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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재 - 옛날 내륙지방과 남해바닷가 사람들이 생필품 물물교환을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로 제한이라는 마을이있었으며, 제한이라는 명칭이 지안재로 개칭되어 불리우게 되었으며, 내륙지방과 남해바닷가 사람들이 생필품 물물교환을 위해 하고자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지안재 풍광 조망.
24번 도로에서 1023번 도로로 들어오는 입구에 지안마을이 있어 지안재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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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춘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리산꾼이면 누구든 눈을 감고도 환히 그릴 수 있는 풍경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슬며시 들여다본 작가가 뛰어난 솜씨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하고 싶은 말, 우리가 쓰고 싶은 글은 이미 예전 사람들이 다해버려서 더 할 말도 더 쓸 글도 없어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다.
옥화 성기 계연 체장수 할머니 떠돌이 중 등 역마살(驛馬煞)이 낀 사람들과 그런 역마살이 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 떠돌이와 붙박이,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대물림인 듯 거부할 수 없는 역마살의 운명과 맺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인연, 떠나 보낼 수밖에 없는 사연. 우리 세대와 앞 세대에게는 슬픈 영화의 끝장면처럼 가슴 시린 사연으로 기억되고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설, 역마.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역마살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젊은 날의 방황과 질풍노도 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서도 어느 순간 문득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몸은 붙박혀 있지만 일탈을 꿈꾸고,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그리워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상상하고···. 노마드(nomad). 그건 아득한 원시시대 수렵인이나 유목민의 DNA가 아직도 우리의 피 속에 남아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현실의 제약 속에서 그나마 미친 듯이 지리산으로 달려가 샛길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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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驛馬)는 역과 역을 오가는 말이다. 왕조시대에 역(驛)은 조정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의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과 수령들의 교체 및 관리들의 공무 수행을 위해 말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즉 국가의 공적인 교통 및 통신기관이었고, 제도상으로는 전국토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우역(郵驛) 또는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역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는 증표가 마패(馬牌)였으며,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효(1~10마리)만큼 말을 차출할 수 있었다. 한양에 본가가 있는 어떤 양반이 용인현감으로 발령받아 역마를 이용하여 단신부임한다고 치자. 종6품인 현감에게는 승마(乘馬) 두 마리와 짐말 한 마리로 역마 3마리가 제공되는 식이다. 빨리 부임하고 싶다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달려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 청파역에서 마패를 제시하면 역졸(驛卒)이 말을 끌고 수행하여 양재역까지 이르는 데에 한나절이 걸린다. 말 탄 관원 기준이 아니라 도보로 걷는 역졸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청파역의 역마와 역졸은 인계 후 왔던 길로 돌아가고, 관원은 약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역시 한나절 만에 낙생역까지 가서 하룻밤을 묵는다(*주변의 院 이용 가능). 다음날 또 말을 갈아타고 용인에 도착하면 한나절이 소요된다.
역과 역은 30리를 기준으로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며, 원래 참(站)은 역내 또는 역과 역 사이에 휴식을 취하는 곳이나, 통틀어 역참이라 하였다. 역참과 역참 간의 거리를 ‘한참(一站)’이라 하며, 원래는 이런 거리 개념인데 바뀌어 지금은 시간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참’은 역에서 다음 역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리키므로 원래대로라면 서너시간 또는 한나절 동안을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물론 급한 공문서나 긴급사안은 하루에 6역(180리)을 돌파하거나 쌍마(雙馬)로 밤낮을 달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역마는 일을 마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인데 역마살이라니, 역마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멀리 떠나가는 것보다 엉덩이 붙일 새 없이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에 방점을 찍은 뜻일까. 그렇다면 옥화와 할머니는 역마처럼 떠돌다가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남정네들을 기다려 화개장터를 떠나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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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함양읍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된 루트는 지안재를 지나고 오도재를 넘는 길이다. 아시다시피 이 길은 오도재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지리산 주능선 풍경도 비할 바 없이 좋지만, 지안재의 아름다운 길도 덤으로 누릴 수 있다. 김종직(1472) 김일손(1489) 남주헌(1807)도 이 길을 경유하였다.
지안재는 제한치(蹄閑峙)에서 유래된 지명인데,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가파른 고갯길에 말발굽도 쉬어간다고 제한치가 아니라 고개 아래 지금의 조동마을에 옛 제한역(蹄閑驛)이 있었기 때문에 제한치이다. 즉 제한역에서 역로(驛路)는 지안재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곧장 팔랑치 너머 인월로 이어졌으므로 지안재에서 말발굽을 쉬어갈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말굽을 쉬어간 것은 맞지만 그건 제한치가 아니라 제한역이었으며, 제한치(지안재)는 단지 제한촌 뒤에 있다고 제한치인 것이다.
역명(驛名)은 당연히 역이 위치한 기존의 지명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곳은 거꾸로 역명에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공식기록상으로 제한역은 1438년(세종 20년) 처음 등장한다. “경상도 함양의 새 역은 ‘제한’이라 칭한다[慶尙道咸陽新驛稱蹄閑](조선왕조실록)” 그 전에는 확인되지 않는 지명이며, ‘말발굽[蹄]을 쉰다[閑]’는 것은 역(驛)과 관련된 지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서로 연결되는 인근의 사근역(沙斤驛)과 인월역(引月驛)은 기록상 고려 때부터 명확히 존재했으며, 제한역이 없으면 두 역간의 거리는 50~60리로 지나치게 멀다. 그러므로 제한역은 그전부터 ‘잠시 말발굽을 쉬어가는[蹄閑]’ 임시역의 기능을 수행하다가 세종 때에 정식 역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건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세종대 이전에 제한역을 읊은 이첨(李詹 1345~1405)의 詩로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상 제한역의 객사에 자고 간다는 얘기로 읽힌다.
雲峰坂道竝溪傍(운봉판도병계방) 운봉 가는 고갯길은 시내 곁으로 나 있는데
往跨征驢一嘯長(왕과정려일소장) 나귀 타고 가면서 긴 휘파람 분다
無賴西山高萬丈(무뢰서산고만장) 서쪽 산은 만 길이나 높다고 말하지 말라
客來投館未斜陽(객래투관미사양) 객이 여관에 들어도 해는 지지 않았네
역 주변에는 역참 관원들에게 딸린 식솔, 둔전(屯田) 경작, 물자공급 등을 위한 촌락이 형성되기 마련이며, 제한역의 경우 지금의 조동(지안)마을이 그곳일 것이다.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제한촌(蹄閑村)으로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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