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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은산막(素隱山幕),소은암
    지리 산행기 2026. 3. 30. 19:52

    # 언제: 2026년 03월 29일 일요일

    # 산행지: 은둔자의 집 소은산막,素隱山幕(소은암)을 간다...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시간: 14.8Km   05시간 08분

    # 산행루트: 쌍계사 - 국사암 - 불일평전(봉명산장) - 불일폭포 - 불일암 - 청학봉 - 대은암터

                   활인령 - 소은산막(소은암) - 내원골 - 수행촌 - 묵자바위 - 불출암터 - 쌍계사

     

     

    걸어 왓더니 길이 되었다

    걸어나가면 또 길이 되리라

    삶의 길에는

    가시밭이기도 했고

    돌길도 있고

    더러 꽃향기도 있다

    여기까지 왔의니

    남은 길

    쉬엄 쉬엄 갈 뿐

     

    -꺼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보물 제 2232 호" 조계종 제 13교구 본사인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일주문

     

    금강문<金剛門>을 통과하면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청정도량이 된다고 하며 "금강역사" 

     

    천왕문<天王門>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법을 지키는 네명의 수호신이자 호법이 지키는 문

     

    쌍계사 구층석탑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 9층 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8각은 불교의 실천 수행에 기본이 되는 8정도를 상징한다고 한다이 탑 안에는 고산스님(1933 ~ )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3과와 이웃한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2과 등 5과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쌍계사(해발140m)

    쌍계사,雙磎寺 & 옥천사(玉泉寺)

    쌍계(雙溪)사, 723년(성덕왕 23)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했으며 정강왕(재위 886∼887년)때 옥천사에서 쌍계사로이름을 바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쌍계총림

    총림은 범어로 ‘Vindhyavana’라고 표기하고 ‘빈타파나(貧墮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합니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處住)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총림(叢林)이라 합니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참선 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 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염불원(念佛院)을 모두 갖춘 종합수행도량을 말합니다.

    쌍계총림은 쌍계사의 ‘쌍계’를 따서 쌍계총림이라 합니다

     

    개산조사

    삼법(三法)과 대비화상(大悲和尙)

    쌍계사는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정상(頂相), 즉 두상을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그 시초입니다.


    삼법화상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있으며, 이를 정리하여 생애와 쌍계사 개산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國) 미륵사(彌勒寺)의 주창(主晶)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육조혜능조사의 설법집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던 중에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 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김유신(⾦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비구니에게 2만 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율사(栢栗寺)의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혜능조사의 정상頂相(두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 눈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덮힌 지리산을 헤매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움막 속에서 선정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에 목욕하고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염송하다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하였다.”

    이와 같이 쌍계사의 개산은 삼법과 대비화상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창건조사

    진감혜소대선사(眞鑑慧昭⼤禪師)

    국보47호인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전주 금마(현 익산) 사람으로 774(혜공왕 10)년에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元)으로 재가신도이면서 출가한 스님과 같이 수행했습니다. 어머니 고씨(顧⽒)가 어느 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인도 승려가 찾아와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는 유리항아리를 주고 갔으며, 그 후 진감선사혜소를 잉태하여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진감선사 혜소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의 벌족(閥族)이었는데 수·당의 고구려 원정 때 종군하여 고구려에 왔다가 금마사람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이 안승을 따라 금마에 많이 정착하게 되어 신라 골품제 사회 속에 재편성되는데, 이때 고구려 유민임을 숨기고 요동정벌군의 당나라 사람으로 자처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으며 7~8세가 되어 아이들과 놀 때에는 언제나 나뭇잎을 태워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는가 하면, 때로는 서쪽을 향해 꿇어앉아 해가 저물어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으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생선장수를 하며 가족을 봉양하는데 힘썼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길러 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31세 되던 804(애장왕 5)년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중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육조혜능조사의 법손인 창주(滄洲)의 신감대사(神鑑⼤師)를 만나게 되었는데, “반갑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하면서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37세(810)에 숭산(崇⼭) 소림사(少林寺) 유리계단(瑠璃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어머니가 꾼 꿈과 일치하였습니다. 계를 받고 나서 경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스승을 능가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온 도의선사(道義禪師, 후에 가지산문의 제1조)를 알게 되었으며, 821년 도의선사가 귀국한 뒤에도 진감혜소선사는 종남산(終南⼭) 높은 봉우리에 들어가 소나무 열매를 먹으며 3년간 정혜를 닦았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자객(紫閣)으로 나와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다가 57세(830)에 드디어 귀국하니 흥덕왕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상주 로악산(露岳⼭) 장백사(지금의 남장사)에 주석하게 되자 찾아오는 이가 구름과 같아서, 좋은 경계를 찾아 남령의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습니다. 지리산(현 국사암)에 머물며 선(禪)을 전파하면서 넓은 가람(절)터를 찾던 중, 어느 날 호랑이 몇 마리가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앞길을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곳으로 가니, 이곳이 바로 화개곡(花開⾕)의 옛날 삼법화상이 남긴 절터였습니다.


