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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암(대),서진암,백장암,지리산 이야기 2023. 12. 4. 11:26
# 언제: 2023년 12월 03일 토요일
# 산행지: 금강암(대),서진암,백장암, 겨울 맞이 서룡산&투구봉 조망 산행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2.77km 06시간08분
# 산행루트: 제일제당(서룡산주차장) - 수청봉 - 범바위 - 서룡산 - 투구봉 - 서룡산 -
금강암(대) - 서진암 - 백장암 - 제일제당(서룡산주차장)
삼정산 아래에 있는 실상사 소속으로 828년에 실상사와 같이 세워졌고 국보 삼층석탑과 보물 석등을 간직하고 있는 백장암,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역시 실상사의 산내 암자인 서진암(세진암), 청화스님이 기거하며 수도했던 금강암(금강대)을 일컬어 지리산(서룡산) 3암자라고 한다.
금강암(대)
금강암은 청화스님과 그의 상좌 성본스님이 수행한 토굴수행처였다.
현재는 수행자가 없어 폐사된 상태로 남아 있다. 금강대는 쓸쓸한 산 속의 토굴이다.
금강암(금강대)은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명당이다.
인적이 없는 지리산 높은 곳(해발1,000m)에서 푸른 산으로 벽과 울타리를 삼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벽소령이 왼쪽으로는 천왕봉이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온 누리가 장엄하다.금강대가 있는 범바윗골은‘사지목 절터’였다.
지금도 기와 조각과 담이 남아 있어이에 발심한 성본 스님이 큰스님(청화스님)을모셔와토굴에서 지내고자
오늘의 금강대를 지었다.
청화스님(1923~2003)은 염불선을 제창한 원로의원으로서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묵언(默言)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
청화스님의 수행과 일대기를 그린 TV방송도 있었다.
서진암,瑞眞庵
창건년대를 알수없으며 영험이 대단한 나한도량으로 비장대를 비롯한 다양한 전망이 빼어난 암자이다.
지리산 서진암은 나한 도량으로 16나한을 기리는 암자이다.
서진암(瑞眞庵)은 원래 세암(世庵) 또는 세진암(世眞庵, 洗塵庵)이라 했다
세진암(世眞庵, 洗塵庵)이란 '세속을 먼지를 씻어내'는 암자란 뜻이다.
이 서진암에 가면 지리산 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16 전망대가 있다.
지리산 서진암 산세와 지형 : 용궁(龍宮)지형
남원 산내면 서진암은 지리산과 덕유산의 거대한 산계가 만나 장대한 기(氣)가 소용돌이를 치는 지점이에 있다. 덕유산 산계에 3암자가 있고, 지리산 산계에는 7암자가 있다.
서진암은 건강하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다리를 왼쪽으로 하고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지닌 지형이다. 서진암은 커다란 암벽 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암벽에서 맑은 물이 나오고 있다. 서진암터는 용궁(龍宮)지형인 셈이다.
용궁은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니 정기와 지혜가 가득한 곳이다. 서진암은 사람으로 치면 천골〔薦骨: 선골(仙骨): 엉치뼈〕의 힘을 받고 있는 암자이다. 천(선)골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뼈로 정기와 지혜가 만들어 지는 곳이다. 천(선)골은 용궁(龍宮)의 핵심이다. 선골(仙骨 : 엉치뼈)은 정기와 지혜가 샘솟는 곳이니 서진암은 명당 중에 명당이다.
서진암을 찾은 어르신들이 말하길 서진암은 자식을 얻지 못했거나 아들을 얻기 원하는 부녀자들이 찾아가 불공을 들이던 유명한 기도터였다고 한다. 또 절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서진암에서 많은 고시 합격자가 나왔다고 한다.
백장암, 白丈庵
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선원으로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수청산(772m) 중턱에 자리잡은 백장암(百丈庵)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고요하지만, 구불구불 올라가며 바라보는 산 풍경이 다양하여 지루한 줄 모른다.
