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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봉(상내봉), 점필재 구롱(아홉모롱)길, 방장문(方丈門), 옹암(甕巖)지리 산행기 2021. 11. 7. 13:37
# 언제: 2021년 11월 06일 토요일
# 산행지: 미타봉(상내봉), 점필재 구롱(아홉모롱)길, 방장문(方丈門), 옹암(甕巖), 지리 품속으로 . . . ㅎㅎㅎ
# 산행거리: 12.74Km 07시간 16분
# 산행루트: 송대마을(송대팬션) - 선녀굴골 - 선녀굴 - 미타봉(상내봉)사면길 - 미타봉(상내봉) - 점필재구롱(아홉모롱)길
방장문(方丈門) - 옹암(甕巖) - 석문 - 암자터 - 사면길 - 백송사(상내봉)능선 - 송대마을갈림길 - 송대마을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천왕봉로 가로변 쉼터에서 조망되는 천연와불성지(天然臥佛聖地) - 미타봉(상내봉)
용유담(龍遊潭)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송정리라는 마을에 속해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 곳에서 합류된다. 깨끗한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뢰소리같은 천지폭포의 쏟아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서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강 동편의 직강 가설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 하겠다. 여울에 높은 통방 앞에서 파닥이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경치와 풍광, 뱃놀이에 도취되어 다시 돌아갈 줄 모르게 하는 경승지이다. 또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방과 같이 패어진 수많은 바위들과 기암괴석들의 오목하고 볼록한 반석들은 절묘하여 일대 장관의 극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는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용유담가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엄천사로 갔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말이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바위다. 마적도사는 나귀가 죽어서 화를 못참고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무늬가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다하여 '가사어'라고 불리었다 한다.이 지리산 계곡에서만 사는 물고기이다. 또 이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 서북쪽에 달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곁에 저연이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이 못에서 그 가사어가 태어나서 가을이 되면 물을 따라 내려와서 용유담에 이르러 놀다가 봄이 되면 달궁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용유담 아래에서는 이 고기를 볼 수 없다고 한다.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그럼 옛사람들의 유산기에 나타난 용유담의 모습을 살펴보자. 무수히 많은 기록 중에서 가장 핍진하게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5개를 발췌하였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것을 기술하여 전할 뿐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취사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作이 아닐까? 作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①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흔적이 남아 있네(靈怪千年跡 蒼崖有裂痕)”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② 1611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1640년,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그 아래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에 너럭바위가 있고, 양쪽 벼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위에는 돌 구더이[石坎 석감], 돌 구멍[石竇석두], 돌 웅덩이[石坑석갱]이 있어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한다.」
④ 1724년,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의 유용유담기(遊龍游潭記)
「먼저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였다. 용유담은 지세가 깊고 그윽하였으며, 바위들이 모두 개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물길이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용당(龍堂)이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여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를 건너자니 아찔하고 벌벌 떨려서 건널 수가 없었다. 다리 옆의 바위들을 넘어서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언덕에 붙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타원형이기도 한 것이 패옥 같았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과 술통 같았다. 그 너머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졌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갈고 다듬은 듯 반질반질하여 그 형상이 지극히 괴이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지리산 북쪽에 펼쳐진 천석(泉石) 가운데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 나는 그 기세와 장관이 좋아 조우명(趙遇命)에게 바위의 남쪽 벽면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그 아래에 내가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石抉川駛龍怒神驚]”라는 여덟 글자를 적었다. 후에 석공을 시켜 새겨 넣도록 하였다.」
⑤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장유록(方丈遊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에 쌓여 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그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이름 붙이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로 하나의 물길이 열려 큰 돌구유에서 수만 갈래의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여울은 요란스럽게 쏟아져 요동쳤다. 아래에는 1만 이랑이나 되는 큰 못을 형성하였는데, 곧장 몇 리나 뻗어 있었다. 두 골짜기가 솟구쳐 있고 솔숲 그늘이 뒤덮여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 못을 따라 올라갔는데, 정신과 기운이 침침하여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 위 5가지 모두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에서 인용)
-퍼온글-
송대마을 입구에 있는 말귀바위
송대동(洞) - 송대마을 -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지점인 우론 벽송사능선이 길게 장막을 치고 좌론 솔봉능선이 감싸안고 위론 상내봉(와불산)이 솟아 청정 선녀골이 흘러내리는 전형적인 산골오지마을.