    이 터에 육조영당을 짓고 대나무통으로 물을 끌어와 집둘레 사방에 물을 대어 ‘옥천사(⽟泉寺)’라 명명하니. 곧 쌍계사의 창건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65세(838)에 민애왕이 왕의 자리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였는데, 스님을 친견하기를 수차 청하였으나 스님은 “부지런히 선정에 힘쓰는 것이 본분”이라며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선사께서는 육조혜능조사의 영당을 세우고 채색·단청하여 널리 중생제도에 이바지하였으며, 고운 최치원선생은 “혜원공(慧遠公)의 노산(廬⼭) 동림사(東林寺) 경치(호리병속의별천지)를 신라에 옮겨 왔다”고 찬탄하였습니다. 850(문성왕 12)년 정월 9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만법이 모두 공하니 내가 장차 가려 한다. 일심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만들어 유체를 보존하지 말고 명(銘)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도 말라”는 말을 마치고 앉아서 입적했습니다.

     

    진감선사에 의해 비로소 쌍계사가 처음으로 가람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옥천사(⽟泉寺)라 불렀습니다. 헌강왕이 즉위하여 보니 이웃 고을에도 같은 이름의 옥천사가 있으므로 백성들이 미혹할까 염려하다가, 그 절터를 살펴보니 동구에 두 시냇물이 마주 대하고 있으므로 ‘쌍계사(雙磎寺)’라는 제액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옥천사는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선사는 신라에 육조 남종선을 최초로 전파하였으며 불교의식인 범패를 가르침으로 불교의식을 완성했고, 차나무를 화개곡(동) 일대에 번식시켜 이것이 다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중창조사(重創祖師)

     

    쌍계사에 관한 고려와 조선 전기의 자세한 문헌자료는 없으나 1446년 선비대사의 팔상전 중수, 1506년 진주목사 한사개(韓⼠价)의 중수, 1549년 서산대사의 중수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사격(寺格)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는 사료들을 토대로 쌍계사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549년 청허휴정(淸虛休靜)스님이 쓴 「지리산 쌍계사 중창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549(중종 35)년에 세월이 오래되어 탱자가지가 숲을 이루고 비석이 초인들에 의해 박락(剝落)되어 있는 것을 보고, 중섬(仲暹)스님이 조정에 나아가 비석이 지극한 보배임을 알리고 조처를 취해줄 것을 간(諫)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조에서는 반경 5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에서는 나무를 치거나 불을 놓는 것을 금하였는데, 3년이 지나지 않아 주변 풍광이 예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에 팔영루(⼋詠樓) 5칸의 지붕을 다시 이고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 앞 뒤에 석대를 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1543(중종 38)년 여름에 운수승(雲⽔僧) 전수(專修)가 중창할 뜻을 세우고 시주를 모집 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대웅전을 세우고 차례로 금당과 방장을 지어 낙성을 하게 됐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으로 쌍계사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외의 기록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로서, 청학루와 성보전에 보관된 현판류와 개인 문집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자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57년 침명한성(枕溟罕醒, 1801~1876)이 쓴 「영남하동 쌍계사 사적기문」현판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덕화(德化)스님을 화주로 하여 벽암당(碧巖堂) 각성(覺性)스님과 소요당(逍遙堂) 태능(太能)스님 등이 옛 터가 협소하므로 지금의 자리에다 별도로 중창했다고 합니다. 이때 응진당·명왕전·관음전을 비롯하여 화엄전·팔영루와 여러 요사를 건립하여 뜰 가운데 현재의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를 두게 됐습니다. 그 뒤 1675(숙종1)년에 인계(印戒)스님이, 1695(숙종21)년에 백암당(栢庵堂) 성총(性聰)스님이, 1735(영조11)년에 법훈(法訓)스님이 중수 하였으며, 1864(고종 1)년 봄에 담월(潭⽉), 용담(⿓潭)스님께서 금당 안에 육조정상칠층보탑을 건립했습니다. 1975년 후에는 고산(杲⼭)대선사에 의해 현재 모든 전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보물 제 500호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인 "대웅전" 大雄殿