암자 입구에 돌과 흙을 섞어가며 쌓은 낮은 담장 안의 삼층석탑과 석등이 눈길을 잡아끄는데, 가을이면 낮은 담장 한쪽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노란 단풍잎을 흩뿌려 놓는다.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조그만 암자이지만, 경내 아래쪽 밭에 뚜렷이 남아 있는 옛 절터로 보아 규모가 상당히 컸으리라 짐작된다. 창건년대가 불분명하지만, 본절인 실상사의 창건과 역사를 같이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는 실상사의 모든 승려들이 이곳으로 피난와 화를 면하기도 했다고 한다.
삼층석탑과 석등이 한 단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랫단에 자그마한 석종형 부도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삼층석탑은 이형탑으로 탑 전체를 두른 장식조각들의 수법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장엄하고 섬세하며, 단출하지만 단아한 석등도 삼층석탑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석조물의 뛰어남보다 이들을 모아놓은 아늑한 공간이 더 정갈하다.
현재는 삼층석탑 위 터에 법당을 건립하고 좌우에 선원과 요사채를 세워 옛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있다. 운봉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함양 방면으로 가다가 인월을 벗어나면 곧바로 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오른쪽 1084번 지방도로를 따라 4.1㎞ 가면 길 왼쪽으로 백장암 표지판과 함께 백장암으로 가는 시멘트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약 1.1㎞ 가면 백장암에 닿는다.
승용차는 백장암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백장암 입구 한편에 주차해야 한다. 백장암 입구에는 토종닭 등을 파는 음식점이 있다. 숙식은 인월이나 가까운 산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남원에서 인월을 거쳐 백장암을 지나는 버스는 약 1시간 간격으로 있으며, 인월에서 백장암을 지나는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삼층석탑
전형적인 석탑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조성된 이형석탑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 없이 몸돌받침에서 시작하여 3층 지붕돌까지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각 부재마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이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어 눈부시다.지대석 위에 놓인 별석인 굄대 위에 1층 몸돌이 올려져 있으며, 굄대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아래쪽 사방에 난간을 양각한 것이 눈에 띈다.
1층 몸돌은 폭에 비해 높이가 높으며 2·3층 몸돌의 체감률은 크지 않다. 층층마다 몸돌 하단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을 조각하였고, 상단에는 목조건물의 각종 구조를 새겨놓았다. 1층 몸돌에는 우주와 탱주가 없으며, 초층의 한 면에는 문비형 좌우에는 보살상과 사천왕상이 1구씩, 나머지 세 면에는 갖가지 불구(佛具)를 든 보살상·사천왕상·동자상이 장식돼 있다. 2층 몸돌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 3층 몸돌에는 천인좌상 1인씩을 조각했다.1층 몸돌의 사천왕상과 동자상
몸돌 정면 좌측에 새겨진 상이다. 당당한 사천왕상 뒤로 불구를 들고 서 있는 동자상이 조각되어 있다.2층 몸돌의 주악천인상
2층 몸돌 사면에는 난간을 둘러 새기고 그 안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각 층 모두 처마가 직선이고 추녀의 반전이 경쾌하다. 낙수면은 얇고 평평하며, 지붕돌받침을 두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1·2층 지붕돌에는 층단식 지붕돌받침 대신에 앙련이 조각된 네모난 돌을 끼웠으며, 3층 지붕돌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개·보륜·수연 등이 찰주에 차례로 꽂혀 있는 온전한 모습이며, 1980년 2월 도굴꾼에 의해 파손된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5m의 작품으로 국보 제10호로 지정돼 있다.
● 석등
삼층석탑 바로 뒤에 서 있으며, 하대석과 간주석 그리고 상대석과 화사석, 지붕돌을 모두 갖춘 높이 2.5m의 석등이다. 장식조각이 앞에 있는 삼층석탑과 짝을 이루며, 솜씨가 정교하다.하대석은 팔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복련 연화대석으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돼 있으며, 연꽃 안에 다시 화사한 꽃잎 조각이 새겨져 있다.
연화대석의 위쪽에 간주석을 받치기 위해 원형으로 앙련을 두른 굄대를 놓았다. 간주석은 팔각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약간 짧은 감이 있다. 상대석은 앙련석으로 하대석과 대칭되어 있으나 하대석보다는 약간 축소되었다. 하대석을 장식한 연꽃처럼 연꽃 안에 또다시 꽃잎이 조각돼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앙련석 위에는 삼층석탑의 양식과 같은 수법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석등에 이렇듯 난간을 조성한 예는 없다. 난간에 조각된 동자상도 무척 독특하다.
