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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암(明庵) 정식(鄭拭)의 산청 무이구곡(武夷九曲) - 24년02월03일
    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4. 2. 5. 13:24

     

    명암(明庵) 정식(鄭拭)의 산청 무이구곡(武夷九曲)

     

    명암(明庵) 정식(鄭拭, 1683∼1746)이 경남 산청군 구곡산에 설정한 무이구곡의 입지, 시어(詩語), 건립 정사(精舍), 경물 제명(題名) 그리고 바위글씨(刻字) 등의 구곡경영 사례를 문헌 및 현장조사를 통해 밝힘으로서 주자의 무이산 무이구곡 유거강도(幽居講道) 행적에 대한 모방 등 추존(推尊)과 조선적 변용(變容)이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졌는지를 살피고자 한 것으로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수홍교(1곡)-옥녀봉-농월담-낙화담-대은병-광풍뢰-제월대-고루암-와룡폭(9곡) 등으로 최종 확인된 명암의 무이구곡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오롯이 조선에 모사(模寫)하고 실천한 대표적 사례이다.

     

    구곡 원림문화라는 큰 틀에서 명암의 무이구곡 경영은 주자 추존을 통한 도통계승(道統繼承) 의지로 충일하다. 구곡산의 또 다른 이름이 ‘무이(구곡)산’이고 구곡의 명칭이 ‘무이구곡’이며 구곡 경영의 거처가 4 - 5곡 사이에 존재했을 뿐 아니라 구곡 경영을 위한 정사의 당호(堂號) 또한 ‘무이정사’였다.

     

    또한 구곡 명칭과 차운시(次韻詩)의 내용 또한 주자의 그것과 흡사함은 명암이 주자 무이구곡을 산청 구곡산에 속속들이 모방하고자 한 명백한 근거이다. 하물며 명암 이전에 설정된 구곡이 구곡산에 있었으며 그 중 확인된 4개 구곡명 모두가 주자의 무이구곡 그것과 일치됨을 볼 때, 주자 추존의 동조행위(同調行動)가 명암 이전 이미 구곡산에 도래(渡來)하였으며 이는 구곡산 무이구곡의 전통과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제6곡의 광풍호와 제7곡 제월대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을 분화한 명칭으로 주자 시의 차용(借用)은 주자의 행적을 추존하는 조선 선비정신과 맞닿아 있고 이는 무이구곡의 조선적 변용이라 판단된다.

     

    한편 명암의 구곡을 재차 모방한 하범운(河範運, 1792~1858)의 「덕산구곡(德山九曲)」5곡은 ‘대은병’에서 ‘난가암’으로 변용되면서 바위에 새긴 바위글씨(刻字)가 유전(遺傳)되고 있다.

     

    요컨대 「덕산구곡시」 속에서는 주자에 대한 존모심(尊慕心)은 약화되는 반면 자당(自黨)의 상징적 인물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추존함으로써 당파적 결속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구곡산 무이구곡원림은 명암 사후 주자의 도통 계승공간에서 선현 추모공간으로 변용되었지만, 주자 무이구곡의 모방과 변용을 통해 조선 구곡원림문화의 스펙트럼을 넓힌 전형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명암 정식 선생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 무이정사지

     

    명암 정식(鄭木+式)은 1683년(숙종 9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명암(明庵)이며, 자는 경보(敬甫)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형(大亨)의 손자다. 일찍 벼슬길을 멀리하고 명산을 유람하니 무이산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친 조선조 마지막 선비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사환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1746년 타계한 명암은 사후 21년,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증직된 후 ‘명암 정식 선생 무이정사 유계’가 관장하는 무이정사(사당)에 배향되었으며, 유집으로는 <명암집>(明庵集) 6권이 있다.

     

    덕산사(내원사)입구 장당골을 가로지르는 반야교와 아래 명옹대 각자

     

    덕산사 동쪽를 에워싸고 흐르는 장당골을 건너는 반야교 아래에는 너른 반석에 새겨진 ’명옹대(明翁臺)‘ 각자(刻字)가 눈에 띈다. 명옹은 ‘명암 늙은이’라는 의미로 바로 명암정식(1683~1746)이 60세이던 1742년에 새긴 글이다. 명암은 청나라에 패한 명나라의 문화를 그리며 살았고, 주희의 ‘무이구곡’처럼 덕산 무이산(구곡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려 한 인물이다.

     

    관천대

    관천 허모 선생(1876-1944)은 지리산 아래 덕산에서 유학자로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지리산 덕산에는 세 분의 유학자가 살았다. 한 분은 남명 조식 선생으로 산천제 서원이 있고 또 한 분은 명암 정식 선생으로 무이정사와 무이구곡이 있으며 그리고 세 번째 분은 관천 허모 선생으로 관천대가 있다.

