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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29) 상원사골 대궐터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2. 6. 6. 14:55
가을 지리산으로 ‘역사의 조각’을 찾아나서다
지리산 자락 함양 마천면 추성동에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하봉 아래 상원사골 깊은 곳에 대궐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험지에 웬 대궐터일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주변 지명들과 연계해볼 때 예사롭지 않은 곳임에는 틀림없다. 추성과 광점동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을 비롯해 ‘성안마을’과 군마훈련장으로 추정되는 ‘말달릴 평전’이 있고 나라 국자를 쓰는 ‘국골(國谷)’도 있다. 또한 식량창고가 있었다는 칠선골 초입의 ‘두지터’를 비롯해 석빙고 역할을 했다는 광점동 ‘어름터’ 등의 지명도 유래되고 있는데, 이는 체계를 갖춘 한 세력이 웅거한 흔적이며, 이곳이 한때 격동했던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윽한 가을향기 물씬 풍기는 만추의 계절, 탐방팀은 묻힌 역사의 한 조각, 전설의 대궐터를 찾아 나선다. 접근로는 추성을 기점으로 칠선계곡과 대륙폭포골을 통해 초암능선으로 올라선 후 능선을 내려서며 대궐터를 탐방하기로 한다.
울긋불긋 물든 초암능선의 단풍.
▲만추의 칠선골과 대륙폭포골
추성은 지리산 북사면 루트의 주요 거점이다. 천왕봉의 북쪽 관문이자 칠선계곡과 국골, 허공다리골이 합수되는 지점이고 초암, 창암, 두류봉, 벽송능선이 닿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방팀은 추성을 출발해 서늘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추색 가득한 칠선골로 들어선다. 노랑 빨강 고운 단풍이 서로 자태를 뽐내고 골에는 청류가 구비쳐 흐른다.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을 지나고 산행시간 1시간 40여분, ‘청춘홀’에 도착한다. 예전 지리산 산중에는 울창한 산림을 이용해 숯을 굽고 목기를 제작하는 곳이 많았다. 무거운 통나무를 운반할 수 없어 산속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반출했던 것이다. 숯가마의 흔적은 지금도 많이 발견되지만, 흔적이 남지 않는 목기막터는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이곳 청춘홀이 알려진 목기막터 중 하나이다. 계곡가 바위자락 위치한 청춘홀, 바로 앞의 맑은 계류와 반석, 단풍까지 어울리며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외부와 단절된 깊은 칠선골에 묻혀 목기를 제작하며 젊은 청춘을 덧없이 보냈다는 의미로 이 바위틈 석굴을 후세들은 청춘홀이라 부르고 있다.
대궐터의 기와 파편들.청춘홀을 돌아보고 칠선골 심처로 진입한다. 칠선골은 지리산 최고의 계곡답게 아침햇살에 비친 단풍은 더욱 화사하게 빛나고, 폭포와 푸른 담의 비경이 줄줄이 이어진다. 주변단풍과 어울려 더욱 격이 있어 보이는 칠선폭포를 지나고 산행시간 2시간 30분, 대륙폭포골 초입에 위치한 대륙폭포에 도착한다.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추색이 내려앉은 폭포가 운치를 더한다. 색깔이 마법이다. 단순히 주변 나뭇잎이 노랗게 옅어지고 붉게 변했을 뿐인데, 녹음 속의 폭포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는 대륙폭포이다. 잠시 폭포를 조망하고 대륙폭포 상단으로 올라선다.
대륙폭포골 초입, 오색 단풍 아래 청류가 흐르고, 깨끗한 반석이 있으니, 자석에 끌리듯 쉬어간다. 가을의 한복판, 지리산 심처에서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잠시 여유를 부려보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그대로 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적으로 대륙폭포골을 오른다. 가을 소요산행의 3요소, 청류와 암반 그리고 오색단풍이 조화를 이룬 대륙폭포골은 산객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 오를수록 가을색이 더 깊어지고 색상도 칠선골보다 더 곱다.▲단풍으로 화려한 초암능선
대륙폭포골을 30여분 오르면 계곡이 분기된다. 본류는 하봉헬기장 쪽으로 향하는 우골이지만 초암능선으로 붙기 위해 본류를 버리고 좌골로 접어든다. 좌골은 거칠고 가파르다. 좌골로 들어선 지 1시간쯤, 초암능선 중간으로 탈출할 수 있는 분기점에 이른다. 여기서 하봉 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벗어나 좌측 사면길을 따라 초암능선으로 향한다. 경사는 급하지만 거리는 짧다. 계곡에서 25분 만에 초암능선으로 탈출한다. 탈출지점은 해발 1430m부근의 능선안부이다. 이어 능선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파노라마 조망이 펼쳐진다. 하봉과 그 아래로 뻗어 내린 초암능선이 오롯이 조망되고, 좌우로 추색으로 물든 두류봉능선과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까지 지리산 심장부가 장쾌하게 조망된다.
