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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金德齡[경수(景樹),충장(忠壯)]
    공 부 방 2023. 11. 20. 09:19

    김덕령,金德齡[경수(景樹),충장(忠壯)] & 호남인들의 전설 김덕령 의병장을 모신사당

     

     

    김덕령, 金德齡[경수(景樹), 충장(忠壯)]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 그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광주 사람들에게 '충장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때 광주의 명동으로 제일 번화가였던 '충장로'라는 이름이 김덕령 의병장의 시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충장사 안내도

     

    충장공 신도비

     

     

    충장사 내의 유물관

    익호(翼虎)의 억울한 죽음

    [민족정기 연구 17]

     

    임진왜란으로 김덕령은

    모친의 상중(喪中)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 전답 등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의병 5,000명을 모집했다

     

    1593년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 직함과

    충용장 군호를 받았다

     

    1594년에는 용맹한 실력에

    세자는 익호(翼虎) 장군

    선조는 초승 장군 군호를 내렸다

     

    곽재우와 함께

    권율 장군 밑에서

    영남 서부 지역을 방어

    거제도에서 선봉장으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596년 7월 권율 명으로

    이몽학 반란 토벌 출병을

    충청도 체찰사가 무고하여

    심한 고문에 옥사하였다

     

    국가관리를 태만한 조정은

    임진왜란 정보를 무시하여

    어이없이 침략당했으며,

     

    충신들을 국문 후

    김덕령은 옥사(1596) 시켰으며

    곽재우는 은거(1596) 시켰고

    이순신은 백의종군(1597) 시켰다

     

    영조 때 김덕령 억울함이 밝혀져

    병조판서의 벼슬을 받았고

    정조 때 좌찬성 벼슬이 더해졌다

     

    김덕령 생가 마을 충효동은

    임금이 마을 이름을 하사했다

    정려비각이 세워져 있는 이곳은

    ‘김덕령 왕버들나무’가 있다

     

    충장사에는

    김덕령 장군이

    29세에 옥사한

    의복이 보존돼 있다

     

    김덕령 장군의

    신용(神勇)과 용력(勇力)에 대한

    억울한 죽음으로

    수백 가지의 전설적 설화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 의병장의 친필과 관련 책자들도 전시

     

    1965년 이장 때 매장 당시 김덕령 장군이 입었던 수의 8점과 목관이 그대로 출토되었습니다.

     

    충장사의 외삼문인 충용문

     

    '익호문'은 충장사의 내삼문

    '익호'는 호랑이보다 빠르다는 의미로

    광해군이 김덕령 의병장에게 내린 군호다.

     

    충장사의 모습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위패

     

    충장공 김덕령 의병장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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