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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鷰谷寺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4. 2. 12. 17:05
위치;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 말사
백제 성왕 22년(544년) 인도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
풍수 지리를 보려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소용돌이 치며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연못을 메꾸어 법당을 짖고 제비燕자, 골谷자를 써서 연곡사라 하였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까지는 선종 사찰로 번성하였고,
도선국사, 현각선사, 진정국사, 영관선사, 소요대사, 등 휼륭하고 덕망 높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연곡사, 鷰谷寺
연곡사,鷰谷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다.
연곡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1993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구례 연곡사 지표조사 보고서>에 믿을 만한 내용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 재위) 때 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연곡사 말고도 화엄사, 대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연기조사는 <백지묵서 화엄경사경>(호암미술관 소장)을 총감독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물이나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眞靜國師가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종 때(1530)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례현에 연곡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때 몽땅 불타 폐허가 되고만다. <亂中雜錄>에 따르면 “1598년 4월 10일 왜적 400명이 하동, 악양을 거쳐 쌍계사, 칠불사, 연곡사에 들어와 살육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후 인조 5년(1627) 逍遙大師 太能(1562~1648)이 복구하였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서부도의 주인이다.
이 무렵 <석가여래 성도기>를 목판으로 찍어낸 것으로 보아 사세가 제법 확장되었던 듯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승려 大有와 승려 출신 술사 宋賀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중심으로 明火賊들과 연합하여 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그들은 지리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 10월 왕가의 神主木(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봉납하는 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주지는 밤나무 단지를 경영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로인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895년경에도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를 남벌하여 栗木封山之所로서의 역할을 못한 책임이 두려워 승려들이 절을 버리고 떠나 폐사가 되었다.
1906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담양 출신 의병장 高光洵이 1907년 8월 26일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벌였다. 얼마간 전공을 거두었으나 이해 10월 10일 일본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의병들은 연곡사 옆 피아골 계곡에서 전멸하고 연곡사는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한 불자가 암자를 지어 경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탔다. 1
960년대 후반에 작은 절이 들어섰고, 80년대 후반까지도 법당 한채와 농가 같은 요사채,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삼층석탑만 있었다.
1983년 대적광전이 준공되고, 85년에 요사채와 선방이 완성되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있다.
연곡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한 무대이다. 최참판댁 안주인 윤씨부인이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연곡사 주지 우관스님의 동생이며 동학군 장수인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사생아 김환을 낳는다.
연곡사 일주문
연곡사는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의 고승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 스님들이 승병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907년 항일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다시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전소되었고,
6.25 전쟁으로 또 다시
전소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험난한 역사를
고스란이 간직하고 있는
천년고찰 연곡사의 모습입니다.
천왕문
현재는 국보로 지정된, 동승탑, 북승탑,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동승탑비, 소요대사탑 등 석조물만이
유적으로 남아 전해오고 있습니다.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求禮 鷰谷寺 三層石塔)
문화지정 보물 제151호
건립시기 고대/남북국/통일신라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해 있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나 기단부가 2중이 아닌 3중 기단을 지니고 있다. 탑신부는 삼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하층 탱주가 1:1인 소형탑으로 9세기 후반 양식을 보여준다.
연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의병의 본거지로 병화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탑은 일주문을 지나 법당이 위치한 석축 하단부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석탑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문헌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3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1967년 1월 해체수리 후 복원되었다. 이때 상층기단 자연판석 위에서 높이 23.5㎝ 가량의 동조여래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적광전
1981년 종인스님이 대적광전을 짖고 비로자나 부처님과 일광, 월광 보살을 모시고 중흥불사를 이루었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求禮 鷰谷寺 東 僧塔碑)
건립시기 고려
문화재 지정 보물 제153호
보물 제153호. 높이 120㎝. 동부도 앞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귀부의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 구름무늬가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었으며, 그 윗면 주위로는 복판(覆瓣)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좌의 측면에 고부조로 구름무늬를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있는 귀두(龜頭)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은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성이 결여되어 신라시대의 귀부에 비하여 기량이 떨어진다. 거북의 등 문양 또한 신라시대와는 다르게 6각의 갑문(甲文)이 아니고 파상곡선(波狀曲線)으로 이루어진 새의 날개깃 모양[조익형(鳥羽形)무늬]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부 위에 얹혀져 있는 삼산형(三山形)의 이수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수와는 달리 운룡(雲龍)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고부조의 구름무늬만으로 조식되어 있으며, 그 정상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의 형태를 조각해 놓았다.
이와 같이 규모면에서는 보다 작고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이 부도비는 신라시대와는 다른 고려시대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주목된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국보 제53호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쪽 기슭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승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파손이나 결실된 부분이 없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탑 전체에 걸쳐 새겨진 부조상과 팔각당 건축의 표현은 정교하고 섬세하여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탑의 전면에 탑주(塔主)의 것으로 보이는 탑비(보물 제153호)가 남아 있으나 비신이 남아 있지 않고 이수의 제액에 명문이 없어 탑주를 추정할 수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도선국사(827∼898)의 탑이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이 탑은 북 승탑과 함께 2001년 표면의 보존처리가 실시되었고 이때 순서가 뒤바뀐 상륜부재를 현재와 같이 바로잡았다.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국보 제54호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북쪽 산 중턱에 위치한 고려초기의 승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상륜부의 일부가 파손 복원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부표현이 정교하다. 양식으로 보아 같은 경내에 있는 동 승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북 승탑은 탑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 있지 않아 누구의 탑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경내에 고려 초에 건립된 979년작 현각선사 탑비(보물, 1963년 지정)가 남아 있어 그의 탑일 가능성이 높다. 2001년 3월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후 복원되었다. 이때 전면(全面)에 부착되어있던 이끼를 제거하였고 결실된 부재의 보충과 뒤바뀐 상륜부재를 바로잡았다. 동 승탑과 양식적 유사성이 있으나 세부표현에 있어 뒤떨어져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구례 연곡사 사리탑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求禮 鷰谷 寺逍遙大師塔)
시대 조선
문화재지정 보물 제154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6m. 평면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으로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윗면에는 낮은 몰딩 (moulding)이 있어 하대석(下臺石)을 받고 있다. 8각으로 된 하대석도 높은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나 상단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린 조각이 있다.
윗면은 중앙에 몰딩이 있고, 그 주위로 홈이 패어 있다. 중대석은 편구형(扁球形)인데 그 상·하에 단판연화(單瓣蓮華)가 대칭으로 돋을새김된 특이한 양식이다. 상대석은 8각으로 단판 8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형받침이 있으며 윗면에는 높은 호형(弧形)의 굄이 있다.
탑신석(塔身石)도 8각으로 1면에는 문비형(門扉形)을 새겼고 다른 면에는 별개의 돌을 끼운 듯이 보일 정도로 아주 강한 돋을새김의 신장상(神將像)을 1구씩 배치하였는데 조각수법은 세련되지 못하다.
옥개석(屋蓋石) 역시 8각인데 추녀끝은 얇아졌으나 아주 넓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서까래가 모각되었고 윗면의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 면의 합각(合角)에는 8줄의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이 뚜렷하며 추녀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한 편으로 정상면에는 8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편구형의 복발(覆鉢)이 있는데 횡대(橫帶) 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이 승탑에는 탑신석 1면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 ‘順治六年庚寅(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명문이 있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1649)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승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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