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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 산행지: 고운 최치원 선생이 화개동에 머물면서 신라 말
남긴 시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天)'
화개동 주변 지리산예길(서산대사길), 다리골, 호동골,
지리 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9.46km 06시간 26분
# 산행루트: 화개초교(왕성분교장) - 서산대사길 - 다리골 - 팔백고지 - 안사시 - 호동골 - 왕성분교장
壺中別天(호중별천)
호리병 속 별천지.
東國花開洞(동국화개동)
동방 나라 화개동은,
壺中別天地(호중별천지)
항아리 속 별천지라네.
仙人推玉枕(선인추옥침)
신선이 베게 밀치고 일어나니,
身世欻千年(신세훌천년)
欻 : 문득 훌.
이 몸과 세상이 문득 천년이 라네.
春來花滿地(춘래화만지)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秋去葉飛天(추래엽비천)
가을이 가니 낙엽이 하늘에 흩날리네.
至道離文字(지도리문자)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元來在目前(원래재목전)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 다네.
擬說林泉興(의설임천흥)
자연에 흥취 있다고 말들 하지만,
何人識此幾(하인식차기)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無心見月色(무심견월색)
무심히 달빛을 쳐다보며,
默然坐望歸(묵연좌망귀)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長風生萬壑(장풍생만학)
흩날리는 바람은 수많은 골짜기 에서 일어나니,
赤葉秋山空(적엽추산공)
붉은 잎이 가을 산과 하늘 이라네.
密首何勞舌(밀수하노설)
천지의 비밀을 말해 어찌 혀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江澄月影通(강징월영통)
강이 물을 버리니 달빛이 그림자 되어 내 마음과 통하네.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 詩 (857~?)
호동골, 호동마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김종직(金宗直 1431~1498)선생의 유산기에 ‘여러 골짜기가 모이는 곳이 신흥사 동네다’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옛 신흥사가 있던 마을로 삼신동의 중심마을이다.
마을을 둘러보면, 신흥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호동(虎洞)이라고 있는데 예부터 이마을에는 호랑이도 함께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농악을 칠때는 호랑이가 놀라지 않토록 징은 치지 않는다고 하며, 주민들은 범 호(虎)자를 글자 풀이를 해서 “범호동”이라 부른다.
다리골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건너편 화개천 지나 대성1교 있다.
팔백고지 해발 896.7m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산 103
삼신동(三神洞)각자
지리산에는 청학동 못지 않게 '삼신동(三神洞)'의 개념이 강하게 퍼져 있다. 삼신동과 청학동은 그 개념이 비슷하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정감록'은 '청학동에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고 썼다. 삼신동은 청학이 살고 있다는 것은 같지만, '살아서도 신선이 되어 영생한다'고 하였다. 청학동은 현실적인 집단의 이상향이요, 삼신동은 미학적인 개인의 이상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리산에 삼신동의 개념을 심은 것은 신라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다. 그가 화개동천에 '三神洞'(삼신동)이란 각자(刻字)를 남긴 것이다. 최치원은 지금의 신흥동 신흥교 바로 옆 큰 바위에 '삼신동'이란 글자를 새겨놓고, 불일폭포에서 푸른 학과 노닐면서 학연(鶴淵)에서 신선이 되어 지금까지 영생하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삼신동(三神洞) - 현재 삼신중 신흥과 의신은 마을로서 존재하나 영신은 터만 남기고 사라졌다.
『진양지』에, "삼신동은 천왕봉의 남쪽에 있다. 신흥사·의신사·영신사 세 절로 들어가는 길이 모두 이 골을 거치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요, 수각(水閣) 가에 삼신동이라는 세 글자의 석각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유몽인_유두류산록
1611년 4월 6일 을해일(양력 5월17일)
(전략)동네 이름이 삼신동(三神洞)인데,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알 수 있다.河東 凡旺里 푸조나무
최치원의 지팡이는 하늘을 찌를 듯 큰 나무로 솟아올랐다. 경상남도기념물인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가 그 나무다. 전설을 바탕으로 하면 높이 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6m의 이 나무의 나이는 1100년이 넘는다. 그러나 비슷한 기후의 다른 곳에서 자라는 여느 푸조나무와 견주면 아무리 높게 봐야 500년을 넘은 나무로 보기 어렵다.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을 믿기 어려운 것처럼 나무 나이 역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1993년 1월 8일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잎지는 넓은잎 큰키나무로으로 우리나라 남쪽지방에 자라는 수종이다.