대궐터 석축.발아래는 초암능선을 사이에 두고 대륙폭포골과 칠선골, 국골이 바라보인다. 통쾌함이 느껴지는 시원한 조망, 잠시 조망을 즐기다가 대궐터로 향한다. 조망봉을 내려서서 능선길을 잠시 이어가면 해발 1400m 부근에서 능선이 분기된다. 내림길 기준, 우측은 초암능선, 좌측은 ‘남대문호매기’를 거쳐 상원사골 초입부근으로 떨어지는 지능선이 Y자 형태로 벌어진다. 두 능선 사이로 상원사골이 흐르는데, 상원사골 최상류부에 대궐터가 위치하고 있다. 탐방팀은 좌측의 희미한 능선을 따라 20여분 내려서면 로프가 걸린 바위협곡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남대문호매기’다. 예전부터 그렇게 불려져 왔다.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성터를 중심으로 볼 때 이곳은 방어의 요충지다. 폭이 좁은 능선을 칼로 잘라낸 듯 움푹 파인 이곳이 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남쪽을 지키는 초소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한다. 성터 중심에서 볼 때 이곳은 동남방향이다. 당시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출입문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암능선 조망봉에서 바라본 하봉.▲수수께끼 같은 산중 대궐터
남대문호매기를 내려서서 우측 사면을 돌아 다시 능선 길을 잠시 따르면 멋진 조망바위가 나오는데 분기점이다. 이곳에서 능선을 계속 따르면 박회성터를 지나 칠선계곡의 상원사골 초입 부근으로 이어지고 대궐터 가는 길은 우측으로 사면을 타고 계곡 안부로 내려서야 한다. 온통 너덜지대다. 희미한 흔적을 더듬어 남대문호매기에서 25분가량 내려서니 허물어진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 허물어졌지만 중간중간 일부 석축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남아 있다. 폐허로 변한 석축을 안팎으로 살펴본다. 좌우의 초암능선과 남대문호매기 능선 사이를 거의 일직선으로 가로막아 석축을 쌓았다. 성벽 길이가 족히 100m는 되어 보인다. 자연히 성벽 안쪽은 바로 위에서 갈라진 두 능선 사이 안부로 정삼각형 형태다. 상원사골 최상류, 물길이 시작되는 능선 아래, 약간 완만한 지대이긴 하지만, 지리산중 심처, 험지에 성터라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특별한 상황과 절박함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식량 확보도 쉽지 않은 곳인데, 하긴 성이 은폐, 엄폐된 곳에 위치해 적절하게 외부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요새이기는 하다.
성터 주변을 살펴보고 150여m 아래로 내려서니 똑같은 형태의 허물어진 성벽이 하나 더 나타난다. 이 성벽 역시 상부와 마찬가지로 두 능선 사이를 가로질러 쌓은 모습이다. 아마도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 쌓은 듯하다. 주변 지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해발 1400m 부근에서 능선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능선 아래 안부, 해발 1250m 부근에 내성을 쌓고, 또 150여m 아래쪽 해발 1200m 부근에 똑같은 형태의 외성을 쌓은 모습이다.
대륙폭포.외성은 내성과 달리 석축이 다 무너지고 온전한 곳이 없다. 한쪽에는 조악한 무늬의 기와 파편들을 모아 둔 것도 보인다. 이런 오지에 기와까지 얹은 건축물이 있었고 이중의 성곽과 외곽초소까지 있는 성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미스터리한 곳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대궐터’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가야의 성터였을까. 인근의 왕산과 구형왕릉, 왕등재 등 가야의 흔적을 미루어 보면 이곳이 가야의 피난왕조 성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신라에 나라를 넘긴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쫓기다시피 도피해 이곳에 피난도성을 세우지 않았을까.
대궐터의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천수백년 전 우리 선조들의 유산이고, 애환 서린 역사의 흔적임은 틀림없다. 천수백년의 기운 서린 기와 한 조각 주워 경외심으로 바위 위에 고이 모셔놓고, 성안 사람들이 수없이 오르내렸을 초암능선을 걸어 하산한다.'지리 박물관(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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