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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연곡사 주변 폐암자 탐방지리 산행기 2024. 2. 12. 12:10
# 언제: 2024년 02월 11일 일요일
# 산행지: 피아골 연곡사 주변 폐암자 탐방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2.00km 07시간 37분
# 산행루트: 직전마을(산수식당민박) - 도투마리골(알바) - 서당골 - 삼일암터 - 도투마리골
금류동폭포 - 금류동암터 - 집터 - 오향대터 - 판정골 - 석축 - 양진암터
금강대터 - 거무내석굴 - 석광대터 - 윗거무내 - 북암재 - 골타랭이재
대형무덤군 - 법왕대터 - 금선대터 - 연곡사 - 서굴암 - 연곡사 주차장
반야토굴
피아골 연곡사 주변 폐암자 탐방
연곡사 연혁에 관한 옛문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만우(蔓宇) 정병헌(鄭秉憲)이 1924년에 쓴 ‘해동호남도 지리산 대화엄사사적’(海東湖南道 智異山 大華嚴寺事蹟) 말미에 ‘연곡사 사적’이 씌어 있으나, 연곡사의 부속 암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래서 연곡사의 부속 암자에 대한 자료는 ‘한국의 사지 전남 1’(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원. 2011년)과 정시한의 ‘산중일기(山中日記, 1686년)에 근거하여 목록을 확인하였다.
연곡사 부속암자 목록
암자명 산중일기 한국의 사지 비고 금강대(金剛臺) ● 오향대(五香臺) ● 금류동암(金流洞庵) ● ● 내동리예양대사지 삼일암(三日庵) ● 무착대(無着臺) ● 양진암(養眞庵) ● 길상대(吉祥臺) ● ● 내서리사지1
연곡사 사적기남암(南庵) ● 수월암(水月庵) ● 금선대(金仙臺) ● 법왕대(法王臺, 法王寺) ● ● 내동리법왕대사지 내동리바느점골사지 ● 내동리사당골사지 ● 북암(北庵) ● 내동리사지 내서리사지2 ● 내서리심방골사지1 ● 내서리심방골사지2 ● 외곡리대밭골사지 ● 서굴암(西窟庵) 현존
구례군사, 1987
구례 연곡사 지표조사 보고서, 1993용수암(龍水庵,龍樹庵) 경허집, 1943
동사열전. 1894년심우암(尋牛庵) 연곡사 사적기 동암(東庵) 청계집, 16세기 말 석광대 구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피아골 연곡사 주변 폐암자탐방 들머리
직전마을(산수식당민박)
초입 잘못들어 도투마리골 사면길 잘 보존된 경작지 석축
고로쇠 채취시기 인듯, ㅎㅎㅎ 한통 빌려 먹었다...ㅎㅎㅎ
삼일암터
삼일암의 축대,석축 가지런하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이 자주 들렀던 곳
삼일암 대(臺)
서당골 집터 및 경작지
촘촘한 대숲 우측으로 삼일암 터다.
도투마리골
도투마리골이란 지명
도투마리란 베를 짤 때 날실을 감는 틀을 말한다.
그 모양이 장구모양의 판대기로 가운데가 잘록하고 양쪽이 넓어 잘록이 부분에 날실을 감아놓는 기구이다.
그런 모양을 상상하며 이 계곡을 바라보면 도무지 그 의미를 알아 낼 방도가 없다.
어느 기록엔 불무장등 아래 도투마리골에 베틀마을이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기도 하지만 오기로 보인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지만 베틀은 고사하고 주재료인 모시나 삼, 면화를 심을만한 터도 없다.
물론 지명이라는 것이 지형의 형상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 필요에 의하여 작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속적인 명칭의 대부분은 민초들의 삶의 형태나 방편, 전설, 유명인의 거처, 풍수상지세, 심지어 그 산 속에 심어져있는 유실수나 괴목 등에서도 자연스레 이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도투마리란 관념이 아닌 형상을 가지고 있는 물건의 일종이어서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와 연관되어 만들어진 지명일 것이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지형도를 들여다보면서 번뜩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도투마리골을 잉태하는 정상부가 불무장등과 솔봉으로 두 봉우리를 씨줄로 연결하고 있고, 그 능선 잘록이(현 헬리포트가 있는 표고막터)에서 도투마리골이 날줄로 직전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비대칭이긴 하지만 내 눈엔 불무장등과 솔봉, 그리고 두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이 우연치고는 현실감이 너무 생생한 영락없는 도투마리 형상이었던 것이다.
(지리99 구름모자님 글 인용)
금류동폭포
금류폭포는 도투마리골을 대표하는 명소
금류동폭포 상단
금류동폭포 위 반석
금류동암 집터쪽 석축
금류동암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이 석달 가까운 시간을 머물렀다 한다.
금류동암 기와 파편
금류동암 집터
오향대에서 산굽이길을 돌아 만나게 되는 금류동암은 지형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연곡사골 순례길에서 만나는 단연 최고의 암자터다.
내려서서 개울 건너 만나게 되는 금류동암 입구에 있는 넓은 집터도 분명 금류동암 암자터의 일부일 것이다.
반반하고 넉넉한 집터가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곳 한쪽에 유명한 석조 화장실이 있는데 이것은 금류동암이 폐사되고 난 뒤 화전민이 살면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면 두 계곡이 만나는 합수점에 망루같이 올라선 곳에 엄청 넓은 석축이 촘촘하게 눈길을 끈다.