     

    제1곡 수홍교(垂虹橋)
    서신마을에 있는 관천대 바로 앞 다리가 수홍교 터다. 수홍교(垂虹橋)라면 ‘무지개다리’라고도 하는 홍예교를 말한다. 바로 옆 관천대와 덕천강이 어우러져 가히 제1곡이라 할 만하였을 것이다. 수홍교 각자는 명암 막내아들 상화의 글씨다.

     

    -허윤정시인 집 오른쪽 담벼락 아래  바위-

    -수홍교 각자 외 여기에 있을까-

     

    제2곡 옥녀봉(玉女峰)
    시천면 원리 산 19번지에 있으며, 수홍교 계곡을 따라 20분 올라가면 조그마한 아름다운 산이다. 옥녀봉 각자는 명암 선생의 막내아들이 썼다.

     

    제3곡 농월담(弄月潭)
    구곡사 입구에서 20m 아래쪽 농월담 각자가 있다.

     

    명암정식(明庵 鄭拭), 무이구곡(武夷九曲)

    옥녀봉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큰 반석 위에 연못처럼 형성된 아름다운 곳이다. 농월담에서 도솔암으로 향하여 계속 올라가면 도솔암교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 20m 못미처 도로 우측으로 드러누운 바위에 ‘명암 정식’ 각자가 있다. 이 각자는 명암의 막내아들 글씨다.

     

    제4곡 낙화담(落花潭)
    도솔암교 다리 아래로 들어가서 조금 올라가면 글자 그대로 소폭(小瀑)에서 물이 꽃잎처럼 떨어지며, 아담한 담(潭) 가운데 바위에 명암 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이 새긴 ‘낙화담’ 각자가 있다.

     

    제5곡 대은병(大隱屛)  넓은 청돌 바위

     

    제5곡 대은병(大隱屛)
    낙화담에서 10분 거리 ‘도솔암’ 아래 건너편 다섯 굽이 계곡, 넓은 청돌 바위에 명제를 바꾸어 ‘난가암’(爛柯巖)이란 세 글자가 가느다란 획도 망가지지 않은 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제4곡인 낙화담을 지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대은병’ 각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명암 선생이 ‘도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나열한 9곡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던 ‘난가암’(爛柯巖)이 나타난다.
    명암 선생이 주자의 ‘대은병’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5곡을 명명한 이후 ‘대은병’ 시를 지어놓고 보니 문장에 들어있던 난가처가 신선놀음하기 좋은 곳에 더욱 그럴듯하여 ‘난가암’ 각자를 남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각자는 가운데 아들 상문의 글씨다.

     

    제6곡 광풍뢰(光風瀨)
    제5곡 난가암을 지나고 나서 제6곡까지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다. 광풍뢰란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이란 뜻이다. 광풍뢰각자는 가운데 아들 상문의 글씨다.

     

    제7곡 제월대(霽月臺)
    광풍뢰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양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합해지는 합수부에 너른 반석이 있고, 도솔암에서 올라오는 반듯한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합수부 너른 반석이 제월대다.
    광풍뢰 다음 제7곡에 제월대가 나오는 것은 ‘광풍제월’ 혹은 ‘제월광풍’이 한 쌍으로 “광풍제월(光風霽月)(비 온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과도 같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제월대 각자는 명암 선생 큰아들 상협의 글씨다.

     

    제8곡 고루암(鼓樓巖)
    계곡 삼각 지점에서 10분 거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자연석이 고루암이다.
    등산로가 양쪽으로 갈라가는 제월대에서 구곡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좌측 등산로 계곡 쪽으로 각자를 찾을 수 있다. 제월대 각자는 큰아들 상협이 새겼다.

     

     

    제9곡 와룡폭(臥龍瀑)과 연화대(蓮花臺)
    고루암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용이 엎드려 서리고 누워있는 바위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이른다.
    용담의 높이는 10m로 마지막 제9곡다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와룡폭은 규모나 형상으로 지리산의 폭포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품폭포다.
    마치 하늘 중간에 떠 있는 듯 압도할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다. 와룡폭 위에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선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자연석의 대가 있는데 바로 연화대이다.
    와룡폭은 이 연화대가 있으므로 더욱 신비감을 자아낼 뿐 아니라, 와룡폭은 연화대에 올라 바라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다. 와룡폭 각자 명암 선생 큰아들이 썼다.

     

    연화대(蓮花臺)

     

    연화대(蓮花臺)상단

     

    무이정사지 명암 정식 선생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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