     

    국사암(國師庵)

     

    국사암(國師庵)

     

    통일신라 723(성덕왕 22)년에 운암사(雲巖寺)의 삼법화상이 터의 지기가 뛰어나므로 육조의 정상을 봉안하고 당우를 지은 것이 암자의 시초입니다.

     

    그 후 110년이 지나서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창건했습니다. 국사암이라는 사명(寺名)도 진감국사와 관련이 깊은데, 신라 민애왕이 진감선사를 스승으로 봉하여 진감국사라 칭함으로 인해 국사암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또한 상주 장백사(현 남장사)에서 지리산으로 온 진감선사가 삼법화상의 난야터에 당우를 세운 것이 국사암으로, 오히려 본사인 쌍계사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상은 여러 이설이 있음) 또한 암자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천이백년이 넘은 느티나무(사천왕수四天王樹 경상남도 보호수)가 있어 이를 증명하는 듯합니다.

     

    1894년에 작성된 ‘지리산 국사암기(智異山 國師菴記)’에 따르면, 1711(숙종 37)년에 의삼(義森)스님이 홍운(弘運) · 연민(衍敏) 두 스님과 함께 1714년까지 전각을 짓고 푸른 기와를 얹어 4존상을 봉안 · 장엄했습니다.

    뒤를 이어 용담(龍潭) · 하산(何山) · 용은(龍隱)스님 등이 차례로 중창 · 중수를 거듭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문수전文殊殿 · 인법당人法堂 ·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는데, 인법당 · 문수전 · 산신각 · 대문 등은 1980년경에 고산스님이 모두 새롭게 중건한 것입니다.

    문수전에는 최근 들어 목조로 조성한 문수 · 보현보살과 동으로 조성한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하여, 문수 · 보현보살탱 및 신중탱 등이 있습니다.

    인법당은 ‘ㄷ’ 자형 구조로 되어 있고 여러 전각의 현판이 있는데, 편액에는 국사암 · 명부전 · 칠성각 · 옹호문 · 염화실 등이 있어 예전 암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주불로 모신 목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입니다.

     

    국사암의 탱화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81(정조 5)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과 제석천룡탱은 통정(通政) 성찰(晟察)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취일(取一)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입니다.
    전자는 금어 함식(咸湜)스님이 그린 것으로, 함식스님은 이외에도 같은 해에 그린 쌍계사 삼세후불탱 3축과 삼장탱 조성에도 동참했습니다.
    후자는 화기에 ‘제석천룡합위帝釋天龍合位’라 기록되어 있어 제석천룡탱임을 알 수 있는데, 금어 평삼(評三)스님과 찰삼(察森) · 극찬(極讚) · 출정(出定) · 계탁(戒卓) 스님 등이 조성했습니다.
    평삼스님은 쌍계사 삼세탱 가운데 아미타탱과 석가모니탱에는 편수로 참여했고, 약사탱에는 화주로 참여했으며, 삼장탱은 화주 겸 편수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1897년에 조성된 칠성탱의 화기를 보면 본암질로 24명의 스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많은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도 정진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천왕수(四天王樹)

     

    사천왕수(四天王樹느릅나무

     

    환학대(換鶴臺)

    고운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학을 타고 가야산 홍류동으로 날아가곤 했다니 분명 신선이다.

     

    환학대 각자

    환학대는 불일암 일대에 살던 최치원이 청학동에 산다는 청학을 불러들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청학동 일대의 최치원과 관련한 유적 중 하나이다.

     

    오암(㹳巖) : 원숭이 바위

     

    洪淵(홍연), 李彦憬(이언경) 乙卯(1555년 명종 10년)

     

    洪淵(생몰년 미상) : 조선 명종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원(德源).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李彦憬(생몰년 미상) : 조선 명종 때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중략> 함경도어사, 여산군수(礪山郡守), 1557년 홍문관직제학, 이어서 예조참의, 동부승지, 호조참의, 좌부승지, 병조참지에 이어 이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563년(명종 18)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음.