팔각 화사석은 네 곳에 구멍이 뚫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팔각인 지붕돌 역시 조각 없이, 평평하고 얇은 낙수면을 갖추고 있다.
정상에 앙련으로 된 보주가 남아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석등이다. 보물 제40호로 지정돼 있다.
●청동 은입사 향로백장암삼층석탑,百丈庵三層石塔(국보10호) 및 백장암석등,百丈庵石燈(보물 제40호)
백장암삼층석탑,百丈庵三層石塔(국보10호)
전형적인 석탑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조성된 이형석탑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 없이 몸돌받침에서 시작하여 3층 지붕돌까지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각 부재마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이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어 눈부시다.
백장암석등,百丈庵石燈(보물 제40호)
삼층석탑 바로 뒤에 서 있으며, 하대석과 간주석 그리고 상대석과 화사석, 지붕돌을 모두 갖춘 높이 2.5m의 석등이다. 장식조각이 앞에 있는 삼층석탑과 짝을 이루며, 솜씨가 정교하다.
수청봉(백장봉) 해발769.9m
서룡산, 西龍山 해발1079.2m
남원 투구봉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는 범바위,선바위를 차례로 지나 수청산으로 이어지고 북동쪽으로는 함양 투구봉을 거쳐 삼봉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은 좁고 잡목 으로 둘러싸여 있고 조망은 없다.
투구봉 해발1,032.5m
주산은 삼봉산이다. 삼봉산에서 투구봉까지 남쪽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북쪽은 함양읍으로 이곳부터 남북으로는 남원시 인월면과 함양읍이 도계를 이루고 있다. 도계에는 해발 553m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172호인 팔령산성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고 서기 1380년 고려말 우왕6년 이성계장군이 황산벌 싸움의 전초지로 삼았고 무신반란 때는 반군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인월산업단지 주차장 아래 서룡산 주차장
구룡호텔 좌측 뒤로 난 임도급 길을 돌아
수청봉(백장봉)
범바위 밧줄
범바위
서룡산, 西龍山 해발1079.2m
남원 투구봉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는 범바위,선바위를 차례로 지나 수청산으로 이어지고 북동쪽으로는 함양 투구봉을 거쳐 삼봉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은 좁고 잡목 으로 둘러싸여 있고 조망은 없다.
투구봉 해발1,032.5m
주산은 삼봉산이다. 삼봉산에서 투구봉까지 남쪽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북쪽은 함양읍으로 이곳부터 남북으로는 남원시 인월면과 함양읍이 도계를 이루고 있다. 도계에는 해발 553m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172호인 팔령산성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고 서기 1380년 고려말 우왕6년 이성계장군이 황산벌 싸움의 전초지로 삼았고 무신반란 때는 반군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강암 해우소
금강암
금강대
높은 대에 고요히 앉으니 잠은 멀리가고,
외로운 등불만 적적하게 벽에 걸려 있네.
문밖에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뜰에 있네
高臺靜坐不成眠
寂寂孤燈壁裡懸
時有好風吹戶外
却聞松子落庭前
정관(靜觀) 선사의 게송(重上金剛臺)
금강대는 쓸쓸한 산 속의 토굴이다.
인적이 없는 지리산 높은 곳(해발 1,000m)에서 푸른 산으로 벽과 울타리를 삼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벽소령이 왼쪽으로는 천왕봉이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온 누리가 장엄하다.
흰 구름 속에 청산은 첩첩하고
푸른 산 속에 흰구름도 많아
날마다 구름과 산을 벗삼나니
이 몸이 편안하면 집 아닌 곳 없으련만
白雲雲裡靑山重
靑山山中白雲多
日與雲山長作作
安身無處不爲家)!
금강대가 있는 범바윗골은 ‘사지목 절터’였다.
지금도 기와 조각과 담이 남아 있어 이에 발심한 성본 스님이 큰스님(청화스님)을 모셔와 토굴에서 지내고자 오늘의 금강대를 지었다.
청화스님(1923~2003)은 염불선을 제창한 원로의원으로서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묵언(默言)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
<자료요약>
금강암
금강암은 청화스님과 그의 상좌 성본스님이 수행한 토굴수행처였다.
