구롱(九隴)길, 옹암, 미타봉,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4.89km 08시간 28분
# 산행루트: 송대마을 - 선녀굴골 - 선녀굴 - 의논대 - 고열암터 - 아홉모랭이(구롱길) - 방장문 - 쑥밭재 -
청이당 - 옹암(산청,진주 독바위) - 석문 - 초령(새봉) - 싸립재 - 상내봉삼거리 -
미타봉(소림선방) - 미타봉(상내봉)능선길 - 송대마을
선녀굴 암지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
議論臺(의논대)
"의논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도솔산인님-
아홉모랭이-구롱(九隴)길
1472년 김종직선생이 4박 5일 동안 지리산을 유람한다. 8월 14일 함양 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구롱길은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약 5km 구간의 상허리길 루트를 말한다. 평균 고도 1050m 고원의 지능선 모롱이를 돌아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아홉모랭이 길은 일강(一岡), 삼사롱(三四隴), 동부(洞府), 구롱(九隴)을 지나 청이당에 닿는다.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아홉 모랭이(구롱) 길 초입은 남쪽 사면 길로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른다. 숯가마터에서 50m 아래 송대 계곡의 발원지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친절한 샘이 있다. 일강샘이다.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상내봉) 방향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미타봉을 아직도 상내봉이라고 하는데 산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실계곡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와 습지를 지난다. 길은 평탄하게 남쪽을 향하고 산죽밭을 지나 작은 모랭이를 돌면 바위가 나타나는데 세 모랭이 이정표 바위이다. 이어서 네 모롱이 바위와 넓은 터를 지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阝(阜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한계였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최대한 지름길이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진주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노장대(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혹자(惑者)들이 모랭이의 숫자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 論하는데... 유두류록에서 이미 1, 3, 4, 9 모랭이를 언급하였으니, 답사자가 나머지 모랭이에 숫자를 붙이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2020년 3월 말 아홉모랭이 길을 연결했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갈 때마다 새롭다. 2년 동안 도사목(倒死木)과 덩굴을 걷어내고 묵묵히 케른을 쌓았다. 산길은 암자터에서 암자터, 집터에서 집터, 움막터에서 움막터, 숯가마터에서 숯가마터, 샘터에서 샘터, 이정목에서 이정목, 이정표 바위에서 바위, 고개에서 고개, 모랭이에서 모랭이, 돌 포장에서 돌 포장으로 길은 이어진다. 1000m가 넘은 고원지대에 5km가 넘는 인공으로 조성된 도로가 있다. 가야인(伽倻人)들이 건설한 가야(伽倻)의 고도(古道)라고 생각했지만,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가 산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산행은 심독(心讀)을 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탐사팀은 수없이 토론을 하고 현장을 찾아 퍼즐을 맞췄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람록 복원을 하면서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비상(砒霜)이 들어간 독약이다. 이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은 없더라. 끝. - 도솔산님-
방장문(方丈門)
김종직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길 방장문 석각 탁본(200709)
금년 3월 14일~15일 김종직 선생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 길을 찾으면서, 점필재 길 복원의 속도를 더하였다. 5월 16일에는 구롱 길의 여덟 모랭이에서 조봉근 주무관이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였다. 조박사는 완폭대와 은정대 오두인 석각을 발견하였고, 석각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7월 9일 탁본 사진을 보내왔고, 7월 12일 하동으로 내려가 탁본을 확인하였다.
▣ 일 시 : 2020년 5월 16일(토) 12:00경(발견)
▣ 장 소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구롱 길 중 여덟 모롱이)
▣ 좌 표 : E 127.741100, N 35.378400 고도, 1,097m
▣ 답사자 : 8명(조용헌 박사 외 역사문화조사단 7명)
방장문 탁본(200709)
1.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길 여덟 모롱이에 있는 석각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이체자이다. 서예대자전에서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행서와 서자불명(書者不明)의 예서에 보인다. 방장문(方丈門) 필획의 주인과 석각의 연대는 미상임.
2. 方丈의 어휘에 대한 유래
1)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지리산에 대한 설명
"杜甫詩所謂方丈三韓外註及《通鑑輯覽》云: "方丈在帶方郡之南。是也。(두보의 시에서 말한 '방장산은 삼한 외지에 있다'라는 구절과 《통감집람》의 '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2)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國。方丈卽智異山。瀛洲卽漢挐山。蓬萊卽金剛山也。"(두보의 시에 있는 '방장은 삼한의 외지에 있다'는 구절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나라(조선)에 있다.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한라산, 봉래산은 금강산이다.'라고 한다.)"
