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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시 모음
    지리산 이야기 2023. 11. 5. 12:49

    지리산 시 모음 - 권경업의 '지리산' 외

    지리산

    오를수록
    가슴 저린 산
    서럽게 서럽게
    눈물나는 산

    쫓기던 이 좇던 이
    영문 없이 끌려간
    핏덩이까지
    아물어간 상혼에도
    고통은 남아
    유월 짙푸른
    한을 삭이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하나됨을 바라
    초로에 반백이 다 되도록
    골마다 영마다
    바람으로 흐느끼는
    지리산은 서러운 산


    (권경업·산악인 시인, 1952-)


    행복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허형만·시인, 1945-)

     

     

    지리산 詩 - 천왕봉

    산은
    冠을 쓰고
    의젓하게 앉아 있더라.

    수많은 풍상이
    할퀴고 지나갔지만
    산은 꿈쩍도 아니한 채
    잔기침 몇 번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더라.

    기슭에 가득
    크고 작은 생명들을 놓아기르며
    수염 쓰다듬고
    앉아 있더라.

    긴 장죽에
    담배 연기 피워 올리며
    스르르 눈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라.


    (문효치·시인, 1943-)


    지리산 위에서 

    구름은 골짝마다 가득히 깔려있고
    굽이굽이 산들은 펼쳐져 있는데
    멀리 잿빛 산들은 구름 위에 올라 있다.

    능선마다 울긋불긋 피어나는 단풍들
    계곡마다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
    산길마다 사람들의 활짝 핀 모습들

    생사고락은 산에도 있는 것
    풍상에도 꿋꿋이 지켜온 신념
    고사목이 되어서도 그 기상 변함없네.

    세월에 묻힌 숱한 비화들
    적도 동지도 한겨레인데
    지리산은 말없이 안개만 깔고 있다.

    통천문을 지나서 천왕봉에 오르면
    하늘이 내려와 산아래 깔려있고
    광활한 지리산은 하늘을 품고 있다.


    (제산 김대식·시인)

     
    지리산 산행 - 뱀사골에서 

    거침없이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에
    멀어져 간 귀가 열리고
    반짝이는 푸른 물빛에
    어두워진 눈을 씻는다
    젖은 몸 낮추어 물살 헤치고
    무거운 그림자 끌고 다닌 발 담그면
    몸 속 깊이 박혀있던 독소들 하나씩 빠져나와
    흐르는 물 따라 줄행랑친다
    아, 무릉도원이 여기던가
    산이 좋아 산 찾아 길을 나서지만
    산다는 것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오르막, 내리막 크고 작은 고개를
    몇 개씩 넘으며 가뿐 호흡을 고르는 것이다
    앞만 보고 조급한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바삐 걸었다면
    이제는 숲도 나무도 눈여겨보고
    숲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귀담아 들어
    무수히 많은 발자국 아래
    힘없이 스러져 간 작은 미물들도
    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경숙·시인)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설렁설렁 걷는 길이 아니었다

    구룡치로 올라설 때까지
    무딘 발길이 땀에 젖어야 한다

    오만한 허리에겐
    길을 열지 않는 산길
    가파른 고개마다
    거친 숨 몰아쉬면서
    낮아지면서 간다

    숨어 핀 들국화를
    하얗게 만지며 걷는데
    쭉쭉 뻗은 솔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황금빛 들녘이
    눈부시게 풍요롭다

    구룡치 아득한 고지까지
    띄엄띄엄 서있는 묘비들
    수많은 계곡 저 어느 곳에
    이념의 혈흔이 숨겨져 있는지
    바람마저 고요하다

    내려서며 쉬어가는 길
    사무락다무락 사무락다무락
    소원을 비는 돌담에
    소망의 돌 하나 얹는다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명복
    말줄임표가 돌아오는 길
    가슴까지 이어진다


    (목필균·교사 시인, 1953-)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시인,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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