송대마을 깊어가는 가을 감나무
구 빨치산루트안내소 건물 - 함양군에서 오래전에 야심차게 설계(설치)건물이 이젠 이젠 흉물이 된듯하네요, 백무동에서 두지터가는길 벽송사 일대 그리고 이곳 곳곳에 설치되었던 안내판, 마네킹 등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선녀굴 골
낙엽을 읊다(落葉吟)
蕭蕭瑟瑟又齊齊(소소슬슬우제제) - 소슬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소리없이 떨어지니
埋山埋谷或沒溪(매산매곡혹몰계) - 산골짜기에도 쌓이고 시내물 위에도 떨어지누나
如鳥以飛還上下(여조이비환상하) - 새처럼 아래위를 훨훨 날다가는
隨風之自各東西(수풍지자각동서) - 바람결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綠其本色黃猶病(녹기본색황유병) - 본디 잎새야 푸르건만 누렇게 병들어
霜是仇緣雨更凄(상시구연우경처) - 푸른잎 시샘하는 서리 맞고 가을비에 더욱 애처럽구나
杜宇爾何情薄物(두우이하정박물)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다지도 정이 박약하여
一生何爲落花啼(일생화위낙화제) - 지는 꽃만 슬퍼하고 낙엽에는 안우느냐 !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선녀굴 골 가을
선녀굴 직전 마을터
[선녀굴]
동북부폐사지 7암자의 한곳이기도 하거니와, 정순덕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
정순덕(1933 ~ 2004)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 안쪽 오지인 내원마을 중에서도, 가장 깊은 두메산골 안내원마을 출신으로, 10대 후반의 나이에 시집을 간 불과 몇달 후 공교롭게도 곧바로 전쟁이 터지고 6.25 이전부터 좌익계열(단순한 부역자였다는 주장도...)이었던 남편(성석근)이 지리산으로 입산(입산 후 곧 사망)하자 남편을 위한 겨울옷을 챙겨(정순덕의 주장) 1951년 2월에 지리산에 들었다가 붙잡힌 1963년 11월 까지 13년 동안 지리산 일대를 공포속으로 몰아넣은 여빨치산 !!!
암울한 격동기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마지막 빨치산, 지리산 여장군 등으로 미화하거나 영웅시하는 경향마저 있는듯하지만 역사에 근거한 펙트마저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북한 엘리트출신으로 이곳에서 1962년 사살된 이은조(남), (정순덕은 무학으로 이은조에 의해 사상적으로 무장된듯)같은 산청군 출신인 이홍이(남)와 함께 지리산을 훝고 다니며 쌍계사 부근에서 무고한 젋은부부와 여덟살 아들포함 3명,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정씨형제 부부 4명 - 7명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극악무도한 장본인입니다.
생포되기 1년전인 1962년 2월 이곳에 은신하고 있다 마천지서 경찰들의 습격을 받고 리드격이었던 이은조는 총격에 사살되어 정순덕, 이홍이가 이곳에 암매장하였고 이듬해 11월 고향마을에 잠입해 있다 잠복중이던 경찰에 의해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정순덕은 대퇴부관통상(한쪽다리 절단)을 입고 생포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며 민간인 학살 등의 죄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3년간 복역하다 특사로 석방된 후 복지원 등을 전전하다 사망하였으며 생전 북송을 원했으나 이미 전향을 했고 남한출신이라는 점에서 정부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그녀가 추위와 배고픔 그 모진 지리산에서 13년간 품속에 항시 품었던 것은 언니와 여동생의 사진이었다는 사실이 측은지심... 너무 애잔하기 그지없지만....
