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박물관(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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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1)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의 기도터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8. 2. 18:14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27년 지리산 지켰던 ‘인간 산신령’의 氣찬 흔적들 지리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지리산(해발 1915m)은 우리 영토 척추인 백두대간의 출발점이자 마무리 지점이며, 그 줄기는 진부령과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1400㎞를 힘차게 내달리며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 또한 지리산은 48만3022㎢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식생 보고일 뿐만 아니라 특유의 지리산권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내며 1967년 12월에 우리나라 최초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지리산은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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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발견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3. 24. 16:36
조선일보의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의 취재 지원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을 조사하던 중, 여덟 모롱이(팔롱, 八隴)의 석문(石門)에서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발견하였다. 이 석문(石門)은 송대와 벽송사 그리고 엄천과 오봉리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길목에 있다. 쉽게 설명하면 방장문(方丈門)은 지리 동북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자연 석문으로, 내지리와 외지리를 구분하는 경계(석전 사문에는 봉전령)이다. 이 길은 신라의 화랑 영랑이 3,000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영랑대에 올랐다는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에 가야인들이 이미 구축한 산길로 추정된다.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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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12곡] - 1곡 : 용유담(龍遊潭)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3. 23. 19:33
용유담(龍遊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⑴ 지지(地誌=地理誌) ⑵ 고지도(古地圖)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4. 용유담의 각자(刻字) 5. 용유담의 외나무다리 6. 기우제와 용왕당(龍王堂), 성모묘(聖母廟) ⑴ 기우제(祈雨祭) ⑵ 용왕당(龍王堂) ⑶ 성모묘(聖母廟)에 대한 가설 7. 임천과 엄천 ⑴ 같은 강 다른 이름 ⑵ 임천(瀶川) 이야기 ⑶ 엄천(嚴川) 이야기 ⑷ 고지도 속의 임천과 엄천 8. 용유담과 지리산댐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언제부터 용유담이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의 기록은 역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이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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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인호 <지리산탐승안내> 유람록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2. 16. 14:32
【읽어두기】 ○ 이 글은 지리산에 관한 간략한 종합소개 글이다. 글쓴이 민인호(閔麟鎬 1884-?)는 1919.10~1923.3 함양군수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와 시를 수집하여 1922년 7월 《지리산지(智異山誌)》를 편찬하였으며, 자신의 글 『지리산탐승안내』를 그 부록에 실었다. 민인호는 함안군수 함양군수 밀양군수 김해군수를 지냈으며, 밀양군수 시절에도 밀양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다. 일제로부터 2차례 기념장(記念章)을 받았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지리산지》는 총 180쪽으로, 모두 23명의 작자가 쓴 산문 8편과 시 40편이 수록되어 있다. 산문은 김종직 김일손 조식 박여량 등의 잘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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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법주굴 - 이성계의 기도처 - 광덕사지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2. 15. 14:37
1463년 유지리산록, 암법주굴, 이성계 1463년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 자료출처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도서명 : 속동문선(제 21권) 저자 : 이륙(李陸) 이륙 作 유지리산록은 당시 지리산행 지침서. 김종직은 이륙의 유지리산록을 수친서로 작성. 1472년 8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리산 유람. 이륙은 기묘년(1462.세조8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파묻혀 공부하며 지리산을 두루 유람한다. 그가 주로 오른 코스는 천왕봉과 법계사 주변과 지리산 동부지역의 수계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좋은 탐구산행 자료가 된다. 이륙의 유두류산록은 그의 시문집 청파집에 담겨있다. 이륙의 청파집(靑坡集) 이조 초기의 문신 이륙(李陸:1438~98)의 시문집. 연산군 때 간행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간행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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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모석상] 수난의 역사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8. 09:50
지난 1973년 8월 초순 까지만 해도 천왕봉 서쪽 1.5미터가량 떨어진 바위에는 합장하고 있는 높이 1미터의 성모상과 그 오른편에 높이 1,1미터 가량의 여신상을 새겨놓은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 *1959년 천왕봉에 있던 성모석상과 마애불(님 사진) *1962년 천왕봉 산막의 영감님과 성모석상과 마애불 *1973년도 사진 (님 제공 님 사진) 가부좌를 한 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석상으로 몸집에 비해 유별나게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같이 할머니같이 포근하고 인자한 얼굴이다. 움푹 들어간 눈이 매혹적이고 햇볕에 눈이 시린 듯 눈가에 웃음이 배어 있다.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언저리에도 미소가 흐른다. 쑥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이 석상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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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의 각자 일월대(日月臺)에 대하여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8. 08:51
●일월대(日月臺)의 개요. 일월대는 한자문화에 살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어낸 지리산 천왕봉의 별칭이다. 조선시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수많은 선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개 천왕봉의 일출과 일몰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선비들은 몇 날을 걸려서 지리산에 오른 후에는 소위 양반의 지체로 천왕봉에서 풍찬노숙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염원인 지리산의 일출과 일몰을 마음껏 감상하고서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일찌감치 500년도 훨씬 전부터 그들은 광대무변의 지리산에서 해돋이와 달뜨기의 최고 명소는 오직 천왕봉이라고 기록을 통해 인구에 회자를 시키고서는 이름조차 일월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선비들이 남긴 천왕봉의 일출과 일몰을 찬탄한 기록들은 오랜 세월을 이어져 오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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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流山記 南臺寺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와 오두인 석각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1. 15:08
오두인(吳斗寅) 1624년(인조 2)~1689년(숙종 15) 陽谷集卷之三 / 記 / 頭流山記 余自南來之後。嘗欲一見雙溪。以快平生願遊之志而不可得也。適審災傷。廵歷右道。會于晉陽。田政旣訖。顧謂主牧曰玆行也。出入四十餘郡。覽盡嶺南山川。間或乘戰艦。泛於南海巨濟之間。可謂極山海之大觀。而只以跡阻頭流爲恨耳。今吾與子盍往觀諸。李侯曰此余之願也。今幸有同志。時不可失。乃以十一月初吉乙亥。與主牧遂作雙溪之行。召村督郵金公。亦偕往焉。自本州西行四十里。過鳳溪院。至外家先塋掃拜。仍秣馬于山下。向夕而發。踰黃峴行三十里。投宿于玉溪寺。河東太守李公。亦來會焉。以其地主也。昆陽召募將金緝者。亦追後而至。皆曾與同遊南海者也。初二日丙子。偕晉陽,河東兩太守及金督郵。早發玉溪。踰三牙峴。行四十里。朝飯于岳陽。岳陽卽晉之屬縣也。天開大野。村落瀟灑。太山西峙。帶以長江。江自求禮境出。過于雙溪之下。此爲蟾..