     

    1558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

    큰 바위가 있어 ‘李彦憬(이언경)’, ‘洪淵(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암(㹳巖)에 또한 ‘柿隱兄弟(시은형제)’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차하게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한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출처:도솔산 연소재

     

    마족대,馬足臺

     

    냉연대(마족대)

    불일폭포 방면에 있는 바위로, 말이 지나간 발자국이 있다고 하여 마족대(馬足臺), 마적대(馬跡臺) 또는 마적암(馬跡巖)이라고도 불렀다. 용마(龍馬)의 발자국이 남은 흔적이라고도 하고, 청학동에 살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말을 타고 가다 머물렀던 자취라고도 전한다. 1744년 8월 지리산 청학동을 찾은 이계(夷溪) 황도익(黃道翼, 1678-1753)은 냉연대(冷然臺)라고도 불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생긴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일화가 더해지기도 했다.

     

    마족대(馬足臺 , 말발굽 자국

     

    평전입구 우측으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목장승

     

    불일평전(佛日平田)

    지리산의 이상향인 청학동으로도 지목을 받던 불일평전이다.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잔危棧(위태로운 잔도)을 기어오르기도 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김일손 유두류록

     

    또한 이곳에는 봉명산방이라는 堂號(당호)를 단 조그만 초가집이 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곳을 지키며 가꿔온 변규화선생이 기거 하셨던 곳이다.

     

    이곳 불일 오두막의 봉명산방이라는 당호는 소설가 정비석선생이 작명을 해 주셨다.

     

    봉명산방(불일휴게소)과 변규화 옹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라는 함태식님(작고)의 '지리산 전매특허'라고도 맣랗 수가 있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실천에 옮겼던 분이 또 있다. 지리산의 또 다른 털보인 불일평전 오두막의 변규화님이다. 불일평전 오두막은 소설가 정비석님이 일찌기 이 곳을 찾아와 '봉명산방(鳳鳴山房)'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도올 김용옥님이 국사암에 은거하고 계실 때 한달만 기거하자고 졸랏 던 곳이다. 이 이도막의 주인이 이십수년째 불일평전을 지키고 있는 변규화님이었다. 지금은 변규화 옹이 작고하신 이후 아드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예전같은 정겨움이 사라져 아쉽기만 하다.

    변규화님이 봉명산장을 지키고 있을 때 불일폭포를 갈 때에는 반드시 베낭을 이 곳에 벗어놓고 다녀와야 했다. 지금은 그런 불호령도 없다.

    변규화님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고 한다. 또한 불일폭포 위의 상불에서 오랜동안 토굴생활을 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른 특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독특한 산중 수련생활과 해박한 지식, 여유와 해학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변규화 옹이 불일폭포를 드나들때 베낭을 두고 가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등산객, 유산객들이 불일폭포를 찾아들면서 불일폭포에서 취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비일비재하연 것을 목격하고는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매번 허사였다. 이런 사람들이 한바탕 놀다가면 남는 것은 빈병과 캔, 음식지꺼기 등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다시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갖 방법에도 속수무책이자 불일오두막에서 강제로 베낭을 보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도 이러한 변규화 옹의 노력에 감명하여 불일평전에 많은 예산을 들여 야영장을 설치해주었고, 취수대와 취사대, 소각장과 화장실까지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과 지리산을 사랑한 함태식옹과 변규화 옹께서 이젠 모두 고인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故 변규화 옹

     

    봉명산방(鳳鳴山房) & 변규화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봉명산방(鳳鳴山房)'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이곳을 찾아 붙여준 이름이다. 고려말 학자 이첨이 지리산을 찾아와 지은 시에 '산 중의 산'이라 하여 '봉황명(鳳凰鳴)'이라 쓴 구절이 있다. 거기서 따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으로 '봉명산방'이란 이름을 지었다. 불일암, 불일폭포, 불일평전의 '불일(佛日)은 보조국사가 이곳에서 수도정진, 깨달음을 얻은 것을 기려 국왕이 '불일(佛日)'이란 시호를 내린 데서 유래한다.