불에 검게 그을린 석벽은 당시의 흔적인지, 박꾼들의 자취인지는 알수 없으나 모진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돌을 데워 달구어 깔거나 껴안고 자는 방식으로 연명한것은 분명함.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
마름없이 한겨울에도 얼지않는 선녀굴 석간수
함께한 산우님
선녀굴 흔적 함양군에서 설치했던 옛 빨치산 마네킹
선녀굴을 벗어나 미타봉(상내봉) 사면길 걷다보니 조그마한 석문
와불산 정상석 앞전까지 군공선생님 들께서 정상석 밀어 눞어버려, 눞어져 있었는데, 어느 산꾼님 들께서 힘들게 정상석세워 노았네, 중요한것은 지명이다 와불산(상내봉)정상 지명을 이제는 미타봉(상내봉)지명으로...
옛 정상석 자리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가기전, 옛 와불산 정상석
좌선대(坐禪臺)조망대, 소림선방, 들렸다 나오는 이슬님, 무화과님
소림선방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퍼온글-
소림선방 석굴 내부
좌선대(坐禪臺)에서 - 좌선대(조망대)에 서니 가을 만추 멋진조망이 기차게 펼쳐진다. 발아래 송대마을과 선녀굴골, 좌우로 나래를 펼친 벽송과 솔봉능선, 삼봉산과 법화산, 마천일대와 함양읍내가 깔끔하게 조망된다.
인생은 한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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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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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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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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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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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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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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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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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ㅤ살아있는 행복
인생을 너무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인생이 초라해집니다.인생은 그냥 길가에 풀 한포기가 나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살았네!’
한 번씩만 외쳐 보세요.
살았다는 느낌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마세요.
항상 현재에
살아야 합니다.
현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살아있다는것입니다.
불행한 이유들을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지 말고, 놓아버리고
살아있는 행복을 누리시면 좋겠습니다.-법륜스님-
후회(後悔)
다음에 가지.
다음에 하지.
다음에 만나지.
생각 없이 다음에
다음에만 연발 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까운 靑春
다 지나가 버렸다!
좌선대 옆 미타봉 직벽
미타봉 박터에서 이슬님 준비한 따뜻한 커피한잔
점필재 구롱(아홉모롱)길 갈림길에 서 있는 일강바위
점필재 구롱(아홉모롱)길 단풍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가는 길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답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지명을 이해하였는데, 오랫동안 유독 동부(洞府)와 구롱(九隴)을 풀지 못하였다. '천 번을 갈아야 비로소 거울이 밝아진다.(千磨鏡始明)'라는 퇴계 선생의 말씀대로 지난 10여 년 동안 아마도 수백 번 가까이 생각한 어휘일 것이다. 내가 아둔해서 글자만 알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곧바로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은 내 삶의 충전재이기도 하다. 점필재 길과 박여량 길에서 마지막 벽에 부딪혀 시간을 보낼 즈음, 뜻밖에 희연(喜緣)을 만나 상류암에서 초령 루트, 동부(洞府)와 구롱(九隴)을 함께 풀게 되었다.
김종직 선생은 1472년 4월 14일 고열암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날씨가 흐리자, 고열암 요주(寮主)(*)가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담부(擔夫, 짐꾼)를 일부 돌려보내고, 다음날 아침 고열암 중에게 시 한 수를 주고, 상 허리길로 (*)미타봉 옆 일강(一岡)을 넘어 사립재골의 동부(洞府)를 지나 아홉 모롱이[구롱(九隴)] 길을 돌고 돌아 천왕봉을 향해 유람에 나선다.