이곳 한 그루의 푸조나무 노거목은 높이 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6.25m, 수관폭(樹冠幅)은 동서로 25.9m, 남북으로 29.2m에 이르는 거목이고, 나무의 나이는 약 5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관의 발달이 거창하고 우리나라 푸조나무 중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금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을 내어 자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며 나도 살아 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화개초교 왕성분교 옛 신흥사터
신흥사터 & 내은적암터(청허원)
푸조나무
신흥사지는 지리산 화개동천의 중심에 위치하여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신흥사는 풍수지리상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형국으로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남쪽에서 번창했던 사찰이었다. 서산대사는 ‘하늘이 숨겨둔 아름다운 곳, 신선의 땅’이라 극찬하였으며, 많은 선승들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에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숨어 든 선비 한유한(韓惟漢)으로부터 조선 시대 남명 조식(曺植)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이 절을 찾았다. 특히 서산대사가 남긴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1564년]와 조식의 「지리산 유람기」[1558년 4월 10~25일]를 통해 1560년대 번창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
조식은 「신응사에서 글을 읽다(讀書神凝寺)」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요초춘산녹만위(瑤草春山綠滿圍)[아름다운 풀 봄 산에 가득한데]
위련계옥좌래지(爲憐溪玉坐來遲)[시냇물 좋아 늦게까지 앉았다]
생세불능무세루(生世不能無世累)[세상 사는 데 번거로운 일 없지 않아]
수운환부수운귀(水雲還付水雲歸)[물과 구름을 물과 구름에 되돌려 보낸다]
●변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흥사지에서 발견된 철조여래좌상으로 보건대,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대에 따라 신흥사 혹은 신응사(神凝寺)라 불렸으며, 사세에 따라 신흥사 혹은 신흥암으로 불렸다. 1934년 절을 헐고 초등학교[화개공립보통학교 부설 왕성간이학교]를 지으면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절터는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와 하동군, 명원문화재단이 협력하여 관리하고 있다.
●위치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51-1번지에 위치한다. 국도 19호선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방향으로 십리벚꽃길로 접어들어 다시 칠불사 방향으로 지방도 1023호선을 따라 화개계곡으로 들어가면 칠불사와 의신마을 방향으로 갈라지는 신흥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의신마을 방향으로 200m정도 더 가면 푸조나무가 나오는데 이곳 일대가 신흥사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신흥사지가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적은 없다. 신흥사지의 암굴(岩窟)에서 철불[철조여래좌상]이 나왔는데, 높이 1.35m의 통일 신라 시대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또한 사지에서 발견된 대석불(大石佛) 1기를 1915년 창덕궁 비원으로 옮겨갔다고 하며, 1970년대 탑신에 2행의 세로로 ‘만력십년삼월일판 조계종사노한당입탑(萬曆十年三月日判 曹溪宗師盧閑堂立塔)’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노한당(盧閑堂) 부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석종형 부도 1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부도에는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한 도인이 신흥사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길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도인은 절을 흥하게 하는 비법이라며 절 양 끝에 부도를 세우라 권하였다. 주지가 이 말대로 하자 절이 얼마 뒤 망하게 되었다. 신흥사가 위치한 곳이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인데, 양 날개 되는 지점에 부도를 세워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기만 남은 석종형 부도도 사각형 지대석 곁에 누군가에 의해 쓰러뜨려져 있다. 하대석이 없어진 것을 보면 누군가가 사리기 등을 도굴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석은 가로, 세로가 각각 120㎝이고 석종의 높이는 210㎝이다. 부도가 쓰러져 있는 것은 이것이 마을 정기를 누른다며 마을사람들이 눕혀 놓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현황
현재 신흥사지에는 쌍계초등학교 왕성분교장이 들어서 있다. 학교 뒤편 대숲에 부도 1기가 있으며, 주변의 명원문화재단에서 관리하는 야생 차밭에서 기와장 등이 발견되어 폐사지임을 알 수 있다. 신흥사지 주변에는 고운 최치원(崔致遠)과 관계있는 유적인 ‘세이암(洗耳岩)’, ‘삼신동(三神洞)’이라고 쓰인 각자 바위가 있으며, 세속을 벗어나 입산할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랐다고 전해지는 푸조나무가 있다.