    이곳 야영장을 돌본 '돌쇠'님은 아주 '봉명공화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봉명공화국의 왕궁은 오두막집이다. 억새 이엉에다 벽 전체가 나무로 된 나무집이다. 자세히 보면 흙벽에다 디딤나무를 붙인 다음 그 위에 한 자 길이의 짤막하고 가느다란 나무를 촘촘하게 붙여 놓았다. 뜰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 돌을 쌓아올린 석탑군의 '소망탑(素望塔)'이 있다. 아기자기한 돌탁자와 나무의자 등이 봉명공화국다운 모습이다.

    불일평전을 이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가꾸면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봉명산방 방주는 변규화(본명 변성배)님이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지리산의 이름난 털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 오두막에 정착한 것은 지난 78년 10월1일이다. 어언 23년의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살고 있다. 그는 이 오두막에 정착하기 앞서 불일폭포 위쪽의 상불(上佛)에서 10년 가까이 토굴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실제 산중생활은 30년이 넘는다.

    변규화님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정상적인 학교 생활과 사회 진출의 과정을 밟았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군에 입대하여 36개월을 복무하고 만기제대했다. 그리고 일반기업체에 입사,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60년대 초 미모의 규수와 결혼, 남부럽지 않은 '서울 생활'을 누렸다. 그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자 이름난 인텔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했고, 사랑스러운 아들도 한 명 두었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서울 생활을 뿌리치고 지리산중으로 뛰어들었을까? 이 의문에 대해 그는 뜻밖의 이유를 들려준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되는 일이 없었다. 회사 자체가 얼마 못가 파산하고는 했다. 나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찾아왔던 불일암(불일폭포 위의 작은 암자)에 공부를 하러 오게 됐고, 상불에서 토굴생활(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정진)을 했다. 그러다 이 오두막에 인연이 닿아 아주 머물게 됐다."

    그는 지리산에서 '공부'하는 동안 지리산이 너무 좋아졌고, 자신의 삶터가 곧 지리산이라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토굴에서 10년을 '공부'하여 깨친 것이 지리산의 자연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청담 스님 등 이름난 고승 아래서 공부를 하느라 스님 생활도 3년 동안 했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아닌, 지리산의 자연세계로 귀의했고, 불일평전 '봉명산방'에서 영원한 자연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데는 인간의 본성에 맞춰 살아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회생활을 통해서 명예나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명예나 돈을 떠나면 인간은 자연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명예보다 자유를 택했고, 물질적인 풍족보다는 자연세계의 정신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신선세계가 별 것이겠는가.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아름다운 숲과 더불어 마음을 비우고 살면 그것이 곧 무릉도원이자 신선세계일 것이다.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한번씩 그의 서울 부인이 다녀가고는 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서울말씨가 산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서울 생활을 계속하던 그의 부인은 지난 86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들 변성호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안고 불일평전 아버지에게 왔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으로 성장, 원광대를 졸업한 광주의 규수와 결혼했다. 그 아들 부부는 봉명산방 별채에서 살며 불일평전의 대를 잇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불일평전 2세는 서울로 떠나갔고, 지금은 변규화님 홀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지리산의 자연세계가 언제나 그와 함께 있다. 지난 주말 찾아간 필자 일행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어보니까 산이 불쑥불쑥 자라나!" "예?" "저기 봐요. 나무들이 저렇게 자라니까 산이 자라는 것이나 같지!" "...!" 우리 일행은 과연 변규화님다운 말이라며 감탄했다. 그렇다. 그는 지리산과 말동무하기에도 너무나 바빠 이 산을 결코 떠나지 못하고 있다.

    *<부기(附記)>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제3권에는 변규화님의 아들인 변성호와 광주의 규수 김덕선이 불일평전에서 인연을 맺기까지의 숨은 얘기를 담은 '불일평전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다. 변성호는 지난해 서울 국악예술학교 행정직원으로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김덕선은 지난 달 같은 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고 있다. 변규화님과 각별한 사이인 국악인 박범훈교수가 변성호의 장녀를 수양손녀로 삼고 있다.
    (2001년 3월28일)

     

    청학동은 아직 신비 속에 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최치원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존재여부와 위치는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최초로 지리산을 유람한 이륙은 ‘세상에서 이른바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 과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남효온은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 청학연이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동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고, 탁영 김일손은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불일암은 보았으나,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했다. 남명 조식은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그제야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바로 청학동이다.’ 했다.