현재는 수행자가 없어 폐사된 상태로 남아 있다. 금강대는 쓸쓸한 산 속의 토굴이다.
금강암(금강대)은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명당이다.
인적이 없는 지리산 높은 곳(해발1,000m)에서 푸른 산으로 벽과 울타리를 삼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벽소령이 왼쪽으로는 천왕봉이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온 누리가 장엄하다.금강대가 있는 범바윗골은‘사지목 절터’였다.
지금도 기와 조각과 담이 남아 있어이에 발심한 성본 스님이 큰스님(청화스님)을모셔와토굴에서 지내고자
오늘의 금강대를 지었다.
청화스님(1923~2003)은 염불선을 제창한 원로의원으로서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묵언(默言)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
청화스님의 수행과 일대기를 그린 TV방송도 있었다.
서진암
서진암은 원래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2년(순조 22)에 불탄 후, 1827년에 성윤두타와 대영비구가 다시 세웠고,1917년에 운담기순이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세진암을 서진암으로 명칭 변경을 신청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며, 화재로 불탄 것을 1935년에 중수하였다.
현재 서진암에는 독특한 손모양을 한 불상과, 1516년(중종 11)에 만든 석조 나한상 외 4구의 나한상이 있으며 지금은 정인(正仁)스님이 머물고 계신다.
칠성각 현판에 무인사월팔일(戊寅 四月八日)이라 쓰여있지만 정확한 햇수는 알 수가 없고, 그 아래 서진암만세(瑞眞庵萬歲)만이 그 영욕을 말해주고 있다.
반야샘 석간수 - 물 맛이 끝내준다.
서진암 사거리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서룡산 남릉으로 서진암 갔다가 되돌아와 우리가 진행해야 할 길이고,직진의 사면길은 서진암 가는길이다.
돌탑
우측으로 난 길은 백장암옛길로 매동마을로 내려가는 길.
백장암 가능 길
예전 해우소(多佛留是 - W.C)
多佛留是,다불유시
사찰에서는 측간을 해우소(解憂所)라고 한다.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용변이 풀어야 할 근심거리가 틀림없고 특히 급할 때는 만사를 제쳐야 하지만, 단순한 배설 이상의 뜻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온갖 근심 걱정을 변을 내보내듯 털어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곳이 또한 해우소라는 말이다. 절에서는 해우소에서 주문을 외도록 권장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라고 한다. ‘다불유시(多佛留是)’ 영어의 화장실을 뜻하는 WC(더블유씨)의 한자 의성어(擬聲語)다. ‘많은 부처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인 ‘多佛留是’, 그 표현이 주는 해학과 낭만이 자못 그럴듯하지 않은가.
백장암 대웅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국보 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4면에는 난간을 섬세하게 양각하고 있다.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1층은 그 남면에 문비를 중심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른 3면에 보살상, 천왕상, 동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으로 통일신라 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돌)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 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겨놓았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했다.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했으며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보주 부분이 1989년에 도난 돼 공개수배중이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현재 이 자리에는 상륜부 보주 부분이 상실된 상태로 탑신부와 하단부가 남아 있다.
백장암(百丈庵)
처음 만나는 백장암(百丈庵)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로, 이곳의 백장선원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다.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뒤로 선방인 백장선원
백장암(百丈庵) 편액엔 임인년 가을에 조주승이 썼다는 '임인추조주승(壬寅秋趙周昇)'이라 쓰여있다.
임인년이면 1890년으로 벽하(碧下)가 36살이였던 셈.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1854-1903)은 조선 말기 서예가로 자는 장일(章日)이고, 호는 벽하(碧下)이며, 본관은 김제(金堤)이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일주문(一柱門)의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현액과 금강산 유점사(楡店寺)의 대웅전(大雄殿) 대액, 전주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성묘(關聖廟) 현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백장선원(百丈禪院)의 이름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 814)스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장선사는 청규를 통해 주지부터 행자까지 선원의 모든 대중이 울력에 동참하도록 한 보청법(普請法)을 제정한 장본인이다.
이곳은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입각해 대중이 함께 수행하고 울력하는 도량이다.
백장암 솔숲길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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