[출처] [관광자원해설] 국립공원 정리
3.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1)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04.01)
함양 군수 민인호가 함양명승고적보존회(보승회)를 조직하여 동군 유지 강위수(姜渭秀)는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天王峯에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박노익(朴魯翊)과 영원사승(靈源寺僧)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李璡雨)와 벽송사승(碧松寺僧)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 하였는데 두 곳이 모두 중봉이다.(兩處는 皆 中峯)
2)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과 상봉 및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3)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① 書者不明, 석각 시기 미상, 석각의 상태가 깊고 양호함.
②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이체자.(왕양명 필체)
③ 1922년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마암과 같은 시기에 새긴 것이 아닌가 추정함.
☞ 李璡雨(1897~1954)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유(性悠) 호는 은계(隱溪)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 출신. 천석꾼의 부호. 의탄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재산을 희사함. 1922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이진우와 벽송사 僧이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고 벽송사에서 마암까지 등산로를 정비함. 도계공원에 마천면민이 세운 송덕비가 있음.
옹암(甕巖),(산청,진주독바위)
동부능선상에 있는 산청독바위(일명진주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독(甕)바위라하며, 문수사 위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하여,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 한다. 지리산에 독바위가 세곳이 있다.
산청(진주)독바위, 함양독바위, 하동독바위, 산청독바위는 상단부가 翼善冠(익선관, 임금이 평상복(곤룡포) 차림으로 (정사를 볼 때 쓰던 관)보인다. 이곳 산청 독바위 조망은 중봉이후 두류봉능선 조개골 저멀리 삼정산 삼봉산 윗새재마을 써리봉 자락으로 진주방향 삼천포 와룡산도 조망된다.
초령(새봉)방향으로 조금 이동, 좌측사면으로 내려서서 석문에 든다.
규모있는 석문이다. 수직암벽위에 큰 바위가 다리처럼 걸쳐있으니 꽤 높이 있는 석문이 되었다. 평평한 상단석은 다리의 상판과 다름없다. 조망도 있다. 허골다리골과 벽송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좌측 반야봉에서부터 바래봉,덕두산, 삼신봉,법화산까지 서북방향의 조망이 그만이다.
초령(草嶺),새봉
1610년에 박여량(朴汝樑, 1554~1611)은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에 천왕봉을 유람하는데 상류암에서 자고 다음날 남여를 타고 혹은 걷기도 하며 "초령(草嶺)을 넘어 방곡리로 하산한다.초령은 함양과 산음으로 나뉘는 두 갈래 길의 분기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령을 쑥밭재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선과 위치로 봤을땐 새재가 아닌가 싶다. 그 부근으로 함양군과 산음현의 갈림길인 새봉이 있다.
새재하면 문경새재처럼 조령(鳥嶺)을 연상하기 쉬우나 이곳의 지명은 억새에서 왔다고 본다.
실재 재 부근으로 억새가 많고 경상도 사투리로 억새를 줄여서 "새"라고 하고
오봉마을을 통해 방곡리로 연결되는 최단거리 길이다.
상류암에서 조금내려서서 등고선을 따라 새재방향으로 가면 군데군데 2m가 넘는 옛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소림선방(少林禪房)
소림선방(少林禪房) 전망대에 오르면 선녀굴골 건너편으로 의론대가 잘보인다.
그이후로 의론대에서도 소림선방을 찾을수 있었다.
의론대 시어 속에서 가리킨 소림선방의 위치는 와불의 얼굴 안쪽에 있다.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
(김종직 선생이 의론대에 올라 "향로봉, 미타봉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고 한건 아마도 용유담에서 설명을 듣고 올라왔기에 그렇게 쓴것이라 생각된다. 용유담에서 보면 향로봉과 미타봉이 부처님의 다리 아래에 있는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론대에선 다리와 얼굴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議論臺(의논대)_김종직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출처:도솔산 연소재좌선대(坐禪臺)에서 - 좌선대(조망대)에 서니 가을 만추 멋진조망이 기차게 펼쳐진다. 발아래 송대마을과 선녀굴골, 좌우로 나래를 펼친 벽송과 솔봉능선, 삼봉산과 법화산, 마천일대와 함양읍내가 깔끔하게 조망된다.
미타봉(彌陀峯),(상내봉)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송대동(洞) - 송대마을 -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지점인 우론 벽송사능선이 길게 장막을 치고 좌론 솔봉능선이 감싸안고 위론 상내봉(와불산)이 솟아 청정 선녀골이 흘러내리는 전형적인 산골오지마을.
송대마을 입구에 있는 말귀바위
구 빨치산루트안내소 건물 - 함양군에서 오래전에 야심차게 설계(설치)건물이 이젠 이젠 흉물이 된듯하네요, 백무동에서 두지터가는길 벽송사 일대 그리고 이곳 곳곳에 설치되었던 안내판, 마네킹 등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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