특히 푸조나무는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내에 있는 푸조나무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세이암 각자는 신흥사지 앞 계곡 너럭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삼신동 각자는 신흥마을 입구에서 칠불사로 향하는 길목 갈림길 좌측 바위에 새겨져 있다.
또한 신흥사지에는 서산대사가 청허당을 짓고 거처했다고 하는 내은적암지라고 하는 곳도 있다. 내은적암지는 신흥사지 서쪽으로 야생 차밭 위쪽에 위치하는데, 옛 흔적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신흥사와 그 일대 계곡을 살펴보면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다. 신흥마을을 휘어 감고 쌍계사 방향으로 화개계곡이 형성되어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물돌이 형국이다.유람록으로 본 신흥사 연혁
1558년 조식: 사문루에 앉아 시내를 구경하였다
1592~1597 임진왜란
1597~1598 정유재란
1616년 성여신: 불탄 수홍교(홍류교), 절앞 능파각 주춧돌
1618년 양경우: 각성과 사문루에 오름
조위한: 각성이 차를 가져옴, 법당도 화려한 단청
1651년 오두인: 섬돌만 있고 1624년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1720년 신명구: 절을 중수한지 20여년 정도밖에 안되었다. 절앞에 세진각이 있었다
1743년 정식: 신흥암이라고 한다
1752년 박래오: 극락전 구경한다
1799년 유문룡: 세진루에 올랐다
1807년 남주헌: 삼신산 신흥사 현판
1840년 노광무: 시내를 건너 신흥사 옛터를 구경하였다.
1879년 송병선: 신흥사옛터
1941년 양회갑: 신흥사옛터
각성이 신흥사에 있을때인 1561년경에 가장 번성했고 당시에 홍류교와 능파각을 지었다.
그로부터 30여년 뒤인 임란이후로 쇠락해지면서 1618년 이후에 폐사가 되었다가 17세기초 중건하였지만,
다시 19세기 초에 폐사가 되었고
지금은 그자리에 화개초교 왕성분교가 있다.신흥사의 이름없는 부도
범왕리 왕성초교 뒤편 대밭에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 홀로히 신흥사터 지킴이로 남아 있다. 방형 지대석,탑신과 연봉형 보주가 일체형이다. 탑신 하대를 한 줄 돌대로 구획하고 탑신에는 작례를 보지 모산 기하학 문양을 커튼처럼 선각으로 표시하였다. 탑신에는 불비형 패를 조성하고 주인공의 당호를 새겼지만 육안으로 구분이 힘들다.
세이암(洗耳岩)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857~?)은 번거로운 속세를 떠나 해인사에 은거했지만, 세상사로부터 귀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해인사에서의 은둔 생활을 접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화개천을 따라 걷던 그는 개울가의 너럭바위에 이르러 계곡 사이로 내다보이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를 은거지로 선택했다. 그러고는 온갖 지저분한 말들에 시달리며 더러워진 귀를 개울물에 깨끗이 씻어냈다.
따르던 시종들을 물리치며 그는 짚고 온 지팡이를 개울가에 꽂으며 “이 지팡이가 큰 나무로 자라나면 나도 살아 있는 것이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은 것으로 알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화개장터와 쌍계사 벚꽃길을 지나면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成佛)했다는 전설을 품은 칠불사(七佛寺) 오르는 길과, 대성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가 최치원이 세속과 이별례를 치른 곳이다.
그가 귀를 씻었다는 너럭바위를 사람들은 ‘세이암(洗耳岩)’이라고 불렀다.
세이암(洗耳岩)각자
세이암(洗耳岩)각자
기담
정류석(停留石)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을 정류석(停留石)으로 소개한 기록을 보았는데, 유람객들의 쉼터라는 의미는 맞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설명을 유보한다.
기담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의 석각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 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_한국학 중앙연구원>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
성자심지리 性者心之理 性은 마음의 주재자요
심자성지기 心者性之器 마음은 性의 도구이다秀堂 金敎潤, 高炳斗, 金彰坤
수당 김교윤, 고병두, 김창곤
김석곤 교유하던 수당 김교윤一經一緯有誰知 : 날줄이 하나이면 씨줄도 하나임을 누가 있어 알겠는가
雖由縱橫亦不知 :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네
疑惑人人莫深究 :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는 사람들아 깊이 연구하지 마소
相從織者自然知 : 베 짜는 이와 친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네
東樵又題 동초가 또 짓다.단천마을 입구에서 화개동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높은 절벽이 보인다.