     

    이처럼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勝景)임은 분명하다. 불일암 근처가 청학동이라는 설은 분분했지만 아직 입증된 바 없고, 지금의 ‘지리산 청학동’은 전설 속의 그 청학동일 수가 없다.

     

    봉명산방에서 바뀐 불일산방

     

    백학봉

     

    완폭대(翫瀑臺)석각

    치원이 앉아서 불일폭포를 감상했다는 완폭대에 관한 유람록은 여러편 있다.
    1611년 유몽인의 유람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1618년 조위한,양경우 1686년 정시한, 1748년 이주대는 마모가 심하다고 적고있다. 그 이외에도 여러편의 기록에 나오는데 1807년 남주헌의 유람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가 2018년 지리산 국립공원직원인 조봉근씨에 의해 불일암에서 폭포쪽 대밭에서 발견되었다.
    폭(瀑)자는 오랜세월에 마모가 되어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

     

    완폭대(翫瀑臺)’의 ‘폭’은 불일폭포를 말하는 것으로,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뜻이다.
    완폭대는 불일암(佛日庵) 입구에 있는 넑은 바위이다. 10명쯤 앉아 불일폭포와 청학동 경관을 조망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청학동을 유람하던 선비들이 유람록에서 자주 언급함으로써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2018년 5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의 역사문화자원 조사 중 발견된 완폭대 석각은 완폭대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翫瀑䑓 刻字가 선인들의 일부 유산기에서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라고 언급하였으나, 성급하게 결론을 짓기는 어렵다. 1558년 남명선생이 불일폭포를 세 번째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에서 완폭대를 '寺門外松樹下(절문 밖 소나무 아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남명선생이 다녀간 시점에는 완폭대 각자가 없었는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2018년 4월 17일 오전  <조봉근>씨가 불일암 일대를 조사하던 중, 오랜 세월 동안 묻혀있던 옛 선인들의 유산기에 언급된 ‘완폭대(翫瀑䑓)’ 刻字가 새겨진 立石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지리 인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며 각자의 보존과 복원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翫瀑䑓(완폭대)는 1807년 이후에는 선인들의 유산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211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남명이 완폭대에서 읊은 시

     

    靑鶴洞 - 曺植[조식]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 청학은 홀로 구름을 뚫고서 천상계로 올라갔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 골짜기 온가득 옥구슬이 흘러 인간계로 달리네

    從知無累飜爲累[종지무루번위누] : 累가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됨을 더욱 알기에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 마음의 경지로 산하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靑鶴[청학] :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신선이 타고다님.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함.

     

    靑鶴洞瀑布[영청학동폭포] - 曺植[조식]

     

    勅敵層崖當[칙적층애당] : 견고하게 맞선 층진 낭떠러지를 맞이하니

    舂撞鬪未休[용당투미휴] : 쏟아져 부딪히며 싸우길 멈추지 않는구나

    却嫌堯抵璧[각혐요저벽] : 도리어 요임금이 구슬 던진 것을 싫어하니

    茹吐不曾休[여토부증휴] : 마시고 토하기를 거듭하여 멈추지 못하네

     

    김간(金侃) [1653(효종 4)∼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아버지는 김필신(金弼臣)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통덕랑 이천표(李天標)의 딸. 이유장(李惟樟)의 문인.

     

    완폭대에서 조망되는

    백학봉

     

    완폭대에서 조망되는

    청학봉 해발 563m

    성여신(1546~1632)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1616)에는 청학봉을 고령대라고 하였다.

     

    "불일폭포"<佛日瀑布>

    지리산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에 위치한 "불일폭포" 는,, 높이 60m 너비 3m 의 폭포

     

    불일폭포(佛日瀑布)

     

    지리산국립공원 내 있는 자연폭포로 높이가 60m에 이르는 폭포이다. 우리나라 폭포 중에서 비교적 큰 규모를 가진 곳이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 10경(景)의 하나에 속한다. 전설에 의하면 폭포아래 용소에서 살았던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내려 폭포가 생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려 희종(熙宗, 1204~1211)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폭포 근처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지눌이 입적을 하자 희종이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불일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지눌이 머물렀던 암자를 불일암이라고 불렀다. 근래에 폭포 옆에 암자가 들어서 있으며 현판에는 불일암이라고 새겨져 있다. 쌍계사 경내에서 출발하면 북동쪽으로 나 있는 산길을 따라 약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폭포까지 등산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불일암,佛日庵

     

    쌍계사 뒤 청학동 산기슭 10리 남짓한 곳에 있습니다. 진감선사가 창건했으나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머물렀다하여 불일암이라 이름지어졌습니다.