注 *요주(寮主) : 선사(禪寺)의 소임(所任). 요원(寮元)을 보좌(補佐ㆍ輔佐)하는 소임(所任)으로, 한 달ㆍ반 달ㆍ10일씩 교대함. (*)향로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에는 위치가 모호하지만, 강계형(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는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음(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쪽의 조산이 된다.) (*)미타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부처의 형상 아미타불에서 미타봉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함.
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求名逐利兩紛紛 :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일 둘 다 어지러우니
緇俗而今未易分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구나
須陟頭流最高頂 : 모름지기 두류산의 최고봉 천왕봉에 올라보게나
世間塵土不饒君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紛紛 : 어지럽다. 緇 : 검은옷치, 승복치, 승려, 중치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상 허리 길인 아홉 모랭이(구롱) 길로 가려면, 초입은 골로 몇 걸음 내려서서 사면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바위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르고,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강계형 양화대사수록, 고열암과 벽송사와 사립재 삼거리)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등달[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너덜길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를 지나 사립재골 상부인 동부(洞府)에 닿는다. 동부(洞府)는 사립재골 고원지대의 습지 주변을 말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생소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阝(阜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이 그 한계였던 것 같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혼합(混合)된 지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 길인 구롱(九隴) 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과 샘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이렇게 해서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명과 점필재 루트는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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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롱(아홉모롱)길 단풍
구롱(아홉모롱)길 산죽
구롱길의 작은 집터,
주변에는 물길도 있고, 축대의 흔적도 보인다.
집터에서...ㅎㅎㅎ
집터에서 방장문 방향으로 구롱길을 걷는다.
고도 차가 크지않고 등로도 부드러워 발맛이 좋다.
단풍나무, 참나무류 등 반음지형 수종이 주를 이룬 숲은 더 좋다.
해발 천이 넘는 고산 험지 속에 이런 호젓한 등로라니 ...
습지일대, 평평한 분지형 지형을 지날 때는 최고치에 이른다.
하지만, 기대했던 단풍이 없다.
아마 일주일 전에는 구롱길 단풍 만추 였을것이다.
쉬며 즐거운 시간
방장문(方丈門)
점필재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발견(200516)
지난 5월 16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의 취재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을 조사하던 중, 여덟 모롱이(팔롱, 八隴)의 석문(石門)에서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발견하였다. 이 석문(石門)은 송대와 벽송사 그리고 엄천과 오봉리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길목에 있다. 쉽게 설명하면 방장문(方丈門)은 지리 동북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자연 석문으로, 내지리와 외지리를 구분하는 경계(석전 사문에는 봉전령)이다. 이 길은 신라의 화랑 영랑이 3,000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영랑대에 올랐다는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에 가야인들이 이미 구축한 산길로 추정된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명과 성터가 주변에 산재해 있음을 깊이 있게 음미(吟味)해볼 필요가 있다.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은 고도 1,100m, 고저 차이 약 50m 내외,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도상거리로 약 4.75km 정도 이어지는데, 고저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구롱(九隴)에서 롱(隴)은 阝(좌부변, 언덕부 = 阜)와 龍(용용, 언덕롱)이 결합한 글자이다. 롱(隴)은 용처럼 구불구불한 모롱이 길을 의미한다. 롱(隴)은 모롱이 즉 경상도 사투리로 모랭이 또는 모래이로 이해하면 쉽다. 이 아홉 모롱이 길의 방장문(方丈門)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500년 전 가야인들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석문(石門)이요,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532년)한 후에는 화랑들이 영랑대로 오르는 선도(仙道)의 문이며,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사대부, 유생들이 방장산으로 들어가는 유람의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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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611년 유몽인의 기행시와 두류산록
明朝我向石門去 :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날 것이고/師在頭流雲水間 : 선사는 두류산 구름과 계곡 사이에 머물겠지요.
○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 掠은 중국 漢漢字典에 '輕輕擦過'로 되어 있는데, '가볍게 스쳐 지나가다'라는 뜻. 옹암을 가까이에서 보고 지나간 것으로 이해함. 여기에서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석문은 옹암 가까이 있는 석문으로 판단함.