계곡 횡단지점 조금 아래에 두류만묵?인지 頭流萬疊(두류만첩)?인지 알수없는 석각이 있다.
도솔산인 선생님은 김석곤님의 시어에 두류만첩이 나온단다
頭流萬疊 東樵金晳坤書 乙丑九月 : 만겹의 두류산(첩첩 산중 두류산) 동초김석곤서 을축(1925년)9월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
頭流萬疊(두류만첩)은 석각이 마모되어 마지막 글자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頭流萬墨(두류만묵)은 어휘가 생경스럽다. 화개면지의 설명(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두류산을 찾아오는 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이라는 의미인가. 개인적인 생각은 頭流萬疊(두류만첩)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과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시문에 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의 시어가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기담(妓潭)에서 영신봉이 보인다.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삼신동마을
지금은 모두 사라진
신흥사, 의신사, 영신사
신흥사와 의신사는
마을로 형성이 되었고
영신사는
큰세개골 상부 영신봉 아래
빈터만 남기고 사라졌다
신흥, 의신, 영신을 통칭
삼신이라 한다
삼신이란 지명은 여러곳에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삼신산 쌍계사
지리산 남부능선상 삼신봉 등
삼신은 고운선생과 관련이 있다
삼신동 각자도
고운선생의 글이라고는 한다
신흥삼거리에서
목통골 방향으로 조금오르면
좌측에 三神洞 각자바위가 있다三神洞 각자바위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친필
최치원(崔致遠)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지만, 857년(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자 승려 현준(賢俊[賢儁, 賢雋, 玄準])의 동생으로, 최인연(崔仁渷[崔彦撝]) · 최서원(崔棲遠(崔栖遠))과는 4촌 내지 6촌의 형제 사이였다. 최견일은 861년(경문왕 2)부터 시작되었던 곡사(鵠寺)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였고, 현준은 8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에 머무르며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佛事)를 맡았다. 최서원은 884년(헌강왕 10) 견당사(遣唐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하였고, 최인연은 한때 집사(執事) 시랑(侍郞)을 맡았다. 이들은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면서 유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신라에서 6두품 집안은 유학을 익히거나 불법을 받들어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였다. 신라 하대에도 6두품 출신은 유학이나 불교를 익히려 도당 유학하였다. 신라의 대표적인 6두품 집안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경문왕~효공왕 대에 파견된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다. 최치원의 입당 유학도 경문왕계 왕실과 관계하였던 집안 분위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그는 입당(入唐) 유학을 통해 왕실과 가까운 관직으로 진출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河東 凡旺里 푸조나무
고운 선생의 '호리병 속 별천지(壺中別天,호중별천)
東國花開洞。壺中別有天。(동국화개동 호중별유천)
仙人推玉枕。身世欹千年。(선인추옥침 신세훌천년)
春來花滿地。秋去葉飛天。(춘래화만지 추거엽비천)
至道離文字。元來在目前。(지도리문자 원래재목전)
擬說林泉興。何人識此機。(의설림천흥 하인식차기)
無心見月色。黙然坐忘歸。(무심견월색 묵묵좌망귀)
長風生萬壑。赤葉秋山空。(장풍생만학 적엽추산공)화개초교 왕성분교 옛 신흥사터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로 967
1934년 3월 31일 화개공립보통학교 왕성간이학교 설립
옛 신흥사 유물
신흥사의 이름없는 부도
세이암(洗耳岩)
최치원이 세속과 이별례를 치른 곳이다.
그가 귀를 씻었다는 너럭바위를 사람들은 ‘세이암(洗耳岩)’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옛길(서산대사길)
사자곡 초입
의자바위
일설에 의하면, 서산대사가 의신사의 범종을 훔쳐가는 왜놈들이 미워 돌의자로 변하게 했다한다.
사정(獅頂)
사정(獅頂)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 이라고 하였다 .
