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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왕봉
    지리 산행기 2024. 12. 30. 16:04

    # 언제: 2024년 12월 29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 천왕봉 거닐다...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8km   00시간00분

    # 산행루트: 순두류 - 법계사 - 천왕봉- 제석봉 - 장터목 - 유암폭포 - 법천골 - 칼바위 - 중산리주차장

     

    지리산(智異山)

     

    지은이= 김돈중(金敦中)

    제(오를 제)擧直上最高峰(제거직상최고봉) 산을 올라 곧바로 최상봉에 이르러,

    回首塵寰一片紅(회수진환일편홍) 풍진 세상을 돌아보니 한 조각 구름일세.

    徙倚烟霞得幽趣(사의연하득유취) 연하 속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 얻으니,

    風流不愧晉羊公(풍류불괴진양공) 풍류는 진나라의 양공에게 부끄러울 것 없네.

     

    김돈중(金敦中,  ?-1170) : 고려 의종 때 명신.

     

    [지리산] 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천왕봉, 天王峰   1915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법계사,法界寺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개선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1800m

    남강댐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일월대,日月臺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통천문

    통천문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

    천왕봉에서 0.5㎞ 지점인 1,890m 고도에는 15~20m 높이의 수직암벽이 10m 폭의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중앙에는 7m 높이와 5m 폭의 돌출 암괴가 위치하면서 그곳을 경계로 양측에 2~3m 폭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의 상부에는 정상부근의 암괴와 중앙부의 암괴가 파괴됨으로써 형성된 터널인 '하늘과 통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통천문이 있다. 이 통천문은 지리산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석문이라 할 수 있다.

     

    호구당(虎口堂)터

    통천문과 제석봉 사이에 안온하고 호랑이 입을 닮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움집 형태인 반지하...
    출처 : 지리산 백무동_최석기

    <하익범_유두류록 1807년>
    향적사 옛 터에 이르러 조금 쉬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 명의 남녀가 돌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에 올라 오 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오 리를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

    역참은 사람의 왕래가 활발한 교통의 요지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정황상 하익범이 말한 향적대 주변 능선상에 호구당 역참은 장터목이다.
    박래오는 호귀당이라고도 불렀다니 호랑이한테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한 곳이 아닐까?

     

    제석봉(帝釋峰)1,806m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함양군 마천면)

     

    장터목~천왕봉 3km 구간은 제석봉의 고사목지대와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 등의 경관이 특출하고 낭만적인 길이 이어져 있다. 제석봉은 높이가 1,806m로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연봉 천왕봉은 동 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한층 유명 하다. 이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고 옆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콸콸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제단 주변은 평편한 공지여서 현재는 등산객들의 야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이다. 10만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 있고 바닥은 풀밭일 뿐이다. 고사목 그 자체는 재난으로생명을 중도에 마감한 나무들의 시체여서 살벌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고사목 들이 한 두 그루도 아니요, 10만여평에 걸쳐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경관이 되고 있다.'이곳 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의 고사목 군락지로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다. 고사목의 훼손금지는 물론 이곳 에서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지한다.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지한다.

    그러나 이곳의 고사목들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누구의 소행 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방화로 한번 죽었던 나무들이 또 다시 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고사목들은 해발 1,7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도 재질이 뛰어난 나무들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50년대의 지리산의 아픔을 40 년째 침묵의 증언을 하고 있는 것에도 많은 뜻이 있다. 고사목들도 '살아있는 자연경관' 으로 잘 보전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제석봉에서 고사목 사이로 서쪽을 바라보면 반야봉과 노고단이 선명히 떠올라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유암폭포

    유평리 지명의 유암(油巖)에서 유래하였으며 폭포에 기름이 떠오르는 현상도 자주 나타나고 있어 천신의 정기를 받은 ‘천왕성모’가 출산한 징후라는 토속신앙이 서려 있다고 한다.

     

    홈바위

    칼바위와 홈바위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태조가 개국후 지리산에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하장수에게 칼을 주면서 그자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던 중  소나무아래 큰바위위에서 글을 읽는 선비를 보고 다가가 칼로 내려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그때 부러진 칼날이 3km를 날아와 칼바위가 되어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지리산 최고의 명물이라 하겠으나 어찌보면 지리산의 아픔이라 하겠다.

     

    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3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기념비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에서 수학하셨고 지리산이 좋아 가족(부인과 세 딸)과 생이별을 마다않고 산으로 들어와 잔돌평전(세석고원)에 터를 잡아 30년 동안 하늘을 지붕 삼아(아호 우천의 뜻) 생활하면서 칠선계곡, 한신계곡을 비롯한 다양한 코스의 등반로 개척, 조난자 구조, 등산로 정비 등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지리산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갖은 어려움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6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칠선계곡 어디 동굴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일 뿐입니다. 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하시겠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야말로 지리산의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 산행영상

    장터목에서

     

    # 산행지도

     

    #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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