나.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이재구 선생 譯)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則曰金剛門亦禪師之權辭以拈眡
☞ 권도용의 동선을 벽송사-어름터-두리의 폐사-집터-여섯 모롱이-일곱 모롱이-여덟모롱이-방장문-아홉모롱이(쑥밭재)-청이당으로 추정하면 방장문이 금강문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정하기는 어렵다.
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이재구 선생 譯)
드디어 차례로 서서 나아가 겨우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아래위의 석문을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 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 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 遂序立前進纔到缶項而喉渴無涎矣迤到扉峴訪友致祚則兒言少選當返而恐其失伴努力登途過上下石門門之兩傍皆石而中通一逕巖形上合而中虛可容十餘人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
☞ '아래위의 석문을 지났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 여인을 수용할 수 있다.' : 사립재에서 통천문 길을 확인함.(200530) 독바위 인근 석문으로 판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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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동부능선상에 있는 산청독바위(일명진주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독(甕)바위라하며, 문수사 위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하여,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 한다. 지리산에 독바위가 세곳이 있다.
산청(진주)독바위, 함양독바위, 하동독바위, 산청독바위는 상단부가 翼善冠(익선관, 임금이 평상복(곤룡포) 차림으로 (정사를 볼 때 쓰던 관)보인다. 이곳 산청 독바위 조망은 중봉이후 두류봉능선 조개골 저멀리 삼정산 삼봉산 윗새재마을 써리봉 자락으로 진주방향 삼천포 와룡산도 조망된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에 오른다.
남쪽으로 조개골과 비둘기봉,치밭목,써리봉,중봉,하봉이 보이고
서쪽으로 국골사거리에서 이어지는 동부능선과 두류봉,벽송능선이 조망된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삼봉산과 법화산, 왕산과 필봉이 근거리에 오똑하고,
동쪽으로는 새봉을 지나 밤머리재로 이어지는 동부능선과 웅석봉과 달뜨기능선이 멋지게 조망된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아래 조망바위의 노송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 태양문양
조개골과 동부능선, 그 뒤로 보이는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써리봉,중봉,하봉
중봉,하봉,국골사거리,청이당고개로 이어지는 하봉능선과 동부능선
조개골과 동부능선, 그 뒤로 보이는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에서 조망되는 새봉
벽송능선과 뒤로 보이는 법화산,삼봉산
중봉,하봉,국골사거리,청이당고개로 이어지는 하봉능선과 동부능선
진주독바위에서 여유를 갖다가 인근 북사면의 석문으로 향한다.
형제 또는 부부바위
석문.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반대사면,
새봉방향으로 조금 이동, 좌측사면으로 내려서서 석문에 든다.
규모있는 석문이다.
수직암벽위에 큰 바위가 다리처럼 걸쳐있으니 꽤 높이 있는 석문이 되었다.
석문을 앞뒤로 왔다갔다 살펴보고 상단으로 올라선다.
평평한 상단석은 다리의 상판과 다름없다. 이곳도 건너보고 ...
조망도 있다. 허골다리골과 벽송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좌측 반야봉에서부터 바래봉,덕두산, 삼신봉,법화산까지 서북방향의 조망이 그만이다.
석문을 잠시 돌아보고,
구롱길(사면길) 통과지점의 집터를 향해 아래로 내려선다.
솟을대문처럼 길쭉하며 높다란 석문이 인상적이다.
석문을 잠시 돌아보고,
구롱길(사면길) 통과지점의 집터를 향해 아래로 내려선다.
집터 아래 사면길 걷는다 걷다보면, 벽송사(상내봉)능선 길 들어선다, 능선길 약 800m 걷다보면 송대마을 갈림길 나온다.
송대마을로 하산 한다.
암자터 둘러보고
암자터 샘
집터아래 사면길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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