그 사이를 올라가면 양쪽 계곡이 훤히 보이는 암자터다.
지금은 나무가 울창하여 금류동암의 절묘함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운데 눈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보면 자연석 바위가 양쪽 합수골에 절벽을 이루며 솟아 있고 그 옆으로 정밀하고도 거대한 석축을 쌓아 만든 암자터 위에 자리했을 그림 같은 금류동암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되돌아 내려와 합수점을 향하여 내려오면 이렇게 깊은 산중에 어떻게 저런 석축이 숨어있을 것이라 믿을 수 있을까 계속 감탄하면서 내려서게 된다.
그리고 합수점에 다다르면 큰 규모의 금류폭포와 선계와도 같은 그림을 이루며 주변 지형과 어울리게 자리잡은 암자터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정시한>선생이 연곡사골 주변에 4개월 머무는 동안 유독 금류동암에서 3개월 가까이 머물렀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배낭을 잠시 벗어놓고 아래에 있는 용소와 금류폭포 위 반석에 올라가 두루 둘러보며 금류동암의 절묘한 암자터가 지닌 천혜의 멋과 인간이 만든 문화의 멋을 되짚어 보자.오향대 옆 계곡 층 폭포
오향대
대숲 안에 잘 닦여진 터가 오향대라 한다.
인적은 간데 없고 대숲의 소리만 고졸하다.오향대 석축
판정골
판정골 석축 지형
양진암 샘
양진암터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산중일기에 기록하기로 금강대위 120보 거리의 조망이 남다른 터라 하였고
수행중인 73세의 노승인 각담(覺湛)과 하루에도 수차례 토론을 하였다 한다.양진암터 도자기 파편
금강대터
금강대의 독담이 있는 곳 앞으로 보면 길게 뻗어 내린 엄청 큰 바위가 암자터의 귀퉁이를 받쳐주고 있다.
금강대에서 산아래를 바라보고 거무내굴에 갈 때는 이 바위의 좌측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는 우측으로 올라오면 경작지들이 몇층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명색이 금강대인 암자터의 위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금강대터 기와파편
폐암자 터 가운데 가장 훤하고 넓은 암자 터다.
아래로 돌계단이 이어져 옛날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선생이 걸은 길임을 반증한다.거무내바위
거대한 암벽을 둘러가면 거무내석굴(해발680m)이 나온다. 대단한 암벽 기도터이다.
구도자들의 수행처로 알려진 거무내석굴, 거대한 바위아래 석굴, 구들, 흔적도보인다.
석광대터
석광대터 석축
북암재
골타랭이재
골타랭재아래 경작지
당재마을 못가서 주변 대밭
대밭에서 조망되는 황장산 능선
당재마을 & 운해사
대형무덤군
법왕대터
법왕대 대(臺)
법왕대에서 내려와 뒤돌아본 법왕대 전경
법왕대터는 저 바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있다.법왕대터 숙제로 남았네...ㅎㅎㅎ
금선대터
시누대밭에 파묻혀 볼품이 없다.
금선대터
금선대 계곡 석축
금선대 계곡
연곡사, 鷰谷寺
연곡사,鷰谷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다.
연곡사의 연혁에 대해서는 1993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구례 연곡사 지표조사 보고서>에 믿을 만한 내용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 재위) 때 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연곡사 말고도 화엄사, 대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연기조사는 <백지묵서 화엄경사경>(호암미술관 소장)을 총감독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물이나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眞靜國師가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종 때(1530)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례현에 연곡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때 몽땅 불타 폐허가 되고만다. <亂中雜錄>에 따르면 “1598년 4월 10일 왜적 400명이 하동, 악양을 거쳐 쌍계사, 칠불사, 연곡사에 들어와 살육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후 인조 5년(1627) 逍遙大師 太能(1562~1648)이 복구하였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서부도의 주인이다.
이 무렵 <석가여래 성도기>를 목판으로 찍어낸 것으로 보아 사세가 제법 확장되었던 듯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승려 大有와 승려 출신 술사 宋賀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중심으로 明火賊들과 연합하여 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그들은 지리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 10월 왕가의 神主木(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봉납하는 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주지는 밤나무 단지를 경영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로인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895년경에도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를 남벌하여 栗木封山之所로서의 역할을 못한 책임이 두려워 승려들이 절을 버리고 떠나 폐사가 되었다.
1906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담양 출신 의병장 高光洵이 1907년 8월 26일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벌였다. 얼마간 전공을 거두었으나 이해 10월 10일 일본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의병들은 연곡사 옆 피아골 계곡에서 전멸하고 연곡사는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한 불자가 암자를 지어 경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탔다. 1
960년대 후반에 작은 절이 들어섰고, 80년대 후반까지도 법당 한채와 농가 같은 요사채,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삼층석탑만 있었다.
1983년 대적광전이 준공되고, 85년에 요사채와 선방이 완성되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있다.
연곡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한 무대이다. 최참판댁 안주인 윤씨부인이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연곡사 주지 우관스님의 동생이며 동학군 장수인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사생아 김환을 낳는다.
서굴암 석굴
서굴암 석굴 내부
서굴암
반야토굴
반야토굴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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