여기가 사자곡(獅子谷)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도에서 보면 더욱 확연하다. 의신 마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사지 고개', '사징이 고개', '사지넘이 고개'라고 부른다. 버스가 없던 시절 의신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화개장에 다녔다고 한다. 의신과 대성마을 아이들이 왕성초등학교를 다니는 등굣길이기도 하다. 왕성초등학교는 범왕리와 대성리에 한 글자씩 따서 학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고개 이름의 유래를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 사지(死地) 고개로 알고 있었다. 유몽인은 청류가 흐르는 기담으로 내려서면서 이 고개를 바라보고 의신사 승려의 설명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사정(獅頂)은 본래 '사자넘이 고개'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지넘이 고개'로 음이 전성(轉聲,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사투리에서 많이 나타난다. 후설(後舌) 모음(ㅏ)이 발음하기가 불편하여 전설(前舌) 모음(ㅣ)으로 변하는 음운 현상을 '전설모음화'라고 한다.
사정(獅頂)은 사자넘이 고개→사지넘이 고개(전설모음화)
기담(妓潭)은 글자 그대로 기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주연(酒筵)을 펼칠 수 있는 넓은 반석과 담(潭)이 갖춰진 곳이다. 소인 묵객들이 쉬어간 곳이니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이 초서로 쓴 7언절구 필획과 작자 미상의 석각이 있다. 초서로 쓴 칠언절구 필획 옆에는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사람의 본성은 마음의 이치요. 마음은 사람의 본성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문구와 '秀堂 金敎潤, 雲樵 高炳斗, 金彰坤'의 인명 석각이 있다. 인명 석각은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과 함께 유람을 왔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필자 석각이 있는 넓은 암반과 소(沼)를 기담(妓潭)으로 보고있다.
여기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소나무가 있는 절벽 아래 바위 암반 위에 초서로 쓴 두류만첩(頭流萬畳) 석각이 있다. 맨 마지막 글자가 마모가 되어 판독이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두류만묵(頭流萬墨)으로 읽고 있다. 혹시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최문창찬(崔文昌贊, 4言 12聯)의 9聯에서 '倻山千丈 : 천 길 높은 가야산에 들어가고/頭流萬疊 : 만 겹 깊숙한 두류산에 의탁했네.'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은 아닌지. 지리산을 유람한 유호인의 뇌계집(㵢谿集) 七言律詩 ‘등구사탄이당(登龜寺坦夷堂)’에 '好在頭流萬疊山(좋은 경치 두류만첩산에 있어)'라는 시구가 있다. 두류만묵(頭流萬墨)이 맞는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화개면지에 “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라는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류석(停留石)
옛길과 우횟길이 만나는곳에 넓은 반석있다. 정류석은 지금의 정류장과 같이 신흥과 의신을 경유하던 사람들이 한 숨 쉬어가며 여정의 고단함과 시름을 달래는 명소이었다고 한다.
각자 - 1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
성자심지리 性者心之理 性은 마음의 주재자요
심자성지기 心者性之器 마음은 性의 도구이다각자 - 2
秀堂 金敎潤, 高炳斗, 金彰坤
수당 김교윤, 고병두, 김창곤
김석곤 교유하던 수당 김교윤이 보인다각자 - 3
一經一緯有誰知 : 날줄이 하나이면 씨줄도 하나임을 누가 있어 알겠는가
雖由縱橫亦不知 :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네
疑惑人人莫深究 :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는 사람들아 깊이 연구하지 마소
相從織者自然知 : 베 짜는 이와 친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네
東樵又題 동초가 또 짓다.기담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을 정류석(停留石)으로 소개한 기록을 보았는데, 유람객들의 쉼터라는 의미는 맞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설명을 유보한다.
기담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의 석각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 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_한국학 중앙연구원>
단천 입구에서 화개동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높은 절벽이 보인다.
계곡 횡단지점 조금 아래에 두류만묵?인지 頭流萬疊(두류만첩)?인지 알수없는 석각이 있다.
도솔산인 선생님은 김석곤님의 시어에 두류만첩이 나온단다.
頭流萬疊 東樵金晳坤書 乙丑九月 : 만겹의 두류산(첩첩 산중 두류산) 동초김석곤서 을축(1925년)9월지리산옛길(서산대사길)
다리골 초입
다리골 숯가마터
다리골 분위기
팔백고지 해발 896.7m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산 103
안사시 토굴 터
안사시 토굴 붙타기 전 모습.
빌려온 사진
안사시 토굴 누군가의 방화로 소실 되었다고 한다
서상원 토굴
서상원 토굴에서 조망되는 삼신봉
호동골
호동마을에서 본 지네능선과 신흥삼거리
명원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