     

    불일암에는 상불일암 중불일암 하불일암이 있는데 상·중불일암은 터만 있고 현재의 암자는 하불일암으로서 페허가 된 터에, 서기 1911(신해년)년에 본사의 양용은(梁龍隱)스님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깎아지른 골짜기가 끊어진 듯이 높고 시내를 가로질러가는 길이 없는 좁고 굽은 절벽이라 가히 한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만합니다.
    언덕에 달아맨 듯하며, 수백길 낭떠러지 아래에 두 연못이 있는데 깊이를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남명(南溟) 조식(曹植)의 『두류록頭流錄』에 이렇게 전합니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고 험준하여 조금도 서로 양보하지 않을 듯 버티고 있는 산이 있으니 향로봉(香爐峰)이요. 서쪽으로 푸른 언덕을 깍아 세운 듯 만길 절벽처럼 서 있는 산이 있으니 비로봉(毘盧奉)이다.
    두서너 마리의 청학이 바위틈에서 때때로 날아 나와 위아래로 빙빙 돌며, 아래에는 검푸른 빛을 띤 못이 있는데 밑이 없는 듯이 깊다.
    좌우와 상하로 층층 절벽이 둘러 있으며, 갑자기 돌았다가 갑자기 합해지는 바람과 우레가 서로 싸우는듯하고, 땅이 닫히고 사람이 열린 듯도 하며,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며 석수(水石)도 구별할 수 없다.
    이는 신선의 무리와 큰 힘을 가진 교룡과 작은 거북이 함께 숨어 있는 집을 감추고 영원토록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청학봉(고령대)오르는 길에 진달래 꽃

     

    대은암터 해발 535m

     

    미끄럼방지 디딤돌
    있는데 산행의 중요 이정표

    거사님께서

    아내 걷는데 미끄럼방지 를 

    위해 만들었다함

     

    활인령 해발505m

    사람을 살리는 고개 활인령(活人嶺)

     

    소은산막(素隱山幕),소은암   해발566m

     

    이 산막의 주인은
    은둔거사

    소현 최병태선생님으로 알고 있다. 

    부부가 함께 거주 하였는데

    빈집이다.

    소문에 두분 중 한분이 몇년 전

    몸이 안좋아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사님 계실때

    가끔 방문해 인사 드렸는데

    오랜동안 빈 산막으로

    거사님 부부 없는  소은산막(소은암)

    이제 폐가로 변해가고 잇다.

     

    소은산막의 현판과 편액

    내외명철(內外明徹)
    안과 밖 두루 밝아야 한다는
    나름의 해석?

    증미당(蒸米堂)
    쌀을 찌는 집이니
    아무래도 밥지어 먹는 집
    이라는 뜻?

    소은산막(素隱山幕)
    일부러 숨길 필요없이 본디
    지형자체가 워낙 은둔지여서
    素隱이라하지 않았을까?

     

    맷돌

    소은산막(소은암),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맷돌 2개뿐, 자연석으로 만든 맷돌은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추정함.

     

    소은산막(素隱山幕),소은암, 폐가로 변해가고

     

    자봉스님

     

    내원 수행촌 해발369m

     

    내원수행촌(內院修行村), 내원재(內院峙)

    쌍계사(雙磎寺)는 불일평전에서 흐르는 계곡과 주계곡인 내원골이 사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원골 상류에 있는 내원재는 쌍계사와 삼성궁이 있는 세동마을과 거림을 잇는 중요 관문이다.
    조선지형도에 내원골을 따라 내원촌과 그위로도 마을이 한곳 더 있고 넓은 길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주 도로 였음을 알수 있다.

     

    내원골

     

    백학봉 과 청학봉

     

    묵자(墨字)바위

    나무나 돌에 새겼으면 "각자"라 칭하는데 먹으로 썼으니 "묵자"라 한답니다.

     

    설화에 의하면 1,100여년전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청학동에서 신흥으로 이동하는중에

    남긴흔적이라하는데 많은 부분이 지워져 그 